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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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6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02화
표식을 따라 문단벌까지 도착한 운상과 운여는 엉망으로 변해 버린 주변을 확인하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주변 지형이 이토록 심하게 훼손되었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할 공전절후의 격전이 이곳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수색했으나 운호의 표식은 여기서 끊어져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이 나타내는 의미는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격전으로 운호가 다쳤거나 더 나쁜 결과가 벌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벌판에는 무수한 핏자국이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 있었지만 격전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그것을 만들어낸 주인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꺾인 수풀만 슬프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마음이 급해진 운상은 두 눈을 부릅떴다.
“운여야, 아무래도 운호가 다친 것 같다.”
“혼자 움직였을까?”
“주변이 온통 피투성이다. 혼자 움직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구나.”
“도대체 운호, 이놈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사람이 답답하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게 되고 얼굴이 붉어진다.
바로 운여가 그랬다.
운여는 소리를 지른 후 바로 옆에 징그럽게 펼쳐져 있는 핏자국을 발로 문질렀는데 그것이 운호의 몸에서 나온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설아가 뒤쪽에 서 있다가 나선 것은 운상과 운여가 아무런 결정을 못 내리고 한숨만 내쉬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얼굴은 걱정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고 목소리는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서둘러서 찾아봐요. 괜찮을… 괜찮을 거예요. 분명 오라버니는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예요!”
그녀의 외침이 운상과 운여를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그냥 넋을 잃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늦었다는 것도 알았고 찾지 못할 가능성도 컸다.
그럼에도 찾아야 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운호는 정신이 돌아오자 천천히 눈을 떴다.
컴컴한 어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칠흑 같은 어둠 속이다.
사위는 조용했고 어떠한 움직임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운호는 눈만 뜬 채 청각을 끌어올렸다.
전신에 당한 상처는 그를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산짐승이 온다 해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운호는 청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주변을 관찰해 나갔다.
부상을 입고 쓰러졌을 때 누군가에 의해 옮겨진 것까지 기억이 났다.
상처가 말끔히 치료되어 있는 걸 보니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구해준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불안한 고요만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눈을 뜬 채 한동안 있던 운호의 눈이 스르륵 감겨졌다.
다시 돌아올 가능성도 있었으나 상처만 치료하고 떠났을 가능성도 컸다.
그 예상이 맞다면 운호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서 적을 맞이해야 될지도 몰랐다.
눈을 감고 즉시 천룡무상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와공이 가능하다는 걸 확인한 이상 잠시도 지체할 일이 아니었다.
상처를 입으면 몸에 탁기가 쌓이게 되고 그 부상 정도가 심하게 되면 혈까지 막히는 경우가 생긴다.
단순히 몸에 탁기만 쌓여도 심법의 운영에 애를 먹게 되는데 운호처럼 네 군데의 주요 혈이 막힌 경우에는 수많은 고통과 난관을 극복해야 통기가 가능해진다.
이전에도 한 번 경험한 것처럼 와공에서는 거의 이 각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단전에 내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런 것을 본다면 와공은 좌공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느린 완공임이 틀림없었다.
단전에 모이기 시작한 내력은 한참이 흘렀지만 그리 크지 않았다.
상처로 인해 막힌 혈들이 내력의 단전 집중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이마에 땀이 솟기 시작했다.
단전에서 움직인 내력들이 천천히 이동하며 상처로 인해 쌓인 탁기들을 깎아내었고 막힌 혈들을 뚫어내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천룡무상심법의 요상 능력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대단했다.
고통을 단박에 장악하며 완화시키는 효능은 어떠한 심법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탁월했다.
더군다나 와공은 시작은 미약했으나 한번 운기가 일어나자 좌공보다 훨씬 무섭게 내력이 흐르게 만들었다.
모든 혈이 타통 되자 내력의 흐름은 점점 거세져 갔다.
미약했던 진기는 어느새 거대하게 변하며 전신 혈도를 누볐고 운호를 무아의 경지로 빠져들게 만들어 버렸다.
운호의 몸에서 서서히 빠져나온 다섯 마리의 금빛 용이 새까만 어둠을 뚫고 비상하기 시작했다.
몸에 갇혀 있던 것이 억울했던지 용들은 서로의 몸통을 어루만지고 교차하며 동굴 속을 마음껏 노닐었다.
흥에 겨운 움직임이었고 아름다운 비상이었다.
운호의 몸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용무가 시작된 지 거의 일 각이 지나면서부터였다.
거의 오 척이나 떠오른 운호의 몸은 용무에 맞추어 서서히 회전했는데, 이동되지는 않았고 축이 고정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맴돌 뿐이었다.
운호는 꿈을 꾸었다.
행복하고도 기쁜 꿈이었다.
사부님의 무릎에 앉아 옛날이야기를 듣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그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간절히 보고 싶었던 사부님의 얼굴엔 자애스러운 웃음과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었다.
“우리 운호 장하다. 나는 우리 운호가 잘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다.”
“제가 잘했나요?”
“그럼, 그렇고말고. 네가 이렇게 멋지게 성장해 줘서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쁘단다.”
“정말이죠?”
운호의 반문에 청곡자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에 들어 있는 것은 운호에 대한 사랑이었고 애뜻함이었다.
부드러운 그 손길에 운호는 사부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새삼 지나왔던 힘든 시간들이 떠올랐다.
