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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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99화
운호는 흑룡검을 빼어든 채 무상의 검이 뽑히기를 기다렸다.
가슴이 뻑뻑해졌다.
강적과의 대결은 가벼운 흥분과 긴장감을 준다.
기다리는 운호를 향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무상의 검이 뽑혀 나왔다.
뽑히는 것과 동시에 발현된 그의 기세로 인해 공간이 응축되며 파동이 생겨났다.
역시 대단한 자다.
하지만 운호는 입꼬리를 끌어올린 후 지체 없이 무상의 미간을 겨냥했다.
“무당이 자랑한다는 태악검의 실력을 보겠다.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걱정하지 말고 덤벼.”
한 치의 양보도 없다.
누구 하나 물러설 기색이 없으니 이제 싸움만 남았다.
상황이 변한 것은 두 사람이 첨예한 대립을 넘어 격돌을 시작하려 할 때였다.
무령이 장내로 뛰어들었고 그 뒤를 이십여 명의 무인이 따랐다.
무상은 무령의 상태를 확인하자 곧장 날아올라 천지양단으로 무령을 공격하는 도객의 칼을 대신 맞아들였다.
콰앙…!
무상의 일격에 도객이 뒤로 튕겨 나가자 장내로 들어온 자들이 속속들이 자리를 차지하며 포위망을 구축했다.
튕겨 나간 적포 도객은 어느새 흩어진 중심을 바로한 채 무상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강력한 반격을 당하고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슬금슬금 피어나는 전율.
무령은 왼팔과 다리에 일격을 맞은 채 연신 피를 흘리고 있었다.
무당의 미래라는 대악검 무령이 이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적들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알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운호는 눈을 오므린 채 나타난 자들을 훑어보았다.
대충 봐도 이십에 달하는 적 중 만만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
무상이 무령의 상처를 돌보는 동안 전면에 나선 것은 운호였다.
감정으로 인해 검을 빼들었으나 지금 이런 상황에서까지 감정을 내세운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당신은 누구요?”
“자네가 마검이군. 쌍악을 잡으려 했는데 마검까지 있구나. 내가 오늘 운이 좋은 모양이다.”
운호가 바라본 것도 질문에 대답한 것 역시 황금 전포를 입은 노인이었다.
그는 적포 도객들의 선두에 서 있었는데 무당이 자랑한다는 쌍악과 황수의 풍운아 마검을 눈앞에 두고도 긴장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운호는 노인이 엉뚱한 대답을 하자 입술을 깨물었다.
왼손에 들린 검은 빛깔 묵룡도가 그의 정체를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무림백대고수의 일인인 패천일도 성사일.
눈앞의 노인은 천검회가 자랑하는 극강의 전투부대 투룡전의 수장임이 분명했다.
상대가 성사일임을 알게 되자 운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성사일의 뒤에 서 있는 자들의 정체도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투룡전의 비밀 병기 광룡십팔도.
성사일이 이십 년 동안 전력을 다해 키웠다는 제자들이다.
운호는 그때서야 무령이 당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패천일도만 가지고도 힘든 마당에 광룡십팔도까지 가세했으니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봐야 했다.
운호는 여유 있게 자신과 쌍악을 바라보는 성사일의 시선에서 현 상황의 발생 원인을 찾기 위해 맹렬하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성사일의 목표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은 쌍악의 행동 역시 자신처럼 노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천검회의 암계는 도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그들의 정보력은 중원 최고의 수준이라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패천일도는 상성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모양이오.”
“말하기 좋은 자들이 떠들어서 생긴 오해일 뿐이다. 버젓이 살아 있는데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단 말이냐. 상성에서 오래 머물다 보니 생긴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려.”
“너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고.”
“마검의 배짱이 대단하다고 하더니 제법이구나.”
“천검회가 뒤에서 하는 일이 많은 모양이오. 패천일도를 변명하게 만들면서까지 나오게 했으니 말이오.”
“무엇을 하는가가 다를 뿐, 모든 문파가 뭔가를 한다. 너희 점창도 탕마행을 하지 않더냐.”
“우리 점창은 협을 시행할 뿐 지독한 냄새가 나는 짓은 하지 않소.”
“왜 우리가 하는 일이 냄새나는 일이라고 단정 짓느냐?”
“마두들을 끌어들여 음모를 꾸미고 있느니 그렇게 볼 수밖에.”
