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8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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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1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86화
운호는 어두운 얼굴로 객잔에서 나오는 한설아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리쉬었다.
그녀도 청성도 힘든 결정을 했으리라.
전쟁의 중심에 선 청성.
떠나는 사람도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도 서로를 걱정하며 아쉬운 이별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설아의 표정은 운호에게 다가올수록 언제 그랬냐는 듯 바뀌었다.
“이제 가요.”
“어찌 되었소?”
“사문에서 허락이 떨어졌어요. 대신 마검 옆에 꼭 붙어 다니라더군요.”
“그건 걱정 마시오. 내가 매듭을 만들어서 소저를 운호 옆구리에 매달아주겠소.”
배시시 웃으며 한설아가 장난하듯 말하자 그걸 받아서 운상이 확실하게 대못을 박았다.
운상은 말뿐만 아니라 등에서 짐을 벗더니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때문에 운호는 재빨리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대로 있다가는 정말 한설아를 묶겠다고 덤빌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천의 광원에서 그들이 목적으로 하는 귀주로 가기 위해서는 평창, 달주를 통해 중경을 관통하고 정양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직선로로 따져도 이천 리가 넘는 길이니 아무리 빨라도 보름은 걸리는 거리였다.
서둘러야 되는 길이었으나 아직 한설아의 몸이 완쾌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행은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지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원활하게 신법을 펼칠 정도로 완쾌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 한설아를 배려해서 운상과 운여는 가는 길에 있는 도시마다 들러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여인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해 그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외형적인 것들은 친구들이 준비했으나 소소한 것들은 운호의 몫이었다.
한설아는 불편한 것이 있거나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나 운호를 찾았다. 떠날 때 말한 것처럼 그녀는 운호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는데 마치 오래된 연인과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길고 긴 여정.
보름을 목표로 한 여행길은 이틀이나 더 길어져 귀주의 성도 귀양에 도착했을 때는 무려 십칠 일이 지난 후였다.
귀주는 여름엔 덥지 않고 겨울에는 춥지 않아 중원을 통틀어 가장 살기 좋은 기후를 가졌다. 풍부한 물산으로 인해 수많은 거상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곳이기도 했다.
삼십팔무맥에 포함되는 강력한 문파 철혈문과 천검회가 귀주에 둥지를 튼 것은 그런 이유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백룡사는 귀주의 성도인 귀양(貴陽)에서 남쪽으로 삼십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백룡사를 가기 위해서는 귀양을 경유해야 된다는 뜻이다.
운호 일행은 서로에게 의견도 묻지 않고 곧장 귀양 시내로 들어섰다.
험한 여행으로 인해 온몸은 온통 먼지투성이였고 머리카락과 피부조차 푸석푸석하게 변해 있었다. 객잔에 묵으면서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게 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저기 어때?”
“너무 고급스러운 곳 아니냐?”
운상이 가리킨 곳은 삼 층 누각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대리석으로 깔린 정문계단과 양쪽에 서 있는 호랑이상이 조화를 이뤄 위압감을 줄 만큼 거대한 규모였다.
재정을 담당하는 운여가 슬며시 고개를 저은 것은 정문에서 손님을 맞아들이는 지배인을 확인하고 난 후였다.
저런 지배인을 두고 영업한다는 것은 엄청 비싼 집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이기에 운여는 지체 없이 반대했다. 일행은 귀주의 최대 번화가란 만경로를 따라 하염없이 걸어야 했다.
만경로에 있는 객잔들은 모두 초입에서 본 객잔과 거의 비슷한 규모를 자랑했기 때문에 쉽게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귀양이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이라더니 객잔마저 입이 떡 벌어질 만큼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야, 이러다 날 새겠다. 아무 데나 들어가자.”
“외곽 쪽으로 가보는 게 어때? 아무래도 여긴 너무 비싸 보여.”
“저기, 운여 소협, 돈 때문이라면 객잔 비용은 제가 낼게요. 청성 때문에 오셨으니 제가 내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럴 수는 없소.”
“다리가 아파서 더 이상 걷기 힘들어요. 그러니 우리 그만 헤매고 저 객잔에 들어가서 쉬어요.”
한설아는 고개를 흔드는 운여를 뒤로하고 먼저 휘적휘적 걸어 앞의 영통객잔으로 들어갔다.
말리고 자시고 할 새 없을 정도로 빠른 걸음이었다.
문제는 운상과 운호가 즉시 한설아의 뒤를 따라붙었다는 것이다.
놈들은 혹시나 운여가 잡기라도 할까 봐 서두르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운여의 얼굴에서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당장 쓰러질 만큼 힘들고 배고팠기 때문에 충분히 놈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만 여자가 돈을 낸다면 겸양의 말이라도 해야 되는데 놈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생각조차 없는 모양이다.
객잔에 들어선 후 모든 절차는 한설아가 일사천리로 진행시켰기 때문에 운호 일당은 눈만 끔벅거리고 있어야 했다.
그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지배인의 지시를 받은 점소이가 안내하겠다며 앞장서서 걸었을 때다.
한설아가 얻은 방은 모두 세 개였다.
