풍운사일 1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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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45화
길게 가로지른 천잔산맥에는 수도 없이 많은 산들이 꼬리를 이으며 자리했고 겨우겨우 비켜선 곳에는 거대한 협곡이 칼로 잘라낸 듯 파여 있었다.
중경과 호북을 연하고 펼쳐진 천잔산맥은 중원 중부에서 가장 거대한 산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호북에서 중경을 가기 위한 여행객이나 상인들은 천잔산맥을 우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어디선가 나타난 오색 전포의 무인들이 천잔산맥 중 가장 높은 봉우리의 주인인 성모산의 자락에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금방 알 수 있는 통일된 복장.
오색 전포의 무인들은 모두 합해 오백이었는데, 색별로 백 명씩 구분되어 있었다.
성모산을 금방이라도 부술 것 같은 기세.
얼마나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지 천잔산맥의 영험한 기운조차 무인들의 기세에 잠겨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더욱더 무서운 것은 그들을 이끌고 있는 수장들이었다.
어깨에 번개 문양을 매단 그들은 색이 다른 전포를 입었을 뿐 똑같은 투구까지 쓰고 있어 쉽게 구분이 되지 않았으나 슬금슬금 뿜어져 나오는 투기는 닿기만 해도 부서질 것처럼 강력해서 금방이라도 베어질 것처럼 서늘했고, 그 시선에 담긴 기운은 얼마나 현묘한지 마주 보면 피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그들도 등을 보이고 있는 사내가 입을 열지 않자 침묵을 지킨 채 서 있기만 했다.
장내를 가로지르는 숨 막히는 긴장감은 분명 사내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허허로운 기운.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처럼 아무런 기세조차 내보이지 않는 사내의 모습은 아름다웠고 섬세했는데, 그 모습에서 압도적인 위압감이 생성되고 있었으니 진정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백색 무복을 입은 채 고요히 서 있던 사내가 천천히 움직여 수장들을 바라보았다.
중년의 사내.
수장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매는 너무 깊고 깊어 그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놓쳤다고?”
작은 목소리.
음성은 부드러웠고 아무런 질책도 담기지 않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오호단의 수장들은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사내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중앙에 서 있던 백색 전포의 무인이었는데, 그는 오십이 훌쩍 넘었음에도 나이에 비해 체구가 당당한 사람이었다.
“단황야,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소천, 죄송합니다만 아무래도 혈염공이 우릴 속인 것 같습니다.”
“속여? 아들이 아직 잡혀 있는 데도?”
“어제 풀어줬다고 얘기해 줬는데 그자는 그걸 믿은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습니다.”
노인이 정중하게 허리를 접자 소천라고 불린 사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단황야의 대답이 그럴 듯했기 때문이었다.
혈염공은 십오천강에 포함되는 절대 강자였다.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지시에 따른다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짓이었을 테니 조금의 빌미만 마련되어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십악과는 다르게 심지가 굳은 자였다.
친혈육이 납치되지 않았다면 천의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만큼 현명한 자이기도 했다.
나이 차가 있는 데도 소천을 대하는 단황야의 태도는 극히 조심스러웠고 정중했다.
예전 청성의 표물을 습격하면서 운호와 싸울 때 보여줬던 오만함과 자신감은 완전히 사라진 채 오직 공경만이 담겨 있었다.
대를 이어 평생을 모셔온 주군 요환의 아들이자 현재 천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소천, 요문은 모든 천의 무인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존재였다.
아직 성주인 요환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으나 조만간 대업이 이루어지면 대권은 자연스럽게 요문에게 넘어올 수밖에 없었다.
현명하고 강하다.
수하들에 대한 애정이 깊고, 일에 대한 처리가 사리에 어긋나지 않으며 무력의 깊이는 하늘에 닿아 대적할 자가 없을 정도다.
무천십제가 천하를 굽어본다고 하지만 요문의 무력은 이미 그들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해진 지 오래였다.
오호단은 요문의 친위 부대로, 천의 주력 중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가졌다.
