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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97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5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풍운사일 97화

오십여 명의 흑객이 뇌호당이 머무는 전각에 나타난 것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을 때였다.

담장을 뛰어넘어 급습하는 그들의 신형은 마치 그림자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은밀했다.

그들이 들어가고 나서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전각 쪽에서 비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일방적인 싸움이 아니란 건 비명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뇌호당 측에서도 기습을 대비하고 있었던지 전각 쪽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운호는 천천히 일어나 전각을 향해 움직였다.

전각까지의 거리는 오십 장. 불과 숨 몇 번 들이켤 시간이면 접근하기에 충분한 거리였다.

그러나 운호는 싸움판에 가담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이곳을 공격하는 자는 유령마조다.

그는 끝장을 보는 공격이 아니라 기습 후 일정한 피해를 주면 미련 없이 사라졌다.

지금 움직이면 그를 잡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나 그리되면 어디에 있을지 모를 음풍노사를 잡기 위해 또 어려운 발걸음을 해야 한다.

운호는 동시에 둘을 모두 잡고 싶었다.

후퇴하는 유령마조를 따라가면 음풍노사도 같이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은밀하게 몸을 감춘 채 유령노조가 후퇴하기를 기다렸다.

 

흠칫!

유령마조가 빠져나오길 기다리던 운호는 이십여 장 밖에서 그를 노려보는 기운을 확인하고 슬그머니 침을 삼켰다.

적대의 기운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세였기에 운호는 어깨를 끌어올려 가볍게 고개를 좌에서 우로 돌렸다.

엄청난 압박감이다.

만약 그 압박감이 살기였다면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야 될 만큼 대단한 기운이었다.

당장 날아가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운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살기를 보이지 않는다는 건 최소한 적이 아니란 뜻이기 때문이었다.

약 반각이 더 흐르자 장원으로 침입했던 흑객들이 비조처럼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자는 흑객들과 비슷한 복장이었으나 요대의 색깔이 달랐고 머리에 옥건을 쓰고 있어 구분하기가 쉬웠다.

흑객들을 이끄는 유령마조가 분명했다.

공격에 가담했던 흑객들은 그 숫자가 줄어 서른이 조금 넘었는데 뇌호당도 타격을 입었는지 추격할 엄두를 못 내는 것 같았다.

아직 본단에서 고수들을 지원받지 못한 뇌호당은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었다. 공격을 받고도 추적하지 못할 정도라면 전력 손실이 생각보다 많다는 뜻이다.

신법을 펼쳐 움직이는 흑객들을 은밀히 쫓으며 운호는 신비인의 기척을 계속해서 살폈다.

예상대로 그는 자신처럼 흑객들을 따르고 있었다.

입맛이 썼다.

하는 행동으로 봤을 때 그의 목표도 유령마조를 포함한 흑객들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밥그릇에 누군가 젓가락을 내민 기분이다.

 

유령마조가 신형을 세운 곳은 천평 시가지에서 동북쪽으로 오십 리 정도 떨어진 낡은 장원이었다.

그들은 마치 집에 돌아온 것처럼 스스럼없이 장원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먼저 있던 사람들이 나와서 그들을 맞아주고 있었다.

음풍노사가 이끄는 부대가 틀림없었다.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운호의 얼굴에서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사람은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기분이 좋아지게 마련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들어가고 싶었으나 운호는 좌방으로 이십 장 정도 떨어진 관제묘의 측면을 노려봤다.

먼저 해결을 해야 될 일이 있다.

비록 신비인의 정체가 적이 아니라 해도 명확하게 선을 그어놓는 것이 필요했다.

천천히 걸어 그가 숨은 곳을 향해 다가갔다.

신비인은 운호가 접근해 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지 기파를 쏘아서 걸어오는 걸 방해했다.

하지만 운호는 그 기세를 무시하고 오 장 앞까지 다가서서 여유 있게 입을 열었다.

“얼굴이나 봅시다. 나오시오.”

“쯧쯧… 마검이 이리 급한 성격을 가졌는지 몰랐소.”

“난 성격이 지랄 맞아서 정체불명의 사람과 같이 행동하면 두드러기가 나오. 그러니 순순히 나오는 게 좋을 것이오!”

“할 수 없구려. 정 그렇다면 나가리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나의 인형이 어둠 속에서 일어나 운호 쪽으로 걸어 나왔다.

회색의 전도복. 그리고 옷깃에 수놓아진 칠성.

무당이다.

운호는 나타난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무당 사람을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막상 정체를 알고 나자 마음의 찜찜함이 더욱 커졌다.

자신은 점창의 상징인 흑색 전도복을 벗고 일반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눈앞에 있는 자는 버젓이 무당의 전통 무복을 입고 있어 그러한 마음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숨기지 않겠다는 자신감.

무당이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가 아무리 크다 해도 뛰어난 무력을 지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하면서 전도복을 입지 못한다.

더군다나 나타난 자의 나이는 아무리 많게 잡아도 서른이 채 되지 않았다.

“무당 분이셨구려. 나를 알고 계시던데 그대의 명호가 어찌 되오?”

운호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무당이 신주십강에 들 만큼 강력한 문파라 해도 서른이 안 된 나이에 운호를 압박할 정도의 무력을 가진 이는 오직 둘뿐이었다.

太嶽(태악), 大嶽(대악).

무당이 차세대의 주역으로 키우고 있는 무인들로 이미 절대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눈앞에 나타난 자의 특징으로 봤을 때 정체가 짐작이 갔다.

얼굴은 남자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갸름했고 전신에 근육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른 몸매였다.

문제는 그의 외모였다.

얼마나 잘생겼는지 여인이라고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사내였다.

