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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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95화
운호는 귀왕을 바라보다 뒤쪽에 서 있는 흑포 괴인들을 확인하고 작은 신음을 흘렸다.
놈들은 한눈에 봐도 만마당이 아니었다.
청성을 공격했던 놈들과 궤를 같이하는 자들.
기운이 다르고 기세가 달랐으며 무력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
흑포 괴인들은 당시 청성을 공격했던 자들과 유사한 기운을 품고 있었는데 풍겨 나오는 기세가 결코 그들보다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철혈문의 피해가 이해가 되었다.
소수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당했다고 했기에 선뜻 이해하지 못했는데 막상 놈들을 확인하자 지금까지 당한 철혈문의 피해가 오히려 작게 느껴졌다.
강남 삼마두을 전면에 내세우고 야금야금 철혈문을 공격해서 피해를 주는 작전이다.
운호가 귀왕을 확인한 후 작은 목소리로 장황을 부른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당주, 내가 귀왕을 붙잡으면 뒤쪽의 흑포인들을 잡으시오. 가능하겠지요?”
“마검께서 귀왕을 잡아준다면 충분하오. 저들이 비록 강하다고는 하나 철혈문은 만만한 곳이 아니오.”
풍뢰당주 장황의 대답에 운호가 천천히 걸어 귀왕의 앞으로 나섰다.
귀왕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젊다.
그런데 그 기세가 마치 산악과 같기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너는 누구냐?”
“당신을 잡기 위해 온 사신.”
“젊은 놈이 벌써 미친 게냐?”
“탕마의 기치를 들었을 뿐인데 어찌 그것을 미쳤다 할 수 있겠소.”
“내가 그리 우습게 보였단 말이지?”
“점창의 탕마는 사람을 가리지 않소. 그 속에 숨 쉬는 마검은 더욱 그러하오.”
“네가 마검이냐?”
“그렇소.”
“작은 명성으로 감히 귀왕을 노리다니 너무 일찍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
“그대가 십왕의 일인이라 들었소. 무림백대고수에도 속하며 사파인들의 우상이라는 말도 들었지. 하지만 그것뿐. 당신은 오늘 여기서 죽어.”
“크크크. 과한 자신감이로다. 어디 해보거라.”
귀왕이 오른손에 든 미첨도를 앞으로 슬쩍 밀었다.
그러자 해일 같은 기세가 일어나며 공기가 회오리쳤다.
막강한 기세. 절대고수의 위력은 가히 폭풍과 같다.
운호는 검을 뽑으며 귀왕을 응시했다.
상대는 천하를 들었다 놨다 한다는 백대고수 중에서 서열 칠십팔 위에 꼽혀 있는 절대고수였다.
무림십왕의 하나.
이번 싸움은 단황야와 벌였던 싸움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상대를 가로막은 채 수많은 검리들이 펼쳐지는 지루한 소모전.
적정의 원리와 중첩의 원리. 쾌와 둔의 조화, 경중의 변화 등 모든 검리가 포함된 대결은 피가 마를 정도의 긴장감을 갖게 만든다.
그것이 단 일격에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절대고수와의 대결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한 치라도 방심하게 된다면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절대고수 간의 싸움은 그래서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
황수 전투에서 전왕과 청무자가 벌인 가공할 전투도 거의 세 시진이 넘도록 펼쳐졌었고, 그 외에도 절대의 경지를 넘나드는 고수들의 싸움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한 시진이 훌쩍 넘어간다.
장황에게 의미 섞인 말을 던진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귀왕이 움직이지 못하면 철혈문의 저력은 흑포인을 잡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전왕이 청무자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은 끝장을 보겠다는 그의 의지 때문이었다.
지닌 세력의 소멸과 삶에 대한 포기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을 뿐, 만약 그가 자신의 목숨을 아껴 도주라는 선택을 했다면 그를 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귀왕도 마찬가지였고 자신 역시 그렇다.
황수 전투에 이어 가공할 위력을 세상에 선보인 귀왕과의 전투.
