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9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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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90화
일심동체(一心同體).
육체와 정신이 하나 됨을 말하는 단어이다.
천검십이도는 칼을 꺼내 든 순간 그렇게 하나가 되어 운호를 압박해 들어왔다.
천뢰마도의 위력은 과연 명불허전.
소문으로만 들어온 그들의 도법은 사위를 완벽하게 차단한 채 운호의 움직임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그들에게서 뿜어진 도기가 대낮임에도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게 허공을 찢어발기고 바위를 잘라 산산이 비산시켰다.
정말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운호는 기다렸다는 듯 뛰어들며 공격해 온 도객들의 도기를 중간에서 자른 후 우방으로 신형을 옮겼다.
작은 편차의 틈을 뚫고 이동하는 그의 신형은 환상 그 자체였으나 십이도의 칼은 집요하게 전신을 노리며 따라붙었다.
도기의 중첩.
열둘이나 되는 자들이 시간의 편차를 두고 끊임없이 공격해 오자 움직일 방위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할 수 있는 선택은 오직 하나.
힘으로 부딪쳐 깨부수는 것뿐.
그랬기에 운호는 재차 돌입해 오는 세 명의 도객을 향해 가차 없이 분광을 펼쳤다.
콰앙! 쾅! 쾅!
휘청하며 튕겨 나가는 도객들을 뚫고 운호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빠져나갔다.
불의의 일격을 받은 도객들은 술 취한 자들처럼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대신 다른 자들이 급히 추적해 왔으나 운호의 신법은 바람처럼 움직여 격차를 벌여 나갔다.
인정할 정도로 대단한 무력을 지녔지만 두려워 피한 것은 아니다.
냉철한 판단에 의한 행동.
산 정상에서 셋을 죽인 지 불과 반의 반각도 안 되어 천검십이도가 나타났다는 건 이 험악한 산에 상당수의 천검회 전력이 숨어 있다는 걸 단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지금은 혼자의 힘으로 천검회와 정면으로 부딪칠 이유가 없었다.
싸움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면 천검회는 자신을 주목하게 될 것이고, 그리 되면 음흉하게 숨겨진 그들의 목적을 알아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후퇴를 하고 기회를 다시 보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사달이 생긴 건 천검십이도와의 격차를 이십여 장으로 벌였을 때다.
유령처럼 솟아난 일곱 명의 흑의무인들은 묵룡창을 들고 오부능선에서 운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들고 있는 창만 봐도 그들이 누구란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천검칠수(天劍七手).
확실하게 예상이 맞았다.
천검회는 사파의 고수들을 그냥 방치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천검칠수가 나타났다는 것은 충분히 제압할 만한 전력을 이곳 불곡산에 풀어놓고 암중에서 감시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역시 아직까지는 강호의 경험이 부족하다.
미리 예측했다면 이런 상황까지 몰리지 않았을 텐데 부족한 경륜은 그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뚫고 나가기 위해 검에 내력을 주입했을 때 천검칠수는 완벽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창을 하나로 모았다.
뚫고 싶으면 오라는 태도.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행동이었는데 그들이 모은 창에서는 내력이 중첩되며 하나의 원형 방패가 생성되고 있었다.
천검회의 특수병기들은 절대고수들을 잡기 위해 키워졌다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아마 저들이 펼친 방어막을 깨기 위해서는 일곱의 내력을 합한 것보다 더 강한 위력이 필요할 게 분명했다.
완벽한 도발.
하지만 도발이면서 유혹이기도 했다.
만약 그들이 펼친 방어막을 피하기 위해 우회한다면 더한 위험이 닥친다는 걸 본능이 알려주고 있었다.
그랬기에 운호는 슬며시 이를 악물고 흑룡검에 최대의 내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검이 윙윙거리며 울음을 토해냈고, 검기의 길이가 한 자 이상 더 솟구쳤다.
결심한 이상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부딪쳤다.
그가 펼친 회풍은 수많은 원을 생성시키며 천검칠수가 펼쳐놓은 방탄수를 향해 날아갔다. 마치 회전하는 용과 비슷한 형상이다.
