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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117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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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풍운사일 117화

내력을 끌어올리자 피가 역류하며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지만 고여 있던 피를 뱉어내자 묵직했던 가슴이 편안해졌다.

숨을 고르고 한 올의 내력까지 짜내서 검에 주입한 후 다가오는 적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들의 눈은 붉게 젖어 있었다.

나의 죽음을 원하는 그들의 눈은 마치 핏빛처럼 붉었다.

후후…

웃음이 나왔다.

나의 죽음을 저토록 원하는 것은 나에 대한 저들의 증오가 그만큼 깊기 때문일 것이다.

피 묻은 입술을 닦기 위해 왼손을 끌어올리려 했으나 남의 팔처럼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끝끝내 팔을 들어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았다.

마지막 승부.

이제 이 한 번의 충돌을 끝으로 이 세상과 이별을 고한다.

후회는 없었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젊은 나이에 이슬처럼 사라져 가는 자신의 청춘이 서러워 스르륵 눈가가 젖어왔으나 이를 깨물고 전의를 다졌다.

와라… 마검은 결코 그냥 죽지 않을 것이다.

 

날카롭고 뾰족한 비명 소리와 함께 한설아가 날아온 것은 운호가 적들을 향해 힘들게 검을 치켜들 때였다.

그녀는 운호를 잡아채서 뒤로 끌어냈는데 곧이어 쌍악이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며 그들을 호위하듯 막아섰다.

다가서는 윤환과 십팔영을 향해 검을 곧추세운 쌍악의 기세는 그 기운이 너무 현묘해서 마치 허상을 보는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다가서던 윤환이 걸음을 멈추었다.

뒤에는 십팔영이 따랐고 우측 후방에는 칠현이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이것들이…

가로막은 자들이 누군지 잘 안다.

마검과 함께 척살 대상에 오른 무당의 쌍악이다.

마검 일행을 잡는 데 집중하느라 잠시 잊었던 인물들이지만 그렇다고 척살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었다.

천라지망에 갇혔던 쌍악이 천검회의 수중에서 벗어난 것은 마검 일행 때문이었지, 그들의 무력이 잡지 못할 만큼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운이 좋은 자들이란 뜻이다.

그런 놈들이 죽을 자리로 다시 돌아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자 의문이 먼저 생겨났다.

도대체 이놈들은 뭐 하자는 걸까?

마검과 이놈들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면서까지 돌아왔단 말인가?

더군다나 단 둘이지만 막아선 놈들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여유까지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잠시 잊었던 분노가 솟구치듯 일어났다.

가뜩이나 마검으로 인해 전력의 상당 부분을 잃은 상태에서 나타나 앞을 가로막은 쌍악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그랬기에 그는 묵검을 치켜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

그러나 새로운 상대가 앞을 가로막자 불같은 호승심이 불타올랐다.

가소로운 것들.

마검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나 쌍악을 잡기에는 아직 충분한 전력이 남아 있었다.

시간으로 봤을 때 도주한 놈들은 잡지 못할 것 같았지만 마검과 쌍악을 잡는다면 총사와 스승인 화검제를 만나도 부끄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십팔영이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양쪽으로 갈라지며 그를 호위하듯 감쌌고 오륜과 칠현이 자신들의 전투부대의 앞에 서서 개전을 기다렸다.

싸움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워낙 많은 시간을 마검 때문에 소비했으니 단박에 처단하고 돌아가 쉬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눈앞으로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나면서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능선으로 귀신같이 내려앉은 신형들.

칠십여 명에 달하는 그들은 하나같이 붉은 전포를 입고 있었는데 양쪽 허리춤에 참마도가 매달려 있었다.

뽑지 않았어도 뽑은 것과 다름없는 기세.

한번 보면 죽을 때까지 잊어버릴 수 없을 것만 같은 이유는 그들의 몸에서 활화산처럼 뿜어져 나오는 패기 때문이었다.

극패의 도법인 광풍도를 익힌 사내들.

