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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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04화
난감함을 피하기 위한 대화는 충격이 되어 무령의 이성을 마비시켰기 때문에 치료를 끝내고도 한동안 그녀는 운호의 얼굴을 살폈다.
운호는 여전히 고통과 싸우느라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정신을 차리고 손길을 서둘렀다.
비록 충격에 의해 잠시 운호를 방치했지만 민망한 모습을 언제까지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운호의 바지를 입히고 옷매무새를 정리해 준 무령은 뒤로 물러나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채 입을 열었다.
그녀는 궁금한 걸 그냥 넘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지 않았을 테니 그대는 점창이 키운 비밀 병기인 모양이오.”
“나 같은 사람이 비밀 병기라면 점창에는 셀 수 없는 비밀 병기들이 있겠구려. 나는 사문에서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오.”
“지금 나를 놀리는 거요?”
“은인을 놀릴 수가 있겠소. 점창에는 청문, 청무 사숙을 비롯해서 청자배 사숙들이 모두 절대의 경지에 들어섰고 나의 사형들 중 차기 장문제자인 운풍 사형과 운곡 사형 등 많은 이들이 파천의 경지에 이르렀소. 나는 그들에 비해 그리 뛰어난 사람이 아니기에 하는 말이오.”
“음…….”
운호의 말을 들은 무령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거론된 청문과 청무자는 당당히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려놓은 무인들이었으니 그녀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다른 청자배 무인들이 절대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더군다나 운자배의 많은 무인들마저 그 수준에 도달했다면 점창은 진정으로 용담호혈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점창에 대한 정보는 한참 잘못되었다는 건데 만약 운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점창은 천하에 풍운을 몰고 올지도 몰랐다.
칠절문과의 전쟁에서 점창이 승리를 했음에도 천하는 점창의 힘을 그리 높게 보지 않았다.
칠절문 자체가 삼십팔세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하위권의 전력을 지녔었기에 강자들은 점창의 힘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운호의 말이 사실이라면 칠절문을 일방적으로 때려잡은 점창의 힘을 과소평가한 것은 자칫 엄청난 실수가 되어 터무니없는 결과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신음을 삼키며 궁금했던 것들을 계속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천이라는 조직을 쫓는 것은 점창의 행사요?”
“그건 아니오.”
“그럼 당신 혼자서 벌인 일이란 말이오?”
“그렇소. 이전에도 말한 것처럼 나는 탕마행을 위해 세상에 나왔을 뿐이오. 천이라는 조직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소.”
“그럼 앞으로 어쩔 생각이오?”
“나는 호남과 강서로 가서 지옥귀왕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확인할 것이오.”
“그럴 이유라도 있소?”
“그곳에 수라와 마창이 있으니 어찌 안 가겠소. 나는 마도의 삼마흉을 내 손으로 반드시 잡을 생각이오.”
“탕마행을 해서 점창과 마검의 명성을 드높이고 싶어 한다는 건 알겠소. 하지만 그러다가 천이란 조직과 문제가 생긴다면 위험해질 것이오. 천검회처럼 천문과 수라맹이 그들의 조정을 받는다면 아마 커다란 위험에 직면될 거요. 그들은 이미 패천일도를 보낼 만큼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분명 그리될 가능성이 크오.”
“알고 있소. 하지만 나는 마두들을 없애는 나의 본분을 결코 잊지 않을 생각이오. 위험하다고 피한다면 어찌 탕마행을 할 수 있겠소.”
“당신은 고집이 센 편이구려.”
“고집이 아니라 신념이라 해둡시다. 그나저나, 유령노조는 어찌 되었소?”
“그는 이제 세상 사람이 아니오.”
운호는 무령이 돌아온 후 한참 동안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워낙 커다란 상처를 입을 상태에서 무리하게 운기를 했기 때문에 그의 심신은 녹초가 된 상태였다.
그런 그를 무령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운호의 상태로 봤을 때 꽤 오랜 시간을 이 동굴에서 보내야 될 것 같았다.
워낙 은밀하게 숨겨진 천연 동굴이었기 때문에 적에게 들킬 염려는 적었지만 비상용으로 지니고 다니던 건량은 얼마 남지 않아 저녁이면 다 떨어질 것 같았다.
더군다나 중상을 입은 운호는 마른 건량을 먹을 수도 없는 상황이기에 그녀는 잠들어 있는 운호를 다시 한 번 바라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두고 자리를 비우는 것이 불안했지만 운호가 먹을 만한 음식도 구해야 했고 부탁받은 점창의 비표도 설치해야 하는 등 제법 할 일이 많았다.
그녀는 잠든 운호를 깨우지 않고 동굴을 빠져나갔다.
첩첩산중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시진만 나가면 인가가 나온다.
최대한 빨리 움직인다면 두세 시진 이내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란 게 그녀의 판단이었다.
운호의 잠은 그리 깊지 않았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힘들다 해도 그가 잠자는 시간은 두 시진을 넘기지 않는다.
무인들의 특징이다.
짧게 여러 번 나누어 수면을 취하는 것은 신체의 경각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호는 눈을 뜬 후 손과 발을 움직였다.
생각만큼 의지대로 쉽게 움직여지지는 않았지만 무리를 하면 충분히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랬기에 그는 다시 천룡무상신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땅을 딛고 일어설 만큼 회복이 되어야 한다.
운호는 금방 무아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뚫린 강간은 경계를 넘어 무한의 세계로 그를 이끌었다.
그의 몸에서 나온 금빛 오룡은 이제 완연한 실체가 되어 치명적이었던 상처를 어루만지고 달래며 춤을 추었다.
용들의 분산과 집중이 반복되면서 운호의 몸은 부양과 침전을 거듭했고 반시진이 넘도록 금광 속에서 유영을 했다.