그 치열함이 어느 정도가 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싸움에서 중병기가 유리한가란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을 하는 사람은 머리가 단순하거나 무예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자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병기가 무겁다는 것은 충돌 시의 이점을 분명히 가지고 있으니 충분한 장점으로 작용하지만 반대로 속도 면에서 현격한 불리함을 지녀 좋은 점만 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병기가 그렇다.
장점이 있으면 반드시 단점이 존재하기에 어떤 병기가 가장 훌륭하다고 단정해서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귀왕의 미첨도를 보면 그런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중병의 단점을 완벽하게 가려 버린 그의 무력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충격을 줄 만큼 대단했다.
윙… 윙.
오 척 단구의 체격에서 어찌 저런 괴력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한번 부딪칠 때마다 삼사 초가 펼쳐졌고 충돌로 인해 굉렬한 충돌음이 생겼지만 미첨도는 운호를 압박하며 끊임없이 전진해 오고 있었다.
중병과 장병의 장점을 극대화했고 단점을 완벽하게 죽여 버린 그의 미첨도는 번개가 무색할 정도로 빨랐다.
그렇다고 운호가 일방적으로 밀린 것은 아니었다.
처음 상대하는 미첨도의 위력에 잠시 몸을 사렸을 뿐 운호는 귀왕의 공격을 흘려내며 외곽으로 여유 있게 돌았다.
구경하는 사람의 눈에는 일격필살로 보일지 모르나 충분히 감당이 가능한 공격이었다.
귀왕도 마찬가지였지만 운호도 진신절학을 뿜어내지 않고 있었다.
운호가 지금 펼치고 있는 것은 유운검법이었다.
극성에 달하면 구름이 흐르는 것처럼 한없이 유연하고 수많은 변화로 적의 눈을 현혹시켜 언제 당하는지조차 모르게 고혼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절학이다.
개개의 초식으로는 사일검의 위력에 미치지 못했으나 연환으로 따진다면 유운검의 위력은 오히려 사일검을 능가할 만큼 강력했다.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고 전진해 오는 귀왕의 공격을 향해 운호는 유운검법으로 대항하며 수많은 충돌을 거듭했다.
쿵쿵… 쾅… 쾅.
한번 부딪칠 때마다 손이 저리는 충격이 왔으나 운호는 안색조차 변하지 않고 귀왕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고수는 적의 칼을 보지 않고 눈을 본다.
눈에 모든 정보가 담아 있기 때문이다.
하수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중수 정도만 되도 충분히 이해하는 기초 무리 중의 하나가 바로 관안이다.
상대의 눈에서 나오는 눈빛과 시선, 그리고 흔들림만 보고도 어딜 어떻게 공격할지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한다면 고수로 들어선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 될 것이다.
운호의 검이 유운에서 사일로 변한 것은 귀왕의 칼이 그동안 펼치던 것과 다르게 단초의 승부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유운의 연환을 깨기 위해 다가오는 귀왕의 공격은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연환이었으나 귀왕은 정확히 유운검법의 초식 사이를 파고들었기 때문에 운호는 어느 순간 뒤로 훌쩍 물러서며 섬전(閃電)으로 맞섰다.
콰앙…!
지금까지 울렸던 어떤 충돌음보다 커다란 굉음이 터지며 양측이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눈은 더없이 가라앉아 있었는데 지금의 싸움이 가져다 준 희열이 그 속에 은은하게 담겨 있었다.
절대고수의 경지에 오른 자들의 전투.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터뜨릴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은 다시없는 행운이고 기쁨이었으니 그들은 서로를 향해 병기를 겨누면서도 미움을 내보이지 않았다.
“훌륭하구나.”
“당신도 그렇소.”
“어린 나이에 그 정도의 무력이라니. 참으로 대단하다.”
“점창에는 나 같은 사람들이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소.”
“사실이냐?”
“그렇소.”
“크크… 거짓이면 또 어떨꼬. 어차피 내 눈으로 직접 너의 무력을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안 믿어도 상관없소. 당신들이 벌이는 판에 점창을 끌어들이는 순간 점창의 검이 어느 정도인지 자연히 알 수 있을 테니까.”
“지금까지는 재미였고. 일 각만 더 하자. 그 정도면 싸움이 끝나는 데 충분할 것 같구나.”
