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22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22화
일행은 운호의 주장에 따라 중경을 통과한 후 방향을 틀어 호북의 무한으로 향했다.
거의 한 달 반의 여정이었기 때문에 중간중간 도시에 들리기도 했으나 태반을 노숙으로 보내야 했다.
그랬기에 무한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모습은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무한(武漢).
호북성의 성도로서 인구는 오십만이 넘었고 항주의 서호와 쌍벽을 이루는 동호(東湖)가 있으며 강남삼대명루에 포함되는 황학루(黃鶴樓)가 있는 곳이었다.
그랬기에 무한은 언제나 시인 묵객들로 붐볐고 수많은 여행객이 통과하는 곳이기도 했다.
“일단 씻고 뭘 좀 먹자.”
“그래, 온몸이 먼지라서 일단 씻어야겠어.”
운호의 제안에 운상과 운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흑색 전도복은 먼지로 누렇게 변해서 본래의 색깔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옷뿐만이 아니라 얼굴과 머릿결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도시 입구에서 거지로 보일까 봐 열심히 털었더니 간신히 사람처럼 보였다.
맨 처음 도착했던 모습으로 먼지도 털지 않은 채 객잔에 들어갔다면 금방 쫓겨났을 게 틀림없었다.
나름대로 사람처럼 만들고 중심가에서 한참 떨어진 객잔으로 들어갔다.
가난한 사문을 둔 덕분에 그들의 주머니는 언제나 달랑거릴 정도로 가벼웠기 때문이다.
중앙로에 있는 고급 객잔은 그들에게 천상 세계의 궁궐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럴 때마다 한설아가 생각났다.
그녀는 어디서 숨겨왔는지 온몸에서 금자가 요술처럼 튀어나왔기 때문에 종종 훌륭한 객잔에서 고급 요리를 먹곤 했었다.
객잔에서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늦은 점심을 먹은 운호 일행은 객방에 나란히 누웠다.
배를 채우고 방구들에 누우니 저절로 잠이 쏟아질 정도로 노곤했다.
그러나 살아온 것이 낮잠을 잘 만큼 태평하게 살아오지 않았으니 잠이 올 리 만무했기에 그들은 눈을 뜬 채 천장만 바라보았다.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아직도 천오백 리는 더 가야 해. 이십 일은 더 잡아야 될 거다.”
“확실히 천하가 넓긴 넓구나.”
“우린 한 달 반 동안 죽어라고 이동만 했다. 그러니 오늘 하루는 편하게 쉬자.”
아직도 이십 일은 더 가야 한다는 운호의 말에 운여가 기가 찬다는 듯 하품을 하자 운상이 즉시 쉬어가자는 제안을 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사람이 한 번도 안 쉬고 오랜 시간을 앞만 보고 달린다면 그것도 못할 짓이다.
그랬기에 운호와 운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뭔가를 공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시선을 부딪쳐 무언의 동의를 얻곤 한다.
순식간에 합의를 본 운호가 슬그머니 운상에게 물었다.
“하루 쉬면 어디 갈 데 있어?”
“있지. 여긴 호북의 무한이다. 무한 하면 동호가 있고 황학루가 있지. 평생을 꿈꿔서 한 번 온다는 곳이다. 어때? 보고 가야 되지 않겠어?”
“그렇게 좋아?”
“천계가 따로 없단다.”
“동호하고 황학루가 우리 가는 쪽하고 같은 방향이냐?”
“동쪽에 있으니까 그렇지. 강서로 들어가는 함녕(咸寧)으로 가다 보면 나온다니까 돌 필요는 없을 거야.”
“그럼 가자. 뭐 해? 일어나지 않고.”
“운호… 뭐냐, 너!”
“빨리 가자고. 어차피 갈 거면 서두르자니까. 해 떨어지기 전에는 도착해야 제대로 구경할 거 아냐!”
“그건 그렇군.”
운호가 벌떡 일어나 내려다보자 운여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운상만은 황당한 얼굴로 두 놈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루 쉬어가자고 말한 것은 사실 경치 구경보다 노숙하기 싫어서 꺼낸 이야기였다.
동호나 황학루는 무한에서 가까우니 놀다가 들어와 편안한 잠자리에서 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이놈들 하는 짓을 보니 당장 짐을 싸서 떠나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리되면 의도했던 바와 완전히 달라진다.
이미 물은 엎어졌고 이제 와서 다시 담을 수도 없다.
