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07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07화
부드러운 웃음을 지은 채 대화를 나누던 운호가 웃음을 멈추고 친구들에게 눈짓을 한 것은 그로부터 일 각이 지난 후였다.
운호의 눈짓에 먼저 반응한 것은 운상이었다.
“불청객이 왔어. 동굴을 발견한 모양이군.”
“포위된 건가?”
운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맛을 다셨다.
밖에서 다가오는 기세들은 한둘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가온 자들의 기세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운상은 운호을 쳐다봤다.
“움직일 수 있겠어?”
“일어설 수 있다. 문제는 원활하지 않다는 것이지. 반나절만 더 있으면 괜찮아질 거다.”
“놈들이 계속 충원될 테니 지금 빠져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놈들이 철혈문의 영역인 여기까지 쫓아왔다는 건 천검회가 나를 잡겠다고 작정했다는 뜻이다. 지금 온 놈들은 피라미에 불과해. 몸통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 아마 놈들은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몸이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천검회의 주력들과 부딪치면 득보다 실이 더 많다. 그럴 바에야 몸을 완전히 추스르고 돌파하는 게 맞아.”
“공격해 온다면?”
“너희들이 막아야지. 화공을 하면 대책이 안 서니까 입구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나가서 싸워야 한다.”
“반나절이나 버티라고?”
“놈들도 수뇌부를 기다려야 하니까 섣불리 공격하지 못할 거다. 최대한 버텨. 나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
“쯧쯧… 또 피 보게 생겼네. 검에 찔린 거, 칼에 베인 거 끙끙대며 간신히 치료해 놨더니 그게 며칠 못 가. 어떻게 너만 만나면 내 몸이 성하질 못하냐!”
“저놈 탓하면 뭐하냐. 쫓아온 우리 잘못이지. 그동안 네 말 안 믿은 거 미안하다.”
“무슨 말?”
“저놈하고 같이 다니면 만신창이가 된다는 거.”
“클클… 이제야 믿는군.”
운상이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운여를 바라봤다.
그런 후 검을 들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자 운여가 그 뒤를 따랐다.
오늘 하루.
고단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될 것 같다.
적들의 숫자가 얼마나 늘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운호가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버티기 위해서는 내력을 아끼고 아껴야 한다.
내력을 아낀다는 것은 수세에 치중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만큼 부상당할 위험이 커진다는 뜻이다.
운상과 운여가 동굴 밖으로 나가자 운호는 즉시 눈을 감았다.
지금 당장 일어나 싸울 수도 있으나 완벽하게 몸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칫 강적을 만나게 되면 또다시 치명적인 위험에 직면할 수 있었다.
천검회의 대표적인 무인으로 세상 사람들은 회주인 화검제와 파우신검, 그리고 패천일도를 꼽았지만 천검회를 신주십강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그들 외에도 수많은 기라성 같은 무인들이 뒤를 받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각 당의 당주들과 호법전의 고수들, 특수부대를 이끌고 있는 수장들은 지금 당장 무림에 나가도 일각의 패주로 자리매김할 만큼 막강한 무력을 지닌 무인들이었다.
또 하나.
누구도 천검회의 진정한 힘을 알지 못했다.
신주십강 정도 되는 문파라면 노출되지 않은 비력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그 비력들 하나하나의 힘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세상을 경악하게 만들 만큼 대단할 것이라는 게 무림사가들의 추측이었다.
운호가 자신의 몸 상태를 완벽하게 치료하고자 한 것은 이런 이유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운이 좋아 패천일도를 꺾었다고는 하나 천검회의 힘에 정면으로 대응한다는 것은 목숨을 갖다 바치는 것처럼 무모한 짓이었다.
그만큼 천검회의 힘은 무섭다.
어쩌면 완벽하게 회복된 상태에서도 포위망을 뚫는 것이 어려울지 몰랐다.
공격이 시작된 것은 운호가 요상을 시작한 지 한 시진이 훌쩍 지난 후부터였다.
그동안 동굴을 포위한 숫자는 거의 칠십으로 늘어났고 지금도 계속해서 늘어나는 중이었는데 갈수록 무거운 기세를 지닌 자들이 합류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수뇌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동굴처럼 제한된 공간을 방어하는 것은 꼭 병법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입구를 틀어막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물론 단순한 무력 공격이라면 입구보다 동굴 안에서 방어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지 모르나 화공을 염두에 둔다면 입구는 절대적인 방어의 요충지였다.
그랬기에 운상과 운여는 입구를 반반씩 나누어 틀어막고 적의 난입을 막았다.
아직 여유는 있다.