강기와 강기의 대결.
한쪽은 방어이고 한쪽은 공격이었으나 위험해 보이는 것은 오히려 공격하는 운호 쪽이었다.
그만큼 칠수가 펼쳐놓은 방탄수는 철벽처럼 운호의 검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흑룡검에서 삐져나온 검기의 원들이 방탄수와 충돌하기 시작하자 말도 안 되는 결과가 생겨났다.
그토록 강력하던 검기의 방어막은 회풍을 튕겨내지 못하고 받아들였는데 한 번씩 충돌할 때마다 상처를 입고 흔들리며 움찔거렸다.
그런 후 한순간 폭발하듯 깨지며 칠수를 뒤로 튕겨냈다.
설명은 길었으나 순식간에 발생한 결과였다.
믿겨지지 않는 사실.
뒤에서 추적해 오던 십이도는 그 충격적인 사실에 추적을 멈추고 운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저자가 도대체 누구기에 이런 가공할 무력을 펼쳐낸단 말인가.
단순하게 누군가의 첩자로 생각했는데 막상 나가떨어진 칠수를 확인하자 오금이 저려왔다.
칠수는 절대 자신들보다 하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곡산을 빠져나온 운호는 그길로 곧장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풍월루로 향했다.
친구들은 지금쯤 사라진 자신 때문에 애를 태우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애가 타는 건 그가 더했다.
이제 천검회는 자신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다.
귀주는 천검회의 영역이고 이곳 도균은 그들의 본단이 있는 곳이니 최대한 빨리 벗어나지 않는다면 발각될 가능성이 너무나 컸다.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풍월루에 도착했을 때 운호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솟아나고 있었다.
급히 방으로 들어서자 누워 있던 운상이 기겁하며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는 운호를 보자마자 소리부터 질렀다.
“어떻게 된 거야!”
“운여는?”
“너 찾으러. 한 소저하고 광릉 주변을 살핀다고 갔다.”
“일어나. 짐 챙겨.”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가면서 설명해 줄게. 급해. 빨리 움직여.”
운호의 재촉에 운상이 더 이상 묻지 않고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주섬주섬 싼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말이 많은 편이었지만 행동 역시 누구 못지않게 빠른 사람이었다.
운호는 광릉으로 향하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운상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운상이 거품을 물었다.
들을수록 점점 일이 커져 감당할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장하겠네. 천검회랑 붙었다고?”
“어쩔 수 없었어.”
“그게 인마,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내용이 아니잖아.”
“그럼 어떡해. 이미 벌어졌는데.”
“이 뻔뻔한 놈아, 그걸 말이라고 하냐!”
“신경질 부리지 말고 빨리 운여부터 찾아야 해. 안 그러면 정말 일이 커질지도 몰라.”
“하여간 넌 일 만드는 데 선수다.”
운상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발길을 재촉했다.
운호의 말대로 도균을 최대한 빨리 벗어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행스럽게 운여와 한설아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반각이 지났을 때다.
그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돌아오다가 운호를 확인하곤 얼굴을 활짝 폈다. 특히 한설아는 죽었다 살아온 낭군을 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오라버니, 어디 갔던 거예요?”
“급하니까 일단 가면서 얘기합시다.”
“왜 그래요?”
“그럴 일이 있소. 서두르시오.”
한설아의 손목을 잡은 운호의 손길은 이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서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그건 손목을 잡힌 한설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얼굴에 들어 있는 건 이유를 알지 못한 것에 대한 의문뿐, 손목을 잡힌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전혀 없었다.
운호는 그녀를 이끌고 사람들이 다니는 관도를 벗어나 우측으로 보이는 야산으로 향했다.
먼저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고 앞으로의 진로와 행동에 대해서 의견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평소 같았으면 두 사람이 손목 잡은 걸 가지고 짓궂게 굴었을 운여와 운상도 이번만큼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따라왔다.
그들도 상황의 심각함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운호가 그녀의 손목을 놓은 것은 산비탈에 도착했을 때다.