능선을 장악하고 나타난 사내들은 철혈문이 자랑하는 무적의 철혈칠십이도였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들의 전면에는 사자 수염의 노인이 자리를 했는데 그가 바로 막강 전투부대 철혈칠십이도의 수장 혈무도 왕충이었다.

윤환은 다가서던 걸음을 멈추고 이를 드러냈다.

순식간에 회전하는 머리.

적과 아군의 전력을 비교해서 유불리를 판단하는 것은 전장에서 수장이 취해야 할 기본자세다.

판단은 금방 내려졌고 결정도 그에 못지않게 빨랐다.

비록 철혈칠십이도가 대단한 위력을 지닌 도귀들이라고 하지만 저들만 온 것이라면 이곳에 모인 천검회 전력으로 충분히 꺾을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의 판단을 완전히 무너뜨린 건 뒤이어 능선으로 올라선 삼십 대 후반의 중년 무인으로 인해서였다.

그의 뒤에는 백 명의 백의 도객이 자리를 잡고 늘어섰는데 마치 흰 띠가 멋지게 열을 맞춰 선 것 같은 형상이었다.

나타난 중년 사내의 키는 육 척에 달했고 왼쪽 허리에 대혈도를 찼으며 귀와 목 쪽으로 커다란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중년 사내가 앞으로 나서자 윤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대혈도만 가지고도 정체를 짐작할 수 있는데 흉터까지 확인하자 나타난 중년인의 정체는 금방 노출되었다.

철혈문의 주인인 호패왕의 대제자이자 귀주오룡의 일인으로 천강도법을 극성으로 익혔다는 운월 강문이 바로 그였다.

윤환의 얼굴과는 다르게 다가온 그의 표정은 차가울 정도로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가 청백이냐?”

“천검회에서 한옥이 달린 청건을 쓰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다. 그러니 내가 청백이자 염라로 불리는 윤환이지 않겠느냐.”

“너에 대한 소문은 지겹게 들었다. 사람 목숨을 끊는 걸 미친놈처럼 한다고 해서 염라라 불린다며?”

“크크… 들어본 모양이구나.”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인 윤환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철혈칠십이도만 왔다면 충분히 해볼 만했지만 강문이 이끄는 비령단이 나타나자 손에 땀이 배기 시작했다.

비령단은 철혈문의 주력 전투 집단 중 하나였다.

한 치의 위축도 없는 대답에 강문의 얼굴에서 쓴웃음이 피어올랐다.

역시 화검제의 제자다.

싸움이 벌어지면 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당당하게 버티는 윤환의 자세는 같은 무인으로서 충분히 인정할 만한 것이었다.

마검에게 얼마나 당했던지 대부분의 천검회 수뇌부는 모두 중경상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어차피 여기서 모두 죽일 생각이었으니 마지막으로 호패왕이 알고 싶어 하는 내용들을 물어보고 싶었다.

물론 시원한 대답이 나올 가능성은 적었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죽음을 앞에 둔 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알려주지 않아야 할 사실도 말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청백, 이 가을이 참 곱다. 어떤 계절보다 아름답고 맑지 않느냐. 그런데도 불구하고 천검회는 아름다운 대지를 피로 물들이는구나. 도대체 이유가 뭐냐. 푸르른 하늘을 두고 피를 흘리려는 이유를 말하라.”

“이유라… 그걸 나에게 묻다니 재밌군. 너의 심기가 단순하지 않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그럼에도 나에게 그걸 묻는다는 건 날 죽일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꼭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다. 너무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지. 그동안 잠잠하던 세월을 깨고 풍파를 일으키는 천검회의 의도가 너무 궁금했다. 더군다나 천검회답지 않게 사파외도의 무리들을 동원해서 우리를 공격한 것은… 한심하고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하긴, 그건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 하지만 말이야, 우리 총사는 머리가 대단히 복잡한 위인이라서 뭐 때문에 그런 짓을 했는지 알려주지 않더라.”

“그렇다면 너는 왜 풍파를 일으키는지 모른다는 소리구나?”

“쯧쯧… 그걸 격장지계라고 하는 것인가? 그만해라. 보기 안타까우니.”

“정 모른다면 할 수 없지.”

