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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98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5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풍운사일 98화

무령이 전도복 뒤에 매어 놓은 태청검을 꺼내 들며 엄포를 놓자 운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언제 봤다고 협박을…

생각 같아서는 한마디 해주고 싶었으나 계집처럼 생긴 놈과 말싸움하기 싫어서 입을 꾹 닫았다.

가볍게 무령을 노려보던 운호가 신경질적으로 먼저 신형을 날려 전각으로 넘어 들어갔다. 그러자 그에 뒤질세라 무령의 날렵한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움직여 담장을 훌쩍 건넜다.

운호와 대면하면서부터 무령은 조금이라도 손해 볼 생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빠르면서 가볍다.

그리고 현기가 느껴질 정도로 신묘한 보법.

무당이 자랑하는 연청십팔비(燕靑十八飛)가 분명했다.

 

전각으로 들어서자 경계를 서던 자들이 고함을 치며 몰려들었다.

운호와 무령은 담장을 넘었지만 몸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경계병들의 이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흑객들은 일류 수준의 검객들이었기 때문에 완벽한 포위망을 구축하는 데 걸린 시간은 눈 몇 번 깜짝할 사이에 불과했다.

포위망이 완성되고 계속해서 병력이 늘어난 후에야 뇌호당에서 봤던 유령마조와 붉은 입술을 가진 음풍수사가 전위로 나섰다.

그들은 무령의 전도복을 확인하고 인상을 긁으며 이를 갈았다.

특히 유령마조는 무령을 아래위로 훑어본 후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무당이구나. 대악검이냐?”

“나를 아는 걸 보니 아직 눈은 멀지 않은 모양이야. 내 정체를 알았으니 온 이유도 알겠지?”

“알지,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유령마조는 옆에 서 있던 음풍수사와 눈짓으로 의사를 교환한 후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들이 있던 자리를 흑객들이 채웠는데 그 숫자는 백에 달했다.

흑객들은 유령마조와는 다르게 무령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운호는 자신에게 할당된 음풍수사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뒤쪽으로 빠져나가자 인상을 긁었다.

놈은 자신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어쩌시겠소?”

“뭘 말이오?”

“이자들에게 묶이면 저놈들을 놓치게 될 거요. 아무래도 나쁜 짓을 많이 한 놈이라 그런지 눈치가 빠른 것 같소.”

“음…….”

“당신이 여기서 저들을 막아주면 내가 가서 두 놈을 잡겠소. 그래주시겠소?”

“그렇게는 못 하오. 대신 마검이 여길 맡아주시오. 저놈들을 잡는 건 내가 하리다.”

“꼭 그래야겠소?”

“제마행을 나왔는데 이름이 난 마두는 하나도 잡지 못했소. 그대는 혈번을 비롯해서 귀왕까지 잡았으니 이번에는 나에게 양보해 주시오.”

무령의 눈빛에 의지가 담겨 나왔다.

안 된다고 거부해도 반드시 그렇게 할 태세다.

사내의 눈빛이 여인처럼 앙칼져서 반박하기 어렵게 만들었기에 운호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좋소. 내가 양보하지. 저놈들이 도망가는군. 빨리 가보시오.”

“고맙소.”

흑객들이 덮친 것과 무령이 몸을 날린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미 유령마조와 음풍수사는 결정을 내린 후 귀신같이 전각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운호는 후방을 향해 신형을 물리며 공격해 온 흑객들의 첨두를 격파했다.

흑객의 인원은 백에 가깝다.

여기서 끝장을 보겠다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나 운호는 천천히 물러나며 흑객들의 포위망을 뚫었다.

그의 목적은 유령마조와 음풍수사였지 흑객들이 아니었다.

물론 암계를 가지고 움직이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몇을 붙잡아 그 배후를 캐고 싶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흑객들을 모두 격파해야 한다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이들은 유령마조와 음풍수사에 배정되어 단순하게 기습이나 하던 자들이었다.

다시 말해 고급 정보를 알고 있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백에 달하는 목숨.