영원 속에 잠든 것처럼 움직이지 않던 그의 눈이 떠진 것은 동굴을 통해 침입자가 나타났을 때였다.
“무령은 어디에 있소?”
“그는 잠시 나갔소.”
성큼 다가온 무상이 동굴 안을 면밀히 살핀 후 인상을 찡그렸다.
비표를 따라 온 동굴에는 그가 찾고 있던 무령은 보이지 않고 오직 운호만이 앉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눈에 운호의 상태를 알아본 그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무당의 비전으로 만든 신선고는 외상을 치료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데 특유의 냄새로 인해 사용한 사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신선고의 알싸한 냄새는 운호의 전신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에 무상은 운호의 상처 부위를 살폈다.
그런 후 자신도 모르게 억눌린 신음성을 흘려냈다.
가슴과 양쪽 팔에 붕대가 감겨 있고 허벅지와 대퇴부 쪽에도 커다란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였다.
무상은 신음을 끊고 슬그머니 이를 악물었다.
운호의 상태로 봤을 때 상처를 치료한 것은 무령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무령은 운호의 옷을 벗겼다는 얘기고, 보지 말아야 할 것도 봤다는 뜻이 된다.
무슨 생각으로 그리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나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신중했고 화가 난다고 해서 무작정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다.
“많이 다쳤구려.”
“그렇소. 패천일도를 맡느라 그리되었소.”
사람은 단순한 질문에서도 상대방의 감정과 앞으로의 일을 예측할 수 있다.
눈빛과 표정, 그리고 목소리가 그의 감정 상태를 충분히 알려주기 때문이었다.
운호는 무상의 행동에 본능적인 방어망을 가동하며 질문에 대답을 했다.
패천일도를 일부러 꺼낸 것은 무상의 분노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모를까 아직 회복이 덜 된 상태에서 무상의 공격을 받는다면 낭패를 당할 가능성이 컸다.
그랬기에 패천일도를 꺼내어 왜 자신이 부상당했는지 상기시켰다.
자신이 패천일도를 유인하지 않았다면 쌍악은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무엇 때문일까?
처음 만난 자리에서 검을 꺼낼 만큼 신경전을 벌였지만 그것은 젊은 혈기에서 비롯된 것일 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을 향해 회색 눈길을 던지고 있는 무상의 기운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정도로 위험했다.
무상의 기운은 변하지 않았다.
패천일도를 꺼냈음에도 그는 전혀 얼굴색을 바꾸지 않은 채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대의 상처가 크오. 냄새를 맡아 보니 무당의 비전으로 치료했구려. 누가 치료한 것이오?”
“대악께서 하셨소.”
“무령이 치료하는 걸 봤소?”
“처음에는 정신을 잃어 보지 못했지만 두 번째 치료할 때는 보았소.”
“두 눈으로 봤단 말이지… 결국 그렇게 되었군.”
무상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이가 드러났다.
낮게 깔린 음성에 담긴 것은 살기.
단박이라도 검을 꺼내어 운호를 칠 것 같은 시린 살기가 뭉텅거리며 그의 몸에서 새어 나왔다.
본능적인 방어망이 가동된 운호의 전신에서 비슷한 기운이 넘실거리며 옆에 두었던 검을 잡았다.
비록 몸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앉아서 당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운호의 목소리는 무상의 것만큼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이해가 안 가는구나. 너희들을 구하기 위해 부상까지 입은 나를 해하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강호에는 죽어야 할 이유가 수도 없이 많다. 너 역시 그중 하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그건 지옥에 가서 물어보거라.”
“크크… 무당이 자랑하는 천하의 태악검이 상처 입어 일어서지도 못하는 사람을 핍박할 정도라면 분명 커다란 이유가 있을 테지.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다.”
운호는 검을 의지한 채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처로 인해 움직임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운호는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 두 발로 굳건히 땅을 밟았다.
그 모습을 보는 무상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그의 얼굴에 들어 있는 것은 분노와 더불어 수많은 감정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강제로 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동생인 무령이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한 일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이토록 괴롭고 화가 나는 것은 동생에게 걸린 제약 때문이었다.
그녀는 운호로 인해 이제 상상하지도 못할 괴로운 시간들을 보내야 할지도 몰랐다.
잘못 없는 사람을 핍박한 일이 한 번도 없다.
더군다나 상처를 입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자를 향해 검을 뽑은 적은 더더군다나 없다.
밖으로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너무 괴롭고 힘든 일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 무당의 제자가 되어 정대함을 생명처럼 여기며 살아온 그가 이런 짓을 하리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기어코 검을 빼들었다.
동생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든 악마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태악검 무상이 빼든 검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검명은 시전자의 마음을 담는다고 했는데 검에서 나온 울음은 음울했고 슬픈 것이었다.
그리고 그 울음에는 시린 살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무상은 시간을 끌지 않고 일격에 운호를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검명과 함께 무상의 검에서 투명에 가까운 검기가 솟구쳐 나왔다.
검기는 대체적으로 내공의 특성에 따라 흰색이나 적색을 띄는데 무상의 검기는 흰색이었다.
문제는 그 흰색이 투명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절대검수에게서나 나타난다는 명기가 분명했다.
명기에 들어섰다는 것은 그의 무력이 소문보다 훨씬 무섭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그랬기에 운호는 지체 없이 흑룡검을 꺼내 들어 무상의 미간을 겨냥했다.
온몸에서 번져 나오는 고통이 숨쉬기조차 힘들게 만들었지만 운호는 무상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마, 너와 무당은 오늘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만약 여기서 내가 죽는다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점창은… 받은 만큼 반드시 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