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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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38화
“그래, 마창은 어떤 사람이던가?”
“어떤 면에서 말입니까?”
“내가 알기로 그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하던데 그와 대화가 가능했는지를 묻는 것일세.”
직설적으로 묻지 않는다.
그저 마창의 정신 상태를 말하면서 혹시 그와 나누었을지 모를 신비 조직에 관한 정보를 원하고 있다.
그랬기에 운호는 그의 질문에 맞추어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어차피 말해주고 얻어야 할 것이 있었으니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문주님 말씀대로 그는 착란 증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죽음을 앞에 두고는 올바른 정신을 차렸습니다.”
“말해주던가?”
“많은 것을 듣지는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단서는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단서?”
“그는 죽으면서 천왕산을 말했습니다. 그곳이 그자들의 본거지를 의미하는 것 같았습니다.”
“음… 천왕산이라…….”
운호의 대답을 들은 번천검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겼다.
그 역시 천왕산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처음 들어 보는 지명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운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번천검의 표정이 곤혹에서 서서히 벗어날 때였다.
“저희들은 강호 경험이 일천해서 천왕산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혹시 문주님께서 알아봐 주실 수 있을런지요.”
“당연히 알아봐야지. 그자들의 소굴이 그곳이라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찾아내겠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으니 시간을 주게. 칠 일 정도 기다릴 수 있겠나?”
“고맙습니다. 기다리지요.”
“천왕산에 갈 생각인가?”
“점창은 오랜 세월 무림의 안위를 위해 싸워왔습니다. 당연히 가야지요. 가서 그들의 암계를 깨뜨릴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면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갈 것입니다.”
운호의 당당한 말에 번천검의 얼굴이 슬쩍 굳어갔다.
자신 역시 강호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으나 천하를 뒤져야 하는 수고로움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처하는 점창의 무인들을 보자 얼굴이 붉어졌다.
물론 이유도 있고 변명거리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운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에는 부족함이 느껴진다.
“자네들의 웅지와 혈기가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구먼. 이렇게 강호를 위하는 무인들이 있으니 어찌 그자들의 야욕에 무림이 꺾이겠는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하시게.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최대한 돕겠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문주님, 현재의 무림 상황이 궁금합니다. 아까 들어오다 보니 경계가 강화되어 있더군요. 상처를 치료하느라 두 달을 비우다 보니 정보가 많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도대체 안휘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팔황문과 무풍사가 드디어 칼을 빼들었네. 그들은 한 달 전에 금사련과 화월곡을 공격해서 현재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일세…….”
번천검의 입에서 작금의 무림 상황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천하혈사.
그의 말에 따르면 강호의 피바람은 강남북을 가리지 않고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중이었다.
청당전은 확전을 거듭해서 아홉 개의 문파가 참여했고 혈검쟁투 역시 열세 개로 늘었다.
그런 마당에 안휘를 중심으로 새로운 전장이 형성되고 있었으니 이제 중원은 완전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드는 중이었다.
남은 것은 구룡회와 칠대세가, 호천십문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중에도 이미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문파들이 있었으니 온전하게 세를 유지하고 있는 집단은 전무하다고 봐야 할 지경이었다.
전쟁의 양상도 점점 격렬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국지전을 벌이면서 눈치만 보았지만 이제는 본격적인 전면전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국지전만 가지고도 피비린내가 멈추지를 않았었는데 전면전을 벌인다면 강호가 얼마나 아플까.
상상만 해도 슬픈 일이다.
번천검이 이야기를 마쳤을 때 운호 일행의 얼굴은 굳어질 대로 굳어져 있었다.
점창, 그리고 천하무림.
구룡회의 복원이 사문의 숙원이었으나 현재의 무림은 공멸의 위기에 처해 있었으니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 수가 없다.
왜,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데 욕심을 부리는 것일까?
팽이처럼 머리가 돌아갔고 그에 따른 상황 판단도 명료하게 튀어나왔다.
공청석유를 먹은 것이 원인인지 머리가 훨씬 깨끗하고 맑아진 느낌이었다.