공연한 생목숨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확실한 적으로 만난 것도 아니고 자신이 추적해서 부딪친 자들일 뿐이다.

이들이 철혈문을 공격했다고 해서 자신이 적으로 삼을 이유가 없었다.

암계에 대한 궁금증은 있었으나 모두 죽인다는 것은 분명 꺼려지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운호는 흑객들의 일각을 부수며 포위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기만 했다.

그대로 후퇴할 수도 있었으나 무령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시간을 끌었다.

무령은 자신이 흑객들을 상대해 줄 거란 약속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말 없이 후퇴했다가는 그를 위험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었다.

운호는 흑객들의 공격을 막으며 무령을 찾았다.

지붕 위에서 한동안 벌어지던 세 사람의 싸움은 유령노조가 지붕에서 떨어져 내려와 좌측 담장을 타 넘고 도주하면서부터 추격전으로 변했다.

무령은 도주하는 유령노조를 추적했는데 반대쪽으로 도주하는 음풍수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애초부터 그가 잡겠다던 자는 유령노조였기 때문이었을까?

상황의 변화를 눈여겨보던 운호의 검이 무시무시한 파괴력으로 전면과 측면에서 날아온 흑객들을 튕겨낸 후 곧장 음풍수사가 달아난 쪽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어차피 흑객들을 다 죽이고자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운호는 조금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전각의 지붕을 박찬 후 우측 담장을 뛰어넘었다.

급하다.

고수에게 한 호흡은 생사를 결정짓는 중요하고도 긴박한 시간이다.

음풍수사가 우측 담장을 넘은 것은 열 번의 호흡이 지난 후였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시간이 더 지체된다면 놈의 행적을 추적하기 어려워진다.

 

흑객들이 따라붙는 걸 어렵지 않게 따돌린 운호는 청각을 집중시키며 유운신법을 펼쳤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음풍수사는 시야에서 사라져 정신을 집중시키도록 만들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간 운호가 눈을 감고 기파를 쏘아 보냈다.

반발이 없다면 놓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운호가 쏘아낸 기파에 반응하는 미세한 기운이 좌방 십이 장 너머에서 슬금슬금 흘러나왔다.

확인할 필요도 없이 음풍수사다.

반응 된 기운은 음습했고 사이했기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 반대쪽에서 막강한 기파가 몰려와 운호의 기파와 충돌했다.

전혀 예상 밖의 상황으로 인해 운호가 주춤할 때 새롭게 나타난 자는 먹이를 찾은 독수리처럼 음풍수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막을 새도 없을 만큼의 속도.

더군다나 음풍수사를 덮친 기운은 현묘했고 강력해서 벼락이 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기가 막혀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무령이 나타나서 자신의 행사를 방해하더니 이젠 엉뚱한 자가 나타나 다 잡은 먹이를 가로채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쾌감은 생기지 않았다.

나타난 자의 무력이 운호의 호기심을 유발할 만큼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회색 전도복에 그려진 칠성. 무령과 같은 무당의 무인이다.

늠름한 기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도적인 검파는 무령이 펼친 정교함과 달리 산악처럼 장중했고 육 척이 넘는 키와 근육으로 뭉쳐진 몸은 사나이의 기백을 고스란히 나타내고 있었다.

태악검 무상임이 분명하다.

언제나 붙어 다닌다고 들었는데 무령이 혼자 나타난 것을 의심조차 하지 못했으니 자신은 강호의 늑대가 되려면 아직 멀어도 한참이나 멀었다.

 

음풍수사는 무상의 검에 의해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휘청거리다가 불과 일 각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를 압박한 검은 마치 자석처럼 떨어지지 않은 채 따라다니다가 어느 순간 불쑥 사혈을 제압해 버렸는데 얼마나 신묘한지 검이 수십 개로 보일 지경이었다.

무당의 태극혜검이 분명했다.

무당을 세운 장삼봉 조사가 말년에 면벽 수련을 통해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절세의 검법.

