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25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25화
객방에 들어선 운호 일행은 사방을 둘러보며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객방 수준이 아니라 귀빈을 모시기 위해 준비해 놓은 것처럼 최고급으로 꾸며진 방이었다.
더군다나 전담하는 시녀까지 따라붙어 불편한 점을 일일이 물어왔기 때문에 오히려 부담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천천히 중앙에 놓인 의자에 둘러앉은 그들은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과한 응대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운여야, 네가 봤을 때 이게 무슨 상황 같냐?”
“글쎄, 나도 그게 궁금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아.”
“그게 뭔데?”
“저녁밥은 아마도 진수성찬으로 나올 것 같다.”
“넌 어째 시간이 갈수록 운상을 닮아가냐. 좋은 걸 닮아, 인마!”
“운상이가 아니라 너한테 배운 거야.”
“내가 뭘 어쨌는데?”
“무작정 배 째라고 덤비는 게 어디 한두 번이었어? 근데 그게 요상하게 통하더라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살기로 했다.”
“미치겠네. 넌 뭐 해? 벙어리처럼.”
운여의 넉살에 고개를 흔들던 운호가 가만히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는 운상을 향해 말을 붙였다.
요즘의 운상은 이렇게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상해서.”
“뭐가 이상한데?”
“그렇게 차갑게 대하던 여자가 갑자기 초청을 했는데 넌 안 이상해? 난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혹시 네가 마음에 든 건 아닐까?”
“지랄! 그걸 말이라고 하냐!”
“왜 말이 안 돼. 여자들은 속과 겉이 다른 동물들이라니까. 내가 겪어봐서 알아.”
“얼씨구, 아주 연애에 도통한 놈처럼 얘기하는군.”
“그럼 네가 생각했을 때 뭐 다른 이유라도 있다는 거냐?”
“아마도.”
운호의 반문에 운상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며 짧게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이 상황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운호 일행이 갑론을박을 멈추고 방문을 쳐다본 것은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고수의 감각은 다가오는 자의 발걸음에 따라 지닌 무력까지 측정할 수 있을 만큼 예민하다.
숨 몇 번 들이켤 시간이 지나자 방문이 열리며 사람이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던 운호 일행이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동시에 탄식을 터뜨렸다.
화용월태(花容月態) 침어낙안(侵魚落雁).
무슨 말로 이런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을까.
방 안으로 들어선 소하령은 전포를 벗은 채 화려한 연미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는데, 마치 하늘에서 금방 내려온 선녀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당황한 것은 운호 일행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소하령은 운호 일행이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정신을 차리자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식사를… 저희 아버님께서 같이 저녁을 들자고 하십니다. 기다리고 계시니 가시지요.”
“번천도께서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초대를 했으니 식사를 대접할 거란 예상을 했지만 문주인 번천도가 기다릴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일문의 문주는 그 움직임이 무거운 법이다.
더군다나 번천도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세력 중의 하나인 은하문의 주인이었고 무림백대고수에 들어 있는 절대고수였다.
그런 사람이 초면이고 한참 어린 후기지수들을 식사에 초대한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운여는 슬며시 나서며 궁금증을 물었다.
무턱대고 그냥 가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소저, 문주께서 직접 우리를 초대한 건 격에 맞지 않는 일이오. 혹여 다른 이유라도 있소?”
“격이 맞지 않다니요. 저희 아버님께서는 격을 맞추기 위해 직접 여러분을 초대하신 거예요. 천하의 마검이 오셨는데 누가 접대를 할 수 있겠어요. 아버님께서 여러분을 식사에 초대하신 건 당연한 일이에요.”
이상하게 바라보며 소하령이 대답하자 운호 일행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모르는 실수를 하기도 하는데 바로 운호 일행이 그랬다.
그들은 자신들의 격이 무림에서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번천도가 초대하자 당황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하령의 말대로 번천도가 직접 저녁 초대를 하게 된 이유는 마검의 위치가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했다.
백대고수 중 둘이나 잡아냈고 천검회의 주력을 박살 내며 강남을 횡단한 마검 일행을 그 누가 쉬이 접대할 수 있단 말인가.
소하령을 따라 전각 사이를 돌아 한참을 걸어가자 대단한 규모의 삼 층 누각이 나왔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 건물로 들어갔는데, 입구에는 웅혼한 서체로 ‘천망’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
하늘을 보는 곳이란 뜻이다.