오면서 운상에게 개략적으로 얘기한 내용들을 이번에는 하나씩 세밀하게 일행을 향해 설명했다.
광릉에서부터 추적해서 불곡산으로 갔던 과정과 병력의 집합, 그리고 천검회와의 충돌까지 풀어내자 다 듣고 난 운여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면서 운호가 대형 사고를 쳤다는 소릴 듣고 설마 설마 했는데 운상의 얘기는 맛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얼굴 보였어?”
“응.”
“복면이라도 쓰지 그랬냐! 천검회의 정보력은 천하에서 가장 신속하고 정확하다고 알려져 있어. 얼굴까지 보였으니 정말 난리 났다.”
“그래서 말인데, 일단 귀주부터 벗어나자.”
“쉽진 않을 것 같다. 치부를 들켰으니 그냥 내버려 두겠어?”
“은밀히 빠져나가야지. 일단 귀주만 빠져나가면 천검회라도 어쩌지 못할 거야. 너희가 한 소저를 데리고 가라. 나중에 수녕(綏寧)에서 만나자.”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불안해. 놈들이 내 얼굴을 아니까 같이 행동하다가는 전부 위험해질 수 있어.”
“그래서 우리만 먼저 가라고?”
“난 지옥에서라도 살아갈 자신이 있다. 그러니 내 말대로 해.”
“바로 따라올 거지?”
“거기 가서 기다려. 난 놈들에 대해서 더 알아봐야겠다. 천검회가 사파 고수들을 병력화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야. 분명 음모가 있어.”
“위험해!”
“우리 목적이 뭔지 잊었어?”
“좋아, 그럼 운여를 한 소저하고 보내는 것으로 하지.”
운상이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후 운여를 바라봤다.
운여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운상이 운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다.
“그렇게는 못해. 갈 거면 운상 네가 가라.”
“왜?”
“난 황수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엔 여기에 있어야겠다.”
“등판에 칼질을 당해본 놈이 그래도 덜 아픈 법이야. 난 운호 따라다니면서 셀 수 없이 얻어맞은 경험이 있다. 간다면 당연히 내가 같이 가야 돼.”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이놈이 웬 고집을 부리고 그래!”
운상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하지만 이번에 나선 것은 운여가 아니라 한설아였다.
“나도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날카로운 목소리.
지금까지 한 번도 부드러움에서 벗어나지 않던 그녀의 목소리는 파랗게 날이 서서 운호 일당을 압박하고 있었다.
떠듬거리며 운상이 입을 연 것은 그녀의 입술이 덜덜 떨렸기 때문이다.
“소저, 왜 그러시오?”
“저는 청성의 한설아입니다. 청성의 무인이란 말입니다. 오라버니들한테는 제가 그렇게 하찮게 보입니까?”
“…그게…….”
“사문에 표물을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런 저에게 위험하니 도망이나 다니라고 하시다니 정말 너무하세요.”
“그런 뜻이 아니었소.”
“위험해서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도 청성 신진무인을 대표하는 검객 중 하납니다. 충분히 제 몸은 지킬 수 있어요.”
“안 가겠다는 뜻이오?”
“당연히 안 갑니다. 오라버니들이 절 버리고 간다 해도 저는 천검회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봐야겠어요.”
너무나 단단해서 말릴 재간이 없을 정도로 한설아의 말투와 음성은 단호했다.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 피신시키겠다는 마음뿐이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자신들만의 생각이었다.
청성일미 한설아.
막상 그녀가 누군지 생각하자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청성 신진무인을 대표하는 검객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운호는 친구들과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번갈아 쳐다봤다.
어렵고 힘든 길이 분명한데도 한설아와 친구들은 같이 가겠다며 버티고 있다.
머리는 안 된다고 하는데 가슴은 따뜻해져 왔다.
가슴 한구석을 허전하게 만든 것은 헤어져야 한다는 이별의 아픔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그녀와 친구들이 같이 가자고 따라나서자 먹먹해졌던 가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