얼마나 많은 눈물과, 얼마나 많은 고통 속에서 살아온 삶이었던가.
독종으로 불렸지만 독종은 아니었다.
밤이 되면 사부님이 그리워 울었고 자신의 신세가 불쌍하고 억울해서 도망칠 생각도 수없이 했다.
그럴 때마다 돌아가시면서 남긴 사부님의 유언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새 생명을 살게 해준 사부님의 부탁은 자신의 심장과 뼈 속에 깊이 박혀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집념을 만들어주었다.
그럼에도 사부님의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자 그동안의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눈물이 홍수가 되어 흘렀고 숨겨놨던 울음을 마음껏 터뜨렸다.
억눌러 왔던 감정의 찌꺼기가 눈물과 섞여 끝없이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사부님.
사부님이 원하시는 대로 점창의 별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는 무인이 될 테니 하늘에서나마 지켜봐 주십시오.
반드시… 반드시 그리하겠나이다.
운호의 몸이 회전을 멈춘 것은 자애로운 손길을 거두고 청곡자가 불현듯 운호의 꿈속에서 사라졌을 때였다.
다섯 마리의 용은 춤을 멈추고 오방을 장악한 채 운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이 긴장으로 흘러 넘쳤다.
회전이 멈춘 대신 운호의 몸이 진동을 시작했다.
마치 지진으로 인해 모든 사물이 떨리는 것처럼 확연한 진동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오 척에 머물렀던 운호의 몸이 일 장이나 솟구치며 정지했다가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용들이 하나로 뭉치며 한 마리의 거룡으로 변한 것은 운호의 몸이 바닥에 완전히 착지했을 때였다.
거룡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금빛 서기는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했다.
거룡은 누워 있는 운호를 마치 애무하듯 천천히 감싸더니 거짓말처럼 서서히 몸속으로 파고들었는데 운호의 눈이 떠진 것은 거룡이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운호는 눈을 뜬 후 천천히 자신의 몸을 관조해 나갔다.
완벽한 무아의 경지에서 벗어나자 이성과 감정이 돌아왔고 신체를 괴롭히는 고통도 느껴졌다.
꼼짝도 못 하던 팔다리가 움직인다.
아직 움직이면 끔찍한 고통이 뒤따랐지만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상처가 치료되고 있다는 뜻이다.
또 다른 것은 신체에 내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늘 충만해 있던 내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기 때문에 운호는 고통 속에서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천천히 천룡무상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무아의 경지에 빠져들었던 처음과는 다르게 자신의 몸을 철저히 관조하면서 내력을 단전으로 모았다.
그러자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던 내력들이 전신에서 쏟아져 나오며 단전을 채우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 하마터면 심법을 멈출 뻔했으나 운호는 정신을 수습하고 내력을 주요 혈로 돌렸다.
천주와 풍부혈을 거쳐 옥침과 뇌호혈을 지난 내력이 노도처럼 흘러 강간으로 곧장 진격해 나갔다.
운호는 마음을 다잡았다.
강간에 도달된 내력은 언제나 광폭하게 부딪친 후에야 되돌아 나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충격이 발생되지 않았다.
철벽처럼 가로막고 있던 강간혈의 한쪽이 열려 내력이 통과하고 있었다.
놀라움의 연속.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강간이 깨졌음이 분명했다.
비록 완벽하게 깨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동안 지속해서 발생되었던 균열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깨져 나가 구멍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구멍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뇌호혈을 통과해서 밀려든 내력이 미친 듯 날뛰기 시작했다.
작은 구멍이 한꺼번에 밀려든 물로 인해 막힌 것과 다름없는 현상이다.
고통은 생기지 않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운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무슨 경로로 어떻게 강간에 구멍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으나 여기서 운기를 멈추면 내력이 역류하면서 주화입마에 빠질 가능성이 너무나 농후했다.
그랬기에 운호는 이를 악물었다.
구멍이 생긴 이유는 그동안 계속해서 강간혈을 자극하면서 미세한 균열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생긴 현상이니 놀라기도 했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흥분을 느꼈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기회가 온 이상 완벽하게 강간혈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 되기 시작했다.
무리한 운공.
노도와 같이 밀려든 내력을 작은 구멍으로 밀어 넣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는 운호의 몸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중으로 부양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균열이 나 있던 강간의 구멍이 점점 확장되면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그러던 한순간.
기어코 강간이 깨져 나가면서 대기하고 있던 내력들이 한꺼번에 강간혈을 통과해서 움직였다.
강간혈을 통과한 내력은 끝없이 유영하며 한없이 흘러갔다.
풍부혈이 강이었고, 뇌호혈이 바다였다면 강간혈은 끝없는 우주다.
어느새 운호의 몸에서 생성된 다섯 마리 용은 완벽한 생명을 얻은 것처럼 공간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적안.
그동안 운호의 몸에서 나온 오룡은 눈이 없었다.
운기를 할 때마다 나타나 용무를 추었지만 눈이 없으니 허상처럼 보였고 생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강간혈이 깨지면서 생성된 오룡은 적안을 가진 채 허공을 날았다.
용의 그림에 눈을 그려 넣는 것을 화룡점정이라고 했는데 운호의 몸에서 나온 금룡들은 불타는 적안으로 세상을 향해 포효하고 있었다.
만천자의 오룡봉성(五龍奉聖)이 백 년의 시공을 넘어 운호의 몸에서 드디어 재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