“쓸모없는 자들을 저승으로 보낸 일이었다. 과정이 달랐을 뿐 너희 점창처럼 놈들을 세상에서 지웠으니 결과는 같은데 뭐가 잘못되었다는 거냐?”
“궤변을 늘어놓는군. 당신이 말한 대로라면 그렇게 한 목적도 말해줄 수 있겠지. 그럴 수 있겠소?”
“가소로운 격장지계로다.”
“말하지도 못하는 일을 하는 자들은 대체적으로 얼굴이 두꺼운 편이지. 이제 보니 당신의 얼굴도 꽤 두꺼운 편인 것 같소.”
“푸하하… 정말 재미있는 놈이군. 하지만 거기까지. 더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차피 죽을 텐데.”
“날 우습게 본 모양이군.”
“네가 태강에서 한 짓은 들었다. 하지만 오늘 여기서 너는 죽는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내 목숨은 내가 결정하니까.”
운호가 오연하게 턱을 치켜든 채 노려보자 성사일이 풀썩 웃었다.
가소로운 짓이다.
비록 태강에서 운호가 천검회의 정예들을 도륙했다고는 하나 자신이 없어도 광룡십팔도만 있다면 운호와 쌍악을 모두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광룡십팔도의 무력은 대단했다.
그들 개인의 무력은 혈패나 혈룡보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투룡전의 비밀 병기로 손색이 없는 무인들이었다.
더군다나 광룡십팔도가 익힌 용혈무궁진은 가히 무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엄청난 진법의 정화였다.
아무리 쌍악과 마검이 절대의 경지에 들어설 정도의 무인이라도 해도 진에 갇히게 되면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랬기에 성사일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려 운호와 쌍악을 가리켰다.
놈들의 무력과 경륜이 얼마나 될지 모르나 여기서 반드시 죽인다.
여기서 저들을 놓치게 된다면 또다시 의형인 화검제는 혀를 찰 것이다.
요즘 들어 중요한 일들이 너무 많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는 중이었다.
운이 좋아 마검까지 만났으니 이번 기회에 한꺼번에 저승으로 보내지 못하면 귀찮은 일을 스스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게 된다.
운호는 흘긋 시선을 돌려 빠르게 무령의 상태를 확인한 후 다시 성사일과 눈을 마주쳤다.
무령은 두 군데에 상처를 입었으나 큰 부상은 아니었던지 무상과 함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빠른 판단만이 목숨을 살릴 수 있다.
패천일도를 자신이 맡는다면 쌍악이 광룡십팔도를 감당해야 되는데 그들의 무력으로 가능할 것인지 판단이 애매했다.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패천일도 성사일의 무림 서열은 팔십 위였지만 절대고수 간의 순위는 커다란 의미가 없었으니 이번 싸움에서 이긴다는 확신은 만용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것은 적들이 과연 이들뿐이냐는 것이었다.
근방에는 유령노조와 함께했던 백여 명의 흑객들도 있었다.
언제 어디서 더 강하고 더 많은 적들이 나타날지 알 수 없으니 이번 싸움은 득보다 실이 훨씬 많았다.
그랬기에 운호는 쌍악을 바라보았다.
운상과 운여였다면 시선을 마주칠 필요도 없었겠지만 쌍악은 자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운호의 눈을 한참 바라본 후에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호가 움직인 것은 그들의 고갯짓을 확인한 후였다.
그들의 고갯짓에서 자신의 뜻이 전달되었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운호는 발검과 함께 순식간에 연속으로 십이 검을 성사일의 전신에 퍼부었다.
작정을 한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전력을 다한 운호의 검은 황룡이 되어 성사일을 향해 폭사되었는데 너무 막강한 위력으로 인해 주변의 나무들이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성사일은 운호가 검을 빼자마자 부운도강 신법으로 뒤로 순식간에 물러나며 자신의 묵룡도를 꺼내 들고 마찬가지로 십이 도를 찔러냈다.
그의 칼에서는 신비한 기운을 품은 검은 도기가 죽죽 뻗어 나와 운호의 검기와 충돌했는데 마치 공간에서 화살이 날아가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콰앙… 쾅… 콰쾅!
검기와 도기가 만나면서 엄청난 폭발음이 생겼다.
그와 동시에 운호의 몸이 늘어나듯 뒤로 밀리며 거대한 나무를 타고 숲 속을 향해 날아갔다.
운호가 펼친 것은 공격 초식이 아니라 사일검법의 유일한 방어 초식인 비화(飛花)였다.