“세상이 참으로 어지럽습니다. 제가 봤을 때 은하문도 전쟁의 여파를 피해내기 어려워 보이는군요.”
“명철한 판단일세. 그렇지 않아도 화월곡에서 지원을 요청해 왔네. 화월곡은 무풍사에 비해 세력이 약하니 우리가 돕지 않는다면 위험에 빠지게 되겠지. 어차피 놈들이 신비 조직의 예하 세력임을 알았으니 화월곡을 도울 생각이야. 그래서 자네들이 중요하네. 최대한 빨리 놈들을 찾아내 주게. 그리되면 나머지 호천십문을 끌어들여 팔황문과 무풍사를 칠 수 있는 명분을 만들 수 있네.”
“하령이를 통해 팔황문과 무풍사의 총사들을 감시해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성과가 있었습니까?”
“없었네. 그자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더군. 하지만 나의 아버님께서 계속 그자들을 주시하고 계시다네. 그러니 그자들이 움직이기만 한다면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야.”
운호 일행은 소하령의 끝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호화스럽게 꾸며진 객방에서 시간을 죽였다.
어차피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사내 셋은 소하령의 앞에 나란히 앉아 그녀의 살아온 과거부터 좋아하는 것들, 예를 들면 꽃이나 책, 음악 등 다방면에 걸친 모든 것을 들어야 했다.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흥미도 동했다.
여자들의 삶은 사내들과는 또 다른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런 고강한 무공을 익히게 되었는지도 흘러나왔고 남자에 대한 이상형도 서슴없이 말했다.
착하고 듬직한 남자.
자신만을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있는 남자라면 언제든 혼인할 생각이 있다는 그녀의 말에 운호와 운여는 운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럴 수 있겠냐는 질문이 담긴 시선이다.
그런 놈들의 시선을 운상은 간단히 밥 말아 먹고 소하령과 끊임없이 떠들고 웃었다.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뜻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운상의 생각은 진중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약속했던 칠 일은 금방 지나갔다.
천왕산이란 지명은 중원천하에 일곱 군데나 있었다.
명산으로 알려진 곳이 아니라 첩첩산중에 숨어 있는 은산이 대부분이었고 산맥에 포함되어 존재조차 간신히 알아낸 곳도 있다.
다시 말해 험준한 산세를 지닌 악산들이란 뜻이다.
문제는 그 지명들이 강남북에 골고루 퍼져 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
광대한 중원천하를 종횡으로 종주해야 되는 상황이니 암담함이 몰려왔다.
번천검이 직접 지도를 들고 들어와 한참을 설명을 해주고 나갔으나 일행은 모여 앉아 머리를 맞댄 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마창이 말한 천왕산이 어디에 있는가를 미리 알아맞힐 수만 있다면 시간과 노력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으니 가장 확률이 높은 곳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운상이 지도를 보면서 눈알을 굴리다가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연 것은 옆에서 운호가 지도 한쪽에 손을 올려놓고 뭔가 골똘히 생각할 때였다.
이놈이 이런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짚이는 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운상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즉시 물었다.
“어디에 있을 것 같냐?”
“천이란 조직은 아마 삼십팔세보다 훨씬 강력한 조직일 거야. 예전 표물을 운송할 때 부딪친 놈들, 그리고 청성을 공격한 놈들의 전력을 놓고 보면 그런 추론이 가능해져. 놈들의 전투부대는 강하기도 했지만 그 숫자도 만만치 않았단 말이다.”
“그래서?”
“그렇다면 훨씬 수월해지지 않을까. 천왕산에 놈들이 웅크리고 있다면 그만 한 병력이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있어야 해. 다시 말해서 식량의 조달과 생필품을 원활하게 공급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야.”
“그렇겠군. 먹고는 살아야 할 테니 말이야. 생필품을 공급할 수 있는 도시가 주변에 있는 곳을 찾는 게 우선이겠어.”
“내 생각에는 여기 여기를 먼저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운호의 손가락이 사천의 북천(北川)을 짚었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북천의 뒤쪽에 있는 동그라미를 짚은 것이다.