성주, 요환이 오호단처럼 강력한 부대를 장자인 요문에게 준 것은 다른 네 명의 아들들이 함부로 대권을 욕심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성주의 유일한 제자들이자 아들인 다섯의 대공은 전부 천왕검법을 구 성이 넘게 익혔기 때문에 천하를 넘볼 만큼 대단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른 대공들이 요문의 위치를 넘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성주의 신임이 두터웠고 그를 보좌하는 제장들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단황야가 고개를 들지 못한 것은 청귀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행적을 교묘하게 숨겨 버린 혈염공의 농간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놈은 교묘하게 산하로 향하는 것처럼 청귀들을 집단으로 이동시킨 후 반대 방향에 있는 수호에서 최후의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천의 주 병력은 엉뚱한 곳에 천라지망을 까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비록 자신이 작전의 선봉에 서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주공이 바라는 결과를 얻지 못한 이상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있을 수 없었다.
단황야가 고개를 숙인 채 들지 않자 요문의 얼굴이 펴졌다.
오호단의 수장들은 세상으로 나가면 무림의 무력 서열을 단숨에 바꾸어놓을 만큼 강한 무인들이었는데, 자신의 한마디에 고개를 들지 못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만들 하지. 그러고 있으니까 편하게 말하지 못하겠잖아.”
“송구합니다.”
“그나저나 그자가 어디로 간 것 같나?”
“풍사와 청룡의 말에 따르면 혈염공의 주검이 수호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사라졌던 백귀들도 거기에 있었다고 하더군요. 지금 귀곡(鬼哭), 뇌전(雷電), 박룡(博龍)이 추적하고 있는데, 그자들은 아무래도 이미 중경을 넘은 것 같습니다.”
“중경이라… 사천으로 가려는 걸까?”
“귀주나 운남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운남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가장 큰 것 같습니다.”
“왜지?”
“탕마행은 삼 년을 기약하는 것이었으나 나머지 자들은 천하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모두 점창으로 돌아간 상태입니다. 놈들은 계속되는 우리의 공격에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테니 분명 점창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음… 그렇다면 막사검은 점창에 가서 찾아야겠군.”
“그자들에게서 막사검을 뺏을 수 있는 자는 없을 테니 아무래도 그리해야 될 것 같습니다.”
“대단한 자군. 살막을 혼자서 격파하다니 정말 기가 막힐 정도야. 단황야, 예전에 그자와 손을 나눈 적이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분명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자의 무력이라면 쉽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자도 그랬겠지만 저 역시 끝장을 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소름이 끼치는군요.”
“무슨 뜻인가?”
“그 당시 저는 전력을 다하면 절대 지지 않을 거란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자가 지금까지 한 짓을 보면 제가 홀로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목숨을 걸고 싸웠다면 저는 아마 살아남기 어려웠을 겁니다.”
“하긴 그렇기도 하겠어.”
“충분히 십제와 자웅을 결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한 자입니다. 벌써 그자에게 당한 백대고수가 여섯입니다. 더군다나 살막을 통째로 세상에서 지웠으니 진정 믿겨지지 않는 일이올시다. 물론 두 명의 조력자가 있었다고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황야의 대답을 들은 요문이 가볍게 혀를 찼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점창… 구더기처럼 산다고 해서 치지 않았더니 그런 놈들을 길러냈단 말이지. 선대의 원수를 갚는 것보다 대계가 먼저라고 생각해서 그냥 놔둔 게 화근을 만든 모양이군.”
“지금이라도 명을 내리시면 점창부터 쓸어버리겠나이다.”
“지금까지 참아왔는데 지금에 와서 대계를 망칠 수는 없는 일이야. 우리의 예하 세력들은 이미 모든 전장에 투입되어 발을 빼기 어려우니 점창을 치려면 본성 병력이 나서야 되는데 그리되면 변수가 만들어지게 될지도 몰라. 대계에서 변수를 만든다는 건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걸 의미하지.”
“그렇다면 중경으로 넘어간 마검 일행은 어찌하오리까?”
“이미 전쟁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놈들 몇이 우리 일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 해도 변하는 것은 없을 테니 그냥 놔둬. 나중에 대계가 완성되었을 때 제거하면 되지 않겠어?”