머리를 써서 조금 편하게 지내보려고 했더니 오히려 고생을 자초한 꼴이 되고 말았다.
동호는 장강 줄기와 인접해 있는 거대한 호수였다.
얼마나 큰지 수평선이 시선의 범위에서 벗어날 정도였다.
운호 일행은 장강 줄기를 따라 내려오다가 악주(鄂州) 옆길로 빠져 들어갔다.
무한에서 동호를 가는 최단 거리는 황석(黃石)을 따라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악주까지 내려간 이유는 그곳에 수많은 시인 묵객이 그 아름다움을 노래했다는 황학루가 있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온 것이 다행이었다.
그들이 황학루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동쪽으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운호 일행은 능선에서 보이는 황학루와 동호를 번갈아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한동안 경치를 감상하던 운호가 친구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보는 것도 좋았지만 황학루에서 바라보는 동호의 경치가 절경이란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석양이 내리기 전에 얼른 가보자.”
“저기까지 이각이면 갈 수 있어. 그러니까 서두르지 마.”
“해는 금방 지고 붉은 노을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서둘러서 나쁠 것도 없잖아.”
하긴 맞는 말이다.
괜히 늦장 부렸다가 천하십대절경 중의 하나라는 황학루의 석양을 보지 못한다면 천추의 한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운호와 운여는 운상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유운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서두르길 잘했다.
황학루는 능선에서 바라볼 때보다 훨씬 멀었기 때문에 예측했던 이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그들이 황학루에 도착해서 망루에 올랐을 때 붉은 노을이 피기 시작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을 붉게 달구어놓은 석양을 바라보며 저마다의 상념에 빠져들 뿐이었다.
이런 아름다움 속에서 그리워하는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명소라는 말은 사람이 많다는 걸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황학루에는 수많은 사람이 호수에 핀 낙조를 구경하느라 몰려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자연이 선물해 준 장관을 구경하며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누구라도 예외는 없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감정에 사로잡혔으니 자연의 위대함은 인간의 범주를 언제나 뛰어넘는다.
한동안 낙조를 구경하던 운호 일행은 천천히 황학루에서 내려왔다.
불타듯 하늘에 번졌던 노을은 어느새 어둠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다른 구경거리가 눈으로 들어왔다.
황학루 앞에 펼쳐진 공터에도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낙조를 구경했는데, 그들 중에서 눈에 번쩍 들어올 만큼 대단한 외모를 지닌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숫자는 모두 열.
남자가 여섯이고 여자가 넷이었다.
그들 역시 낙조를 구경했던 모양인데 이제 돌아가기 위해선지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여인들이구나.”
“네 눈에는 여자만 보여? 사내놈들도 하나같이 대단한 호남들이다.”
운상의 말에 운여가 덧붙이자 지켜만 보던 운호가 혀를 찼다.
두 놈 하는 짓이 가관이다.
“어째 너희들은 그 모양이냐. 천하를 들었다 놨다 했던 놈들이 기껏 외모 타령이나 하니 참으로 한심하다.”
“잘생겼잖아. 아름답고.”
“그러니까 왜 그것만 보이냐고. 너희들은 저자들이 은근하게 내뿜는 기세가 느껴지지도 않아?”
“왜 모르겠어. 그냥 해본 소리지.”
운호의 타박에 운상이 재빨리 시선을 돌려 멀어지는 용봉들을 아쉽다는 듯이 쳐다봤다.
비슷한 나이의 젊은이들이었으니 같이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기에 운상은 돌렸던 시선을 다시 운호에게 고정시킨 후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고 가자.”
“뭔 소리냐?”
“동호의 절경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석양 낙조고 또 하나는 호수에서 떠오르는 일출이다. 우린 아직 일출을 보지 않았으니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일출을 보면 좋겠다.”
“너, 정말 이유가 그것뿐이야?”
“아니, 사실은 따뜻한 방에서 자고 싶어. 일출이야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데 오늘만은 정말 따뜻한 이불이 그립다. 운호야, 운여야, 우리 하루만 묵고 가면 안 되겠냐?”
“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된다고, 인마. 그런데 여기 잘 데는 있냐?”
“당연히 있지. 명소가 괜히 명소겠어. 여긴 없는 거 빼곤 다 있는 곳이다.”
운호의 허락에 운상이 거품을 물었다.
한동안 입씨름을 하거나 폭력을 동원해야 간신히 될까 말까 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무 흔쾌히 동조를 해오자 오히려 허탈감이 느껴졌다.