귀왕이 눈을 돌려 흑포 괴인들과 장황이 이끄는 풍뢰당과의 싸움을 확인한 후 말을 꺼냈다.
그는 반수나 쓰러진 흑포 괴인들의 안위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것 또한 뭔가 이상하다.
함께 움직인 자들의 안위에 대해서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귀왕이 저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귀왕 역시 천검회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나선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 된다.
귀왕 정도 되는 절대고수가 남의 손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그랬기에 운호는 흑룡검을 좌로 비켜내며 물었다.
“당신이 받은 금제는 뭐요? 정말 궁금하오.”
“알 것 없다.”
“그럼 우리 내기 하나 합시다.”
“내기?”
“백 초 승부를 펼쳐 나를 이곳에서 열 발자국 뒤로 물러서게 만들지 못하면 당신이 지는 것이오. 어떻소?”
“가소로운 놈.”
귀왕의 눈이 가늘게 오므려지며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들어줄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귀왕은 눈가에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운호를 바라봤다.
할 이야기를 하란 의미였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하나만 가지고도 그는 운호의 제안을 들어줄 것으로 보였다.
“내가 이기면 한 가지만 말해주시오.”
“뭘 말이냐?”
“이 암계의 범위. 내 생각에는 천검회만 관련된 게 아닐 것 같소.”
“크크크. 넌 참 재밌는 놈이로구나. 좋다. 그 대답은 네가 이기면 해주마.”
귀왕의 입에서 괴소가 흘러나왔다.
지옥귀왕이란 명호답게 그는 젊은 시절 천하를 종횡하며 수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마였다.
자신의 앞을 막는 자는 닥치는 대로 죽였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살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 그가 강호에서 종적을 감춘 것은 벌써 십 년도 더 된 일이었는데 소문에 따르면 자신의 죄를 뒤늦게 깨우치고 은거를 결심했다고 전한다.
그런 귀왕이 세상에 나온 이유는 과연 뭘까.
정말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 초를 한계로 둔다는 것은 그들의 싸움이 이전과는 완벽하게 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적정의 원리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적의 내력과 초식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적을 이기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싸움으로 변한다는 건 가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쏟아낸다는 걸 의미한다.
그 결과는 지금 눈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용들의 싸움과 같았다.
일격 일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력은 사람의 힘으로 받아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귀왕의 독문무공인 혈사도법(血巳刀法)은 총 구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백 초식을 한정하고 승부에 돌입하자 그는 마지막 후삼식을 연이어 펼치고 있었다.
고수의 자존심은 목숨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은 법이다.
운호의 검도 마찬가지로 분광에 이어 회풍까지 풀어내며 천지 사방으로 검기를 뿜어내었다.
귀왕의 마지막 후삼식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분광과 회풍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격돌은 점점 느려져 갔다.
느려졌지만 공기의 파장이 훨씬 크게 확장되어 나갔다.
그만큼 진신력을 끝까지 끌어내고 있다는 뜻이다.
고수가 자신이 지닌 내력을 십 성으로 끌어올리게 되면 움직임은 느려지고, 대신 온몸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게 된다.
지금의 귀왕이나 운호처럼.
작은 선을 그려놓고 십 보를 벗어나면 지는 것으로 하겠다는 운호의 제안은 어찌 보면 허황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수들의 대결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버틴다 해서 버텨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미 장황이 이끄는 풍뢰당은 흑포 괴인들을 모두 도륙하고 귀왕과 운호의 싸움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얼마나 험악한 싸움이었는지 풍뢰당 백오십의 무인 중 살아남은 것은 백여 명뿐이었다.
직접 싸움을 벌이는 사람들도 쉽지 않은 기회였지만 이런 절대고수들의 대결을 지켜본다는 것은 기연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희귀한 경험이었다.
그들도 무인이었으니 현재 두 사람의 결투가 얼마나 지독하게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찢어질 듯 부릅떠진 눈. 그리고 벌어진 입.
평생 어느 순간 이런 전투를 볼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들의 결투는 산천초목을 흔들 만큼 거대한 위력을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