도주를 하기 위해 대단한 위력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는 허초를 펼쳤다는 뜻이다.
“어리석은 짓!”
운호가 순식간에 나무를 타 넘어 시야에서 사라지자 뒤쪽으로 물러섰던 패천일도의 신형이 번쩍거리며 공간 사이를 이동했다.
그의 신법은 특이하게 중간중간 모습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속도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큼 빨랐다.
운호는 유운신법을 펼쳐 전력을 다해 산의 동북방을 가로지르며 움직였다.
그가 뒤쪽으로 몸을 튕길 때 쌍악도 자신과 반대쪽으로 사라지는 걸 확인했기 때문에 마음은 그나마 홀가분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거대한 기운이 압박감을 주고 있었으나 운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면만 바라본 채 달렸다.
패천일도 성사일.
벌써 이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절대고수로 자리 잡은 채 무림의 별이 된 무인이었다.
그럼에도 두렵지는 않았다.
자신의 몸에서 금룡이 꿈틀거린 이후로 누구에게도 진다는 생각을 가져 보지 않았다.
일정한 속도로 두 사람은 끊임없이 달렸다.
산과 산을 넘었고 강과 개천을 건너며 그들은 한 시진이 넘도록 거의 백오십 리를 이동했다.
그러던 그들이 신형을 멈춘 것은 사방이 환하게 트인 이름 모를 구릉지였다.
구릉지를 중앙에 두고 갈대숲이 자리했는데 구릉지에서 봤을 때는 마치 사방에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앞에서 달리던 운호는 믿을 수 없는 각도로 공중에서 회전하며 신형을 멈추었고 뒤를 따르던 패천일도 역시 어렵지 않게 몸을 가라앉혔다.
“따라오느라 수고했소.”
“일부러 그랬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당신 같은 사람과 싸우면서 다른 자들의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소.”
“그럴 수도 있겠다.”
“이제 방해할 사람이 없는 것 같소. 여기는 참으로 아름답구려. 이곳에서 점창의 마검이 패천일도의 칼을 받아볼까 하오.”
“네 말대로 참 아름다운 곳이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죽게 되었으니 원망은 덜하겠구나.”
성사일이 자신의 묵룡도를 꺼낸 후 사방에 깔린 갈대숲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가 천천히 운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여유로웠고 여전히 묵직했다.
그러나 그런 여유로움은 그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흑룡검을 빼든 운호는 싱그러운 웃음을 흘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지옥귀왕을 죽인 게 바로 나요.”
“뭐라, 정말이냐!”
“놀란 모양이구려. 하지만 사실이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기도 하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소.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아쉬웠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그는 자신의 죄 값을 스스로 치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구려. 무인으로서 전력을 다하지 못하고 죽어간 그가 너무 불쌍해서 나는 한동안 불편함을 떨치느라 힘이 들었소. 그대는… 절대 그러지 마시오. 나는 더 이상 그런 불편함을 갖고 싶지 않으니.”
“가소로운 놈이로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궁금했기에 조용히 듣고 있던 성사일의 얼굴이 급하게 일그러졌다.
분노로 인해 생겨난 화기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공기가 급격히 응축되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그의 기세는 가공 그 자체였다.
운호의 말은 최선을 다해 싸우라는 뜻이었다.
성사일은 수많은 격전을 통해 셀 수 없는 자들의 목숨을 거두면서 강호의 전설이 되었고 사신으로 불렸다.
그런 자신을 향해 도발해 온 자.
황수의 풍운아로 불리는 점창의 마검.
상성에 파묻혀 나오지 않았지만 마검에 대한 소문은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다.
그럼에도 그저 빙긋 웃고 말았다.
무림의 신성은 말 그대로 떠오르는 별이라는 뜻에 불과하다.
아무리 뛰어난 무력을 지녔다 해도 강호라는 무서운 세계는 신성들이 활개치고 놀 만큼 만만한 판이 아니다.
젊고 새롭다는 것이 전부일 뿐 신성이라 불리는 자치고 기존의 강자를 꺾은 자는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실질적으로 현 무림의 전설로 꼽히는 백대고수 중 나이가 사십에 모자라는 자는 아무도 없다.
강호의 경륜과 경험. 전투의 관록은 지닌 무력이 비슷하다 해도 압도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그는 마검의 소문이 천지를 들썩였어도 가소롭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늘 마검은 천하를 질주한 한 자루 검은 칼.
바로 이 묵룡도에 의해 세상에서 지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