운상의 말대로 황학루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불야성이 형성되어 있었다.
무한의 중심가인 태평로에 버금갈 정도로 화려한 거리였다.
아니, 어떤 면에서 본다면 더 고급스럽고 사람들의 수준도 훨씬 높아 보였다.
십대비경을 찾아 천하에서 몰려든 자들 중에서 하루를 선계에서 보내겠다는 마음을 가진 자들만 묵는 곳이 바로 이 미향로였기 때문이었다.
미향로에는 없는 게 없이 다 있지만 크게 대별한다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바로 객잔과 기루였다.
객잔에 머물면서 한 잔 술과 함께 아름다운 가기를 만진다는 건 모든 사내의 소망이었으니 미향로는 그런 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길을 따라 걷는 운호 일행은 미향로의 초입부터 이미 기가 질린 상태였다.
양쪽에 우뚝 선 기루에서는 많은 가기가 손님들을 유혹하느라 창가에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서시처럼 예뻤고 양귀비처럼 농염했다.
가끔가다 창가에 서 있던 가기들이 운호를 불러 세웠다.
무림인이 아니었으니 점창의 상징인 흑색 전도복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짓이었다.
그녀들의 눈에 운호는 무적의 검사가 아니라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 헤매는 화류공자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가는 곳마다 이러냐. 잘생긴 놈하고 다니면 꼭 이런 비교를 당해야 된다니까. 야, 인마. 넌 이제부터 열 발자국 뒤에서 따라와.”
“신경질 부리지 마. 자꾸 열 내면 머리 벗겨져.”
“그냥 하는 소리가 아냐. 자꾸 비교되니까 자존심 상해서 하는 말이야.”
“시끄럽고 객잔이나 찾아봐. 일단 먹자.”
“여긴 너무 비싸 보이지 않냐?”
“괜찮아.”
운여의 걱정에 운호가 큰소리를 쳤다.
뭔가 믿는 것이 없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랬기에 운상과 운여가 동시에 운호를 노려봤다.
“뭐, 왜?”
“너, 한 소저가 가면서 돈 주고 갔냐?”
“미친놈.”
“그런데 인마, 왜 큰소리야!”
“한 소저가 아니라 대사형께서 주고 가셨다. 먼 길 다니면 돈이 필요하다면서 꽤 큰돈을 주셨어.”
“얼마나?”
“이만큼.”
운호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전낭을 꺼내 들었다.
운여가 재빨리 뺏어서 열어 보자 제법 많은 금자와 은자가 전낭에 담겨 있었다.
운여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가뜩이나 돈이 달랑달랑해서 막막하던 차였는데 운호의 품에서 나온 전낭은 그런 고민을 일거에 날리는 것이었다.
운여는 마치 전낭이 원래부터 자기 것인 양 품으로 집어넣었는데 황당한 표정을 짓는 운호를 향해 도끼눈을 부릅떴다.
“이놈이… 이런 돈이 생겼으면 미리 토해냈어야지. 지금까지 돈이 없어서 내가 얼마나 고민한 줄 알아!”
돈이 생기니 여유도 생겼다.
미향로에서 제일 큰 객잔으로 운호와 운상이 주장해서 들어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내일부터는 풀뿌리만 먹고살 테니 오늘만큼은 최고로 맛있는 요리를 먹고 죽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랬기에 운여는 못마땅한 얼굴로 할 수 없이 따라 들어왔다.
한참 저녁 먹을 시간이라 그런지 객잔에는 사람들로 붐볐기 때문에 일 층은 자리가 꽉 차 있었다.
점소이가 그들이 들어서자 당연하다는 듯 이 층으로 안내해서 자리에 앉혔다.
이 층에도 손님들이 있었지만 일 층보다는 한산한 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으면서도 운호 일행은 점소이를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점소이는 이제 갓 스물이 넘어 보였는데 이곳 세계에서 닳고 닳았는지 능수능란하게 손님들을 다뤘다.
이 층은 척 보니 일 층과 다르게 비싼 음식을 파는 곳이었다.
예전에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었지만 운호 일행은 끝내 아무 말도 못 하고 주문을 했다.
그들이 들어서자 황학루에서 보았던 젊은 용봉들이 맞은편에서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열 명.
남자들도 부담되었지만 천상의 미모를 지닌 여자들 앞에서 음식 값 타령을 하는 것은 죽기보다 더 싫은 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