예상처럼 윤환의 태도가 나오자 강문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시작했다.

강문이 움직이자 그의 뒤쪽에서 네 명의 사내가 그림자처럼 따라 나왔다.

강문이 의형제를 맺었다는 절정의 고수 귀주오룡이 분명했다.

그들이 움직이자 비령단이 칼을 뽑아 들었고 칠십이룡이 전진해 왔다.

일제히 일어선 기세. 바로 공격의 투지다.

그러자 천검회 측도 전투 진형을 형성하며 양쪽으로 늘어섰다.

능선을 경계로 늘어선 그들 사이에 생겨난 팽팽한 긴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윤환의 입이 열린 것은 강문이 공격을 위해 대혈도를 끌어당겼을 때였다.

“강문, 네 말대로 이 가을이 참 예쁘다. 하나, 무인의 가슴속에 들어 있는 뜨거운 웅지보다 어찌 더 아름답겠느냐. 왜 풍파를 일으키는지 묻는 너의 질문이 나는 더 이상하다. 무인이 검을 드는 것을 보고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무어라 답할까. 천검회는 검으로 천하를 본다. 우리는 그것을 숙명으로 생각하고 살아왔으니 검을 들어 천하를 질주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

다가온 것은 강문이 먼저였으나 묵검을 들고 허공을 날아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은 윤환이었다.

천검회와 철혈문의 전면전을 알린 무호계전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한설아는 운호를 뒤로 끌어당겨 삼 장이나 물러난 후 줄곧 그의 눈만 바라봤다.

이렇게 늦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운호가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은 그녀를 급하게 만들었다.

천일평에 들어선 후 운여와 운상이 돌아가자 그녀는 한서 지단까지 전력으로 달렸다.

마검의 위명은 중천을 찔렀고 운여와 운상의 무력도 대단했으나 무호계에 몰린 천검회의 전력과 싸운다면 무조건 죽는다고 봐야 했다.

피하는 싸움이라면 모를까 사형제를 구출하기 위한 싸움이라면 그럴 가능성은 구 할이 넘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한서 지단에 도착하자마자 무조건 그들의 수장인 혈무도 왕충을 찾았다.

천검회가 철혈문을 공격할 때 운호 일행이 도와줬다는 사실이 있었고 천검회가 자신들의 영역까지 들어와 천라지망을 쳤다는 걸 안다면 그냥 있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다행스럽게 그 판단은 맞았고 왕충은 한서 지단의 병력 대부분을 이끈 채 출전을 했다.

왕충이 천검회의 전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도 망설임을 보이지 않은 것은 소패왕의 대제자인 강문이 한서 지단에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격적인 출전이 이루어졌고 한설아는 그들을 이끈 채 능선으로 향하는 도중 점창 제자들을 들쳐 업은 채 천일평을 달려오는 무당의 쌍악을 만났다.

금방 따라올 것이라는 그들의 말과는 달리 우뚝 솟은 능선까지 뻗어 있는 천일평에는 운호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걱정으로 인해 입술이 말라갔다.

그 모습에 쌍악도 자신들의 판단에 이상을 느꼈던지 운상과 운여를 바닥에 내려놨다.

운상과 운여는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던지 꼭 시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들도 걱정되었으나 한설아는 입술을 깨물고 미친 듯 능선으로 향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탈출할 때 걸렸던 시간은 그렇게 빨리 지나가더니 막상 님을 찾기 위해 돌아가는 시간은 영원처럼 길어 그녀의 속을 까맣게 태웠다.

마침내 능선에 도착했을 때, 혈인으로 변한 운호가 힘들게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가슴이 아파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흘러나왔다.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지 않았고 오직 그녀의 눈에는 운호만 보일 뿐이었다.

무조건 달려가 끌어안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만약 적들이 공격을 해온다면 온몸으로라도 그 대신 검을 맞을 생각이었다.

그토록 강건했던 운호는 자신의 품에 힘없이 안겨 있었다.

운호는 자신을 안고 있는 것이 그녀라는 것을 알자 힘겹게 웃음을 떠올렸다.

“왔군요.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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