육하(陸河).
호북을 벗어나 중경의 북쪽으로 진입하면 장강의 지류 중 가장 길고 큰 강인 미천강이 나오는데, 육하는 백사장 중 가장 커다란 삼각주를 일컫는다.
천이 천라지망을 깔아놓은 산하와는 동북쪽으로 오백 리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육하에 도착한 운호 일행은 그때서야 한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멈추었다.
운호 일행이 수호를 떠나 혈염공이 가르쳐 준 대로 지체 없이 육하를 향해 떠난 것은 삼 일 전이었다.
전력을 다해 움직였고 잠시도 쉬지 않았다.
천이란 조직에서는 벌써 운호 일행에 대한 소멸 의지를 몇 번이고 내비친 적이 있었다.
천검회와 팔황문도 모자라 살막을 움직여 차도살인까지 계획했으니 그들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충분히 알 만했다.
살막을 움직여 놓고도 산하에 천라지망을 깐 것은 운호 일행을 포함해서 살막까지 한꺼번에 세상에서 지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격언.
세상을 속이는 음모의 주재자, 천은 그들의 대계를 조금이라도 알거나 눈치챌 우려가 있다면 가차 없이 입을 막아버릴 정도로 철저한 자들이었다.
그랬기에 혈염공도 그러한 사실을 눈치채고 결전의 위치를 다르게 전해준 것이 틀림없었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혈염공이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분명 그들은 산하 쪽으로 움직였을 게 뻔했고 목숨이 경각에 달할 만한 위험에 처했을지도 몰랐다.
중경을 통해 사천으로 들어가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 산하였으니 수호에서 움직이는 여행자라면 백이면 백 산하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지의 세력, 천의 힘은 지금까지 나타난 것만 해도 가공할 정도였으니 적은 인원으로 부딪치는 건 절대 피해야 할 일이었다.
인간의 힘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연의 위엄은 압도적이었고 광활했다.
끝없이 펼쳐진 육하를 바라보며 운호의 시선이 아련하게 변했다.
이제는 기억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의 고향 용현도 이와 비슷한 풍경을 지니고 있었다.
아비의 등에 업혀 고기를 잡으러 나갈 때마다 운호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것이 아비의 등이라 생각했었다.
한없이 넓었던 아비의 품. 너무나 따뜻해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고 그 등에 매달려 재롱을 떨었다.
그럴 때마다 아비는 넉넉한 너털웃음으로 그에게 꺼칠꺼칠한 수염을 비벼댔다.
아프지 않았다. 그것이 아비의 사랑임을 어린 나이에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느 날부터 아비와 어미의 손이 거칠어졌고 눈이 퀭하게 들어가면서 동네에 역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서운 병.
수많은 어른들이 죽었고 수많은 아이들이 병과 배고픔으로 서서히 죽어갔다.
혼자 남아 배고픔을 견디며 고통과 싸울 때 사부님을 만났다.
사부님은 외로움에 지쳐 있는 그를 거두고 오랜 길을 걸어 점창으로 향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뼈만 남았던 어린아이가 걷기에는 무척 먼 길이었다.
그럼에도 한 번의 투정도 부리지 않았고 힘들다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산다는 것, 누군가에 의해 목숨을 구원받았다는 것은 믿겨지지 않을 만큼의 인내심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육하를 떠나 중경을 관통해서 사천으로 들어서자 사람이 달랐고 공기가 달랐으며 물이 변했다.
가는 곳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무인들이 흘린 피가 지천으로 깔려 사하를 더럽혔다.
검이나 칼 찬 무인들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숨기에 바빴는데, 사천은 이미 모든 상권이 정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표국의 운영이 중지되었고 특산물의 교역도 끊긴 지 오래였다.
상인들은 숨을 죽인 채 길을 나서지 않았고, 농사꾼들은 논을 방치한 채 집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닌 삶.
생업을 포기하는 게 죽는 것보다 낫다는 민초들의 생각은 청당전의 치열한 전투와 함께 비옥했던 사천의 땅을 황폐화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