이런 사내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대악검 무령이오. 만나서 반갑소.”

“그럴 것이라 생각했소. 무당이 자랑하는 대악검의 위명은 귀가 따갑게 들었소. 그런 분을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정말 뜻밖이오.”

“마검의 위명에 비하겠소. 부끄러운 과찬이시오.”

“자, 이 정도 인사했으니 된 것 같고. 시간이 없으니 우리 정리부터 합시다. 그대가 여기 온 이유는 뭐요?”

“유령마조와 음풍수사를 잡기 위함이오.”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하는 무령의 뻔뻔함에 운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치 주머니 속의 제 물건을 꺼내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잡기 위해 오랫동안 추적해 온 자들이오. 그리고 이제 다 잡아놓은 판에 젓가락질을 하시겠다?”

“나는 마검이 어제까지 황평에 있었던 걸로 아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모양이구려. 어제 황평에서 지옥귀왕을 잡은 자는 다른 사람인가 보지요? 오랫동안 추적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얼마나 추적한 거요. 나는 저자들을 잡기 위해 칠 일이나 따라다녔소만.”

“험험, 내가 어제 황평에 있었던 것은 맞소. 하지만 내가 저들을 오랫동안 추적했다는 말은 사실이오. 어제는 황평에 있었으나 나는 동료들과 열흘 전부터 저들을 추적하고 있었소.”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지기 싫었다.

며칠을 추적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운호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며 무령에게 침을 튀겼다.

그러나 무령도 절대 지지 않을 기세였다.

“태강에서 천검회와 싸운 사람들은 그럼 누구요. 그대는 왜 자꾸 거짓을 말하는 거요?”

“허 참, 이 사람이…….”

태강에서의 일까지 꺼내자 운호가 슬며시 말꼬리를 흐렸다.

태강의 일을 안다는 것은 그가 운호 일행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운호는 헛기침을 한 후 어깨를 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궁금한 거나 풀어야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대는 우리의 행적을 어찌 그리 자세히 아시오. 우릴 따라다닌 거요?”

“난 무척 바쁜 사람이오.”

“그럼 어떻게 알았소?”

“무림은 하루만 지나도 소문이 천 리를 가는 곳이오.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벌여놓았는데 세상 사람들이 모를 거라 생각하셨소?”

운호의 질문에 오히려 무령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극비리에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무령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이야기하며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운호의 태도가 변했다.

이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다른 건 도대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매우 궁금해졌다.

“유령마조와 같이 있는 자들이 누군지 혹시 아시오?”

“모르오.”

“그럼 당신은 왜 유령마조를 찾은 것이오?”

“당신이 사문의 명을 받고 탕마행을 나선 것처럼 나도 제마행을 나온 것이오. 점창만이 협을 시행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소.”

“음…….”

운호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직까지 무당 쪽에서는 이 일의 중대성을 정확하게 간파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자신조차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되었으니 무당이 모른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무령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는 천검회가 마두들을 이용해서 철혈문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서 다방면으로 조사하는 중이오. 유령마조를 지금까지 그냥 내버려 둔 이유도 그 때문이었소.”

“다행이구려.”

“마검께서는 더 아는 바가 있소?”

“있소.”

“천검회가 마두들을 이용해서 철혈문을 공격한 이유를 알고 있단 말이오?”

“대충은 알고 있소.”

“말해주시오.”

“맨입으로는 말해줄 수 없소.”

“무슨 말씀이오?”

“유령마조와 음풍수사를 내가 잡겠소. 양보를 한다면 말해주리다.”

“그건!”

“싫다면 나는 말하지 않겠소.”

“참으로 욕심이 많구려. 저 둘을 모두 양보할 수는 없소. 하나를 양보하리다. 어떻소?”

“누구?”

“음풍수사.”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렇게 합시다.”

“자, 그럼 말해보시오.”

“천검회는 비밀 조직의 명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오. 우리가 추적했던 흑객들은 그 조직에 속한 자들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천검회는 신주십강에 포함될 만큼 강한 문파요. 그런 자들이 누구의 명을 받는단 말이오?”

“귀왕이 죽으면서 나에게 말해준 내용이오. 그는 그 신비 조직의 이름이 천(天)이라 했소.”

“마검께서는 나를 놀리는 것이오?”

“내가 왜 그대를 놀린단 말이오.”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하니 그런 거 아니오. 나는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겠소. 거짓으로 얻어낸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으니.”

“당신은 왜 내가 거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요?”

“세상에는 상식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오. 그대의 말은 전혀 믿을 수 없을 만큼 터무니없소.”

“내 말이 사실이란 걸 증명한다면?”

“어떻게 증명한단 말이오?”

“귀왕을 뺀 사파의 삼대고수 중 나머지 둘이 천문과 수라맹으로 갔소. 그들도 여기 귀주처럼 호남과 강서에서 일을 벌인다 하오. 내 말이 맞고 틀리고는 그걸 보면 알게 될 것이오.”

“허어…….”

이번에는 반대로 무령의 입에서 헛기침이 새어 나왔다.

고수는 기세만 보고도 상대의 심리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고 했지만 무령은 운호의 눈만 보고도 거짓이 아니란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천하의 마검이 이리 진지하게 거짓말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더군다나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정대함은 가슴까지 뛰게 만들 만큼 도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천검회에 이어 천문과 수라맹까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조정되는 게 사실이라면 큰일도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그 짧은 순간에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천하의 정세와 무당의 앞날, 그리고 점창과 눈앞에 있는 마검까지 별별 생각이 다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가 금방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연 것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일단 저놈들부터 잡읍시다. 약속대로 유령마조는 내 꺼요. 내 밥에 침을 흘리면 가만있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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