대단한 자신감이 들어 있는 글귀였기에 운호는 글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누각 안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연회장이 나왔고 중앙에는 커다한 탁자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턱수염을 멋지게 기른 노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하령을 따라 노인을 향해 다가가자 상석에 앉아 있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뒤로 밀고 앞으로 나왔다.
기세의 완벽한 갈무리.
절대고수에게서 나타나는 은기현상이다.
그랬기에 운호 일행은 긴장된 마음으로 노인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어서 오시게. 누가 마검이신가?”
단도직입적인 질문.
옆에 운상과 운여가 있음에도 소의명은 시선을 앞으로 둔 채 답변을 기다렸다.
어찌 보면 무례한 행동일지 모르나 여유로운 그의 태도는 그런 생각조차 갖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운호가 앞으로 나서며 가볍게 허리를 숙인 후 일행을 소개한 것은 소의명의 행동에 대한 반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가 사람들이 마검이라 부르는 운호올시다. 여기 같이 온 사람들은 운상과 운여라고 합니다.”
“반갑네. 이렇게 위명이 자자한 그대들을 보게 되다니 내가 운이 좋은 모양일세.”
“과찬이십니다.”
뒤늦게 실수한 것을 알아챈 소의명이 슬쩍 웃음을 흘리며 운상과 운여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일부러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일문을 이끌던 권위에서 온 것이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나이 많은 소의명이 미안함을 표해오자 운호는 슬쩍 굳어졌던 얼굴을 풀었다.
소의명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까운 곳에 마련된 자리에 운호 일행을 안내한 후 술을 쳤다.
식사는 경직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지만 곧 소의명으로 인해 가볍게 풀어졌다.
일문의 문주답지 않게 소탈한 성격을 가진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는 운호 일행을 새까맣게 어린 후학으로 상대하지 않고 자신과 동급으로 대우하며 대화를 이끌어갔는데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천천히 자신의 궁금증을 묻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의 질문에 운호가 대답하면서부터였다.
“세상을 오래 살다 보면 가끔가다 사람들의 어리석은 행동들을 보게 되지. 정말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오직 결과에만 집중하는 것이 그중 하나일세. 사람들은 천검회의 특수부대들을 연파하며 강남을 횡단한 마검 일행의 무력에 환호했지만 그런 싸움을 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네. 어떤가. 참으로 어리석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사람은 누구나 보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요.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아닐세. 그것은 본질을 꿰뚫는 눈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또 하나의 이유를 댄다면 누군가가 중간에서 본질을 훼손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일세. 마검 일행의 행적과 전적은 고스란히 노출되었으나 천검회와 싸운 이유는 단순한 시비가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면서 시작된 것으로 사람들은 믿고 있네. 미지의 누군가가 중간에서 진실을 은밀하게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랬군요.”
“이제 말해주게. 나는 그대들이 천검회와 싸운 이유가 궁금하다네.”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무림 안위와 사문이 관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안휘는 천지사방에 피가 흘러넘치는 중이네. 삼 일 전까지만 해도 요마왕이 막사검을 지닌 채 화천으로 향했다는 정보가 사실인 양 떠돌더니 이제는 마창이 가지고 있다는 소문도 있고 또는 등천비마가 지닌 채 유환으로 이동한다는 설도 있네. 그러니 막사검이 있다는 곳은 피가 마를 날이 없는 실정이야.”
“그 부분은 저희 역시 걱정하는 바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풍사(無風沙)와 팔황문(八荒門)이 사파의 고수들과 마두들을 척살하고 있다는 걸세.”
무풍사와 팔황문은 모두 안휘와 호북, 강서를 배경으로 구성된 호천십문에 포함된 문파들이었다.
무풍사는 은하문과 더불어 호천십문 중 가장 강력한 무력을 지닌 세력이었고 팔황문은 안휘의 성도인 합비를 장악해서 쌓아 올린 재력을 바탕으로 최근 무섭게 강해진 문파였다.
그랬기에 영문을 모르는 운호는 질문을 하면서도 말을 흐렸다.
“그건 무슨 말씀인지……?”
“그들은 무슨 이윤지 몰라도 막사검과 상관없이 안휘에 들어온 사마외도 무리들을 무조건 죽이고 있네. 벌써 그들의 손에 죽어간 자들이 이백이 넘어.”
“그렇다면 그것은 잘된 것 아닙니까.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자들을 제거하고 있으니 칭송받아 마땅할 일입니다.”
“언뜻 보면 그리하지. 하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사마척결의 기치를 들었던 적이 없던 자들일세. 그런 자들이 동시에 계획한 것처럼 나서서 피바람을 몰고 있으니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더 이상한 것은 그들이 은밀하게 회합하고 있다는 것이네.”