그런 후 그의 손이 동그라미를 타고 내려와 청해의 감덕(甘德)과 귀주의 인회(仁懷)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동그라미들은 일곱 군데의 천왕산 중 도시를 끼고 있는 곳들이었다.
나머지 천왕산들은 광동, 산서, 복건, 절강에 산재되어 있었는데 산맥 깊숙이 위치하고 있어 사람이 살기에는 부적절했다.
운여가 입을 연 것은 운호의 손가락이 지도에서 떨어졌을 때였다.
“어디부터 갈 생각이냐?”
“운곡 사형께서는 나에게 막사검을 얻으면 스스로 가장 올바른 판단을 내려 행동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맥락으로 봤을 때 이 검은 청성에 돌려주는 것이 맞아. 청성이 도난당한 검이었으니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맞지 않는 이야기야. 어차피 그 검은 청성의 것이 아니었다.”
“의뢰를 받은 상태였으니 주인이라고 봐도 된다. 막사검을 어찌할지는 그들이 선택할 일이고.”
운호의 말에 운상이 다시 나섰다.
그는 예전부터 막사검이란 천고의 보물을 청성에 돌려주겠다는 운호의 생각에 이의를 지니고 있었다.
보물에는 주인이 없다고 했다.
그것이 모든 무인들이 꿈속에서라도 갖고 싶어 한다는 막사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어차피 얻은 보물. 점창으로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사정과 형편.
사문인 점창에는 보물이라 칭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원천적으로 때려 막은 것은 운여였다.
“욕심 부리면 다친다. 운호 말대로 하는 것이 맞아. 괜히 막사검을 사문으로 가져갔다가는 자칫 무림인들의 공적으로 몰릴 수도 있어. 그러니 청성에 돌려주자.”
“그건 청성도 마찬가지잖아!”
“아까 말한 그대로다. 그것은 청성에서 짊어지고 갈 책임이야. 우리는 원칙에 따를 뿐이지.”
“쯧쯧, 이놈들아… 이렇게 욕심들이 없으니 곧 등선하겠다. 알았다, 알았고. 그럼 사천부터 가야겠구나. 운호 이놈, 너 혹시 한 소저 보고 싶어서 그런 생각한 건 아니겠지?”
“아니야, 인마.”
“순진한 놈. 그렇다고 얼굴 붉힐 건 뭐야. 사람이 사람을 보고 싶어 하는 게 무슨 죄겠어. 보고 싶으면 보고 싶을 뿐이지.”
운상이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섰다.
워낙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 고민을 했더니 머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아팠다.
이제 앞으로의 행동이 결정되었으니 자리에 누워 잠시라도 쉴 생각이었다.
이제 앞으로 운호의 결정에 제동을 걸지 않을 생각이었다.
막사검에 대한 욕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런 생각을 버리자 친구들의 뜻이 따뜻하게 가슴으로 다가왔다.
대의, 그리고 도의.
도가에 귀의하여 삼십 년 가까이 살아온 삶인데 기껏 검 하나에 욕심을 부렸으니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고개를 빳빳이 들 수 있는 건 나의 욕심을 본 사람들이 목숨마저 내줄 수 있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놈들은 나의 욕심을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으니 말이다.
참으로 인연이 얄궂다.
번천검은 또다시 소하령을 운호 일행에게 따라붙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신비 조직의 위치를 알게 되면 즉시 은하문에 연락해야 하고 운호 일행의 편의를 돕기 위해서는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 번천검의 설명이었다.
설득력 있는 사유는 아니었으나 누구 하나 나서서 반대하지 않았다.
똑같은 이유.
운상이 소하령에게 호감을 지닌 이상 운호나 운여는 절대 반대를 하지 못한다.
소하령의 수다에 귀에 딱지가 앉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은하문을 나서 또다시 길고 긴 여정을 시작했다.
안휘에서 사천까지는 직선으로 따져도 무려 일만 삼천 리에 달하는 거리였다.
대충 잡아도 두 달이 넘어야 되는 여행길이지만 운호의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다.
보고 싶은 얼굴이 거기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
언제나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어 했던 여인이 목적지의 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사람, 한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