천검회의 일반 무사들은 일급을 상회할 만큼 날카로운 공격력을 보이고 있었지만 제한된 공간으로 인해 포위 공격을 못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운상과 운여를 압박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동쪽 능선과 서쪽 계곡 쪽에서 피처럼 붉은 옷을 입은 자들이 나타나면서부터였다.
그들의 숫자는 모두 아홉.
강호에서 가장 강력한 협공을 펼치는 것으로 정평이 난 천검구혈객이 분명했다.
절대고수를 때려잡기 위해 화검제가 직접 키웠다는 천검구혈객은 하나하나가 모두 절정을 넘어선 자들로 구성된 천검회의 일급 특수부대였다.
운상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단순히 그들의 출현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과 거의 같은 시간에 중앙 쪽에 나타난 세 명의 노인들로 인해서였다.
똑같이 눈처럼 새하얀 백의를 입은 노인들은 구혈객을 뒤에 매달고 동굴의 전면으로 걸어왔는데 그 걸음이 거침없었다.
그중 백발에 백염의 노인은 겨울처럼 차가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마검은 안에 있느냐?”
“사람이 예의가 있어야지. 정체부터 밝히고 묻는 게 순서 아냐?”
노인의 질문에 운상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그는 노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에 완전히 반응한 모습이었다.
이런 한기라면 절정의 음공을 익혔다는 뜻인데 노인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의 시선은 전신을 훑은 후 노인의 눈에 고정시켰다.
차갑고도 무겁다.
노인이 뿜어낸 기세는 뒤늦게 나타난 세 명의 노인이 천검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들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운상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가소롭다는 미소를 피워 올렸다.
“어른 공경할 줄 모르는 아이구나.”
“당신 눈에는 내가 어린애로 보이나보군. 어디 가운데 물건이라도 보여줄까?”
“가소로운 놈.”
“닥치고 정체나 밝혀. 나중에, 아주 나중에 저승에 가서 죽인 놈 이름조차 몰라 헤매게 만들지 말고.”
“크크크… 그럴 리는 없겠지만 궁금해하니 가르쳐는 주마. 나는 백사라는 사람이다.”
“흥, 천검회에 사람 죽이기를 밥먹 듯 한다는 뱀이 세 마리 있다더니 당신들인 모양이군.”
말은 편하게 했으나 자신의 짐작이 들어맞자 운상의 안색이 흙색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생각나지 않았으나 뱀처럼 차가운 그의 눈을 확인하자 불현듯 그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삼사. 다른 이름으로 삼필사(三必死)로 불리는 자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었으나 천검회의 호법으로 이십 년 전 귀주와 강서를 오가며 무적을 자랑한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지금도 귀주와 강서무림에서는 그들을 백대고수의 밑으로 보지 않을 만큼 막강한 무력을 지닌 검귀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구혈객을 뒤에 매달 정도였기 때문에 속으로는 내심 삼필사가 아닐까란 추측은 했지만 막상 적의 입에서 정체가 밝혀지자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피를 보지 않았다.
적절하게 구역을 나누어 방어에 치중하면서 내력의 소모를 최소화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많은 시간을 버틸 수 있을 거라 자신하고 있었다.
거의 두 시진을 막았으니 운호가 말한 시간까지 한 시진만 더 버티면 된다.
하지만 막상 삼필사와 구혈객이 나타나 압박을 해오자 검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긴장.
이 정도의 무인들에게서 동굴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운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로 나올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운상과 운여의 모습에서 그들의 행동을 예측한 백사가 풀썩 웃었다.
입에 매달린 건 여전한 조소였다.
“막을 생각인 모양이구나.”
“우리는 뱀 정도는 언제든 때려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백사, 얼굴에 든 미소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지워라. 안 그러면 내가 이 검으로 지워줄 테다.”
“푸하하하!”
“웃는 걸 보니 재밌는 모양이네.”
“이런 날도 있구나. 정말 오랜만에 기백을 가진 기특한 놈들을 보는구나.”
“크크… 기백만큼 검도 날카로우니까 몸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너희들이 그렇게 막으려고 하는 걸 보니 안에 마검이 있는 모양인데 난 그게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뭐가?”
“충분히 도망갈 시간이 있었을 텐데 왜 도망가지 않은 거냐. 그랬으면 다리 아프게 오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백사의 말을 들으니 입맛이 저절로 다셔진다.
결국 운호의 판단이 맞았다는 뜻이다.
천라지망을 깔아놓고 빠져나오기를 기다리다가 그들이 움직이지 않자 할 수 없이 이곳으로 왔다는 것이 백사의 말이었다.