“은밀하게 회합을요?”
“그러네. 분명 그들은 같은 목적을 가진 채 행동하고 있었어. 자, 그러니 말해보게. 나는 마검 일행이 천검회와 싸운 이유가 혹시 막사검이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혈검쟁투와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네.”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소의명의 눈에서는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눈빛은 운호 일행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앉아 있으면서 더욱 강해졌다.
“정말 말해주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 그대들이 사실을 말해주면 그에 상응하는 정보를 알려주겠네.”
“어떤 정보를 말하는 겁니까?”
“우리는 무풍사와 팔황문의 뒤를 추적하다가 제삼의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어떤가? 이 정도라면?”
“혹시 그 세력의 이름도 아십니까?”
소의명을 바라보며 운호가 눈을 오므렸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의외의 장소에서 신비 세력의 흔적을 발견하는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소의명의 입에서 천(天)이라는 이름만 나온다면 말이다. 하지만 눈빛이 더욱 강해진 건 소의명도 마찬가지였다.
“마검의 눈을 보니 그대들도 제삼의 세력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그들의 이름은 천(天)일세.”
“음…….”
설마 했던 운호 일행의 입에서 동시에 무거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대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소의명의 입에서 천이란 이름이 나오자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운호는 빠르게 호흡을 가다듬고 질문을 이어나갔다.
“문주님께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무풍사와 팔황문은 호천십문에 포함되어 있는 문파들입니다. 평소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문파들인데 어째서 은하문에서는 그들을 추적하게 되었습니까?”
“나의 부친께서는 여행을 무척 좋아하신다네. 어느 날 훌쩍 떠나면 오랫동안 집을 비우시는 분일세. 그런 분이 문득 집에 돌아오셔서 나를 앉혀놓고 믿지 못할 사실들을 알려주셨네. 자, 더 듣고 싶으면 이제 말해주게. 내가 지닌 패를 반쯤 꺼냈으니 자네들 것도 보여줘야 되지 않겠는가.”
역시 강호의 늑대다운 협상술이다.
중요한 대목에서 말을 끊은 그는 운호를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무겁게 다물었다.
은하문을 믿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믿지 않고 버티는 것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은하문이 천의 예하 세력이었다면 이 정도까지 정보를 제시하며 접근해 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운호는 천천히 입을 열어 그동안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소의명의 얼굴은 수시로 변했다.
놀람과 당황, 그리고 안도. 마지막에 남은 것은 고민이었다.
그는 운호의 이야기를 다 듣고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은 채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입을 연 것은 운상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마창을 잡아야겠군.”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창의 정확한 소재지를 알고 있으니 가르쳐 주겠네.”
“어딥니까?”
“합비일세.”
“그자가 성도에 있단 말입니까. 막사검을 추적하는 게 아니고요?”
“그가 왜 거기에 있는지는 모른다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오 일 전부터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지.”
“어쨌든 가봐야 되겠군요.”
“대신 합비에 가기 전에 송정을 들려보게. 부친께서는 송정에서 무풍사와 팔황문의 총사들이 천에서 나온 자와 만나는 걸 목격했다고 하셨네. 아마 그곳에 가면 어떤 단서를 잡을지도 모를 걸세.”
“동성에 있는 그 송정 말입니까?”
“그러네.”
“그게 언제였습니까?”
“칠 일 전이라고 하시더군.”
“혹시 멸절도께서는 문에 계시는지요?”
“안 계시네. 이틀 전에 궁금한 게 있다고 다시 나가셨네.”
“만날 방법은 없겠습니까?”
“나가시면 한동안 돌아오시지 않는다네. 물론 연락도 되지 않고. 왜 그러시는가?”
“천이란 자들의 음모는 무림을 산산조각 낼 만큼 치밀하고 위험스럽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천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하니 답답하기 짝이 없는 상황입니다. 혹여 더 아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기에 드린 부탁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네. 우리 또한 음모의 냄새를 맡은 이상 그냥 놀고만 있지 않을 생각이네.”
“어쩌실 요량이십니까?”
“자네들이 떠날 때 이 아이와 같이 가줬으면 하네.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 정말로 천이란 세력이 강호를 통일하기 위해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면 은하문이 중심이 되어 호천십문을 결속시키겠네. 음모는 드러나는 순간 그 무서움을 상실하는 법일세. 강호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똑똑히 알려줘야지. 그놈들한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