그 오의가 너무 심오해서 깨달음이 선행되지 않으면 익히지 못한다는 검법이었고 적전의 제자들만 접할 수 있는 무당의 비학이었다.

검을 집어넣는 무상을 향해 다가서는 운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무당의 제자들은 광명정대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두 번이나 새치기를 당하자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태악검이시오?”

“그렇소.”

“내가 저자를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왜 그랬소?”

“천하의 악적을 잡는 일인데 누가 잡으면 어떻소. 그대는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구려.”

“내가 너무 예민하다고?”

운호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무령과 똑같은 상황이었지만 이번에는 참지 않고 음성이 커졌다.

왠지 여인처럼 왜소했던 무령과는 말싸움을 하기 싫었으나 눈앞의 무상은 달랐다.

굵은 음성, 그리고 근육으로 뭉쳐진 몸매.

사내다운 행동과 거침없는 말투가 눈에 거슬린다.

이유는 단 하나.

무상이 자신과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데서 오는 호승심이 분명했다.

무당이 자랑하는 차세대 제일검은 바로 태악검이었다.

태악과 대악을 합쳐 부르며 쌍악이라 부르고 있었으나 무당 사람뿐만 아니라 천하인들도 태악을 다음 세대의 장문인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사나이다운 기상이 대악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상은 운호가 슬쩍 음성을 높이자 빙그레 웃음을 흘렸다.

“천하의 마검이 그깟 일로 화를 내다니 믿을 수 없구려.”

“강호에서 벌어지는 행사에서 목숨이 걸리지 않은 일이 어디 있을까. 당신은 세 치 혀로 이번 일을 그까짓 일로 만들고 있군. 이해하지 못할 일이오.”

“이해하지 못한다면?”

뚝뚝 끊어지는 말투로 운호가 대답하자 무상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그 역시 운호를 보면서 내면에서 호승심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운호의 얼굴은 그보다 훨씬 더 했다.

“무인이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했을 때 하는 행동은 언제나 한 가지뿐이지.”

“검을 뽑겠다는 뜻이오?”

“원한다면.”

“마치 내가 원한 것으로 몰아가는군.”

“잘못해 놓고 사과를 하지 않으니 당연히 원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그것이 과연 내 착각일까?”

“참고 있으니 점점 무례해지는구나. 무당의 태악은 누군가에게 쉽사리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검을 뽑고 싶으냐! 원한다면 상대해 주마.”

감정이 격해지면서 무상의 말투가 바뀌었다.

사내로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절대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는 운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자신의 검을 슬쩍 끌어올리며 도발했다.

그의 몸에서 뭉클거리며 쏟아져 나오는 현천지기가 퍼져 나가자 공간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처럼 팽팽하게 팽창되었다.

과연 태악검이다.

그러나 운호는 그런 태악검의 도발을 기다린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무례했단 말이지?”

“사람들은 네가 한 행동을 보고 무례하다고 말한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고.”

“남의 물건을 가로챈 자는 뭐라고 하더냐?”

“나는 남의 물건을 가로챈 적이 없다.”

“이자가 정말… 열 받게 만드는군.”

무상의 대답에 운호가 이빨을 드러냈다.

이제는 호승심을 넘어섰다.

자존심이 달려 있으니 물러서고 싶어도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무상 역시 물러날 생각이 없었던지 하얀 웃음을 얼굴에 떠올린 채 말을 끊어 뱉었다.

그의 말은 느렸지만 독했다.

“웃기는 놈이군. 어이, 마검. 황수인가 어디서 조금 명성을 얻었다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인데 죽기 싫으면 이쯤에서 꺼져. 점창의 체면을 봐서 한 번은 봐줄 테니까.”

운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한 것은 무상의 마지막 말 때문이다.

자신을 욕보이는 것도 겨우 참고 있었는데 무상이 사문까지 들먹거리자 운호는 즉각 검을 빼들었다.

그의 눈은 이미 불꽃처럼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가소로운 놈. 감히 점창을 들먹이다니… 와라, 내가 왜 마검인지 알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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