운호, 이놈은 무공도 강한 놈이 점점 머리까지 좋아지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과연 얼마나 많은 자들이 온 걸까?
천검회가 바보가 아닌 이상 외곽의 포위를 모두 풀어버렸을 리 만무하니 아직도 눈에 보이는 포위망 밖에는 엄청난 적들이 기다린다고 봐야 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지금 상황이 꼭 그 짝이다.
상황은 점점 위험해지는 중이었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은 끔찍하도록 길어질 것 같았다.
시간을 끌 수만 있다면 어떡하든 끌 필요성이 있었다.
그랬기에 입을 열려 했을 때 불쑥 운여가 나섰다.
눈치 빠른 놈.
어느새 자신의 의중을 눈치채고 먼저 선수를 친다.
“천검회는 무림십강에 포함될 만큼 대단한 세력을 지닌 문파요. 그런 당신들이 우릴 이토록 괴롭히는 이유가 뭐요?”
“우리의 행사를 방해하는 자들은 모두 죽인다.”
“행사라니?”
“그걸 알지 못하는 걸 보니 마검이 많이 다친 모양이구나. 참으로 궁금하다. 보유한 신성들을 한꺼번에 저승으로 보내면 점창이 어찌 나올지. 정말 재밌을 것 같아.”
“몰라서 물은 게 아닌데 헛물을 켜는군. 마검은 생생하게 살아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
“거짓말하지 마라.”
“거짓인지 아닌지는 당신이 직접 들어가 보면 알 거 아니오.”
“크큭… 그렇지 않아도 곧 그럴 생각이다.”
“무림에는 항상 분란이 생겼고 그 분란 속에서 힘이 재편성되며 균형을 맞추었소.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조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과정일 뿐이었소. 하나, 당신들은 억지로 그런 질서를 무너뜨리려 하는구려. 역사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은 천리를 위반하는 짓이오. 절대 당신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오.”
“걱정하지 마라. 죽이고 죽이다 보면 우리 생각대로 될 테니까. 그러니 먼저 죽거든 저승에서 잘 지켜보거라.”
백사는 강호의 여우답게 더 이상 운여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의 자리를 교대하듯 구혈객이 앞으로 나서며 검을 빼들었다.
단순히 발검만 했을 뿐인데도 막강한 경기가 구름처럼 일어나 운상과 운여를 압박해 왔다.
그들의 경기는 어느 겨울날 갑자기 쏟아져 피할 곳조차 생각나지 않게 만드는 우박 비처럼 사방을 완벽하게 차단하며 다가왔다.
그들의 내기에 대항하듯 운상과 운여의 기세가 창처럼 일어선 것은 중앙에서 선 사내의 손이 하늘로 올라갔을 때였다.
압박해 온 기세를 밀어낸 운상과 운여는 양쪽에서 날아오른 혈객들의 공격을 맞받아치며 자리를 고수했다.
하나 몸은 흔들렸고 다리는 원래의 자리에서 한 치 정도 물러났다.
혼자서 둘을 상대하기가 버겁다는 뜻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혈객들 역시 합격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었다.
포위 공격의 최대 범위는 팔방이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을 공격하는데 여덟 명이 넘으면 나머지는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물론 차륜전을 펼치는 경우에는 다르겠지만 어떻든 한 번 공격에서 팔방을 넘어설 수 없다.
더군다나 좌우가 막힌 이런 지형에서는 아무리 많아 봐야 지금 혈객들이 공격한 것처럼 사방의 연수가 한계였다.
그랬기에 버겁지만 버틸 수는 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공격해 오던 혈객들은 완강하게 버티는 운상과 운여의 방어를 뚫지 못하자 곧장 차륜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번갈아 공격해 오는 그들의 검은 이인합격이었다가 어떨 때는 삼인합격으로 변화를 모색했다.
그것이 운상과 운여의 몸에 상처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둘은 버틸 수 있었으나 셋이 한꺼번에 공격해 오자 몸에서 피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혈객들은 화검제가 직접 키운 무인들답게 정확하고 냉철하게 운상과 운여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콰앙!
삼 인의 연수합격에 맞선 운여가 내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맞받아치자 동굴이 울릴 정도의 폭음이 생겨났다.
엄청난 격돌.
그 격돌의 여파로 힘겹게 버티던 운여가 기어코 뒤로 물러서며 피를 뿜어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고 손에 든 검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운여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며 손으로 입에 묻은 피를 훔쳤다.
혈객들의 합격이 시작된 지 반시진밖에 되지 않았지만 운상과 운여의 몸은 이미 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