당연히 그녀는 독방을 썼고 그 옆으로 운호의 방을 배치했다. 운상과 운여가 쓸 방은 그들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었다.
왠지 수상한 냄새가 나는 배치였다.
운상이 묘한 눈길로 한설아를 바라보며 항의했으나 그녀는 일부러 모르는 체 시선을 비켜냈다. 그는 헛기침만 한 채 맥없이 점소이를 따라 멀어져야 했다.
한설아의 입이 열린 것은 운상과 운여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았을 때다.
“부담스러워요?”
“뭐가 말이오?”
“내 옆방 말이에요.”
“나는 괜찮은데 저놈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소.”
“호호, 이해할 거예요. 우리 둘이 붙어 있으라고 한 건 운상 소협이잖아요.”
“소저께서는 즐거운 모양이오.”
“그럼요. 나는 공자와 함께하면 늘 즐거워요. 몰랐나요?”
“험, 이제 그만 들어가시오.”
“먼저 씻고 같이 식사하러 가요.”
객잔은 모두 욕간을 운영한다.
특히 만경로에 위치한 객잔은 모두 특급이었기 때문에 훌륭한 욕간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일행은 온몸에서 반짝반짝 윤이 났다.
특히 한설아와 운호는 봉황과 용으로 변해 있었다. 때문에 그들이 나타나자 객잔에 있던 사람들은 쳐다보느라 한동안 식사를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운호 일행은 식탁에 앉아 늦은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한설아는 작정을 했는지 모든 비용을 혼자 지불했다. 저녁 식사로 꽤 비싼 요리까지 시켜 운호 일행의 눈을 황홀하게 만들어주었다.
더군다나 두 병의 죽엽주까지 주문해 일행은 오랜만에 허리띠를 풀고 즐겁게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한 잔, 또 한 잔.
아무리 무공의 고수라도 내공으로 주정을 막지 않으면 일반 사람처럼 술에 취하게 된다.
오랜만의 즐거운 자리였기 때문에 주정을 막지 않은 일행은 식사가 끝났을 때 모두 붉게 변해 있었다.
운상과 운여가 먼저 자신들의 방으로 사라지자 운호와 한설아 역시 방으로 돌아왔다.
둘의 방은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한방을 쓰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었다.
운호의 입이 열린 것은 한설아의 방에 도착했을 때다.
“소저, 잘 자시오. 내일 아침에 봅시다.”
“잠깐만 들어와요.”
“왜 그러시오?”
“할 말이 있어요.”
한설아는 운호를 빤히 쳐다본 후 곧장 자신의 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당연히 운호가 따라 들어올 거란 움직임이다.
한참을 망설이던 운호가 그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선 것은 취객들이 그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오면서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기 때문이다.
같은 방인데도 여자가 묵는 방과 남자가 묵는 방은 묘한 차이가 있다.
그녀의 방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사향 냄새가 어딘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운호는 방으로 들어와 움직이지 못했는데 그녀가 침상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해요. 이쪽으로 와요.”
“소저, 그쪽으로 갈 수는 없소. 할 말이 뭔지만 듣고 나갈 테니 얼른 용건만 말하시오.”
“겁나요?”
운호가 쉽게 다가오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자 취기로 인해 붉어진 얼굴을 한 한설아가 도발적으로 물었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운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입에서 저절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런 만용을 부리는 걸 보면 한설아는 취한 게 분명했다.
잠시 동안 아무 말 없던 운호가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무슨 말을 할지 모르나 이대로 나가 버리게 되면 그녀는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될 가능성이 컸다.
의방에서는 그녀를 수시로 안았지만 막상 침상에 같이 앉자 심장이 사정없이 두근거려 운호는 시선을 방문 쪽으로 고정시킨 채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한설아가 은근한 목소리로 부른 것은 자신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갈 때였다.
“오라버니!”
“…….”
“왜 대답 안 해요?”
“그게 날 부른 소리요?”
“그럼 여기에 또 누가 있나요?”
“갑자기 호칭을 바꾸니 놀라서 그렇소. 말하시오.”
“앞으로는 오라버니라고 부를게요. 괜찮죠?”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하시오.”
운호가 마지못해 허락하자 그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어렵게 한 말일 테니 거절하면 상처를 입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허락했는데 그녀는 곧장 더 큰 요구를 해와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오라버니는 저를 부를 때 설아라고 불러주세요.”
“그리하면 운상이나 운여가 이상하게 생각할 거요.”
“남들 눈이 그렇게 부담스러워요?”
“그런 게 아니라…….”
운호가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라고는 했지만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다.
이별의 아픔을 겪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친구들 앞에서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가벼움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한설아가 입을 연 것은 운호가 말을 미처 끝내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라버니, 나 어떻게 생각해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소.”
“여자로서 어떠냐고 물은 거예요.”
“소저는 내가 본 여자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오.”
“그게 단가요?”
“지금으로써는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오.”
“오라버니는 정말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군요. 운상 소협한테 들었어요. 당 소저와의 관계에 대해서.”
“음…….”
한설아의 입에서 당운영의 이야기가 나오자 운호는 자신도 모르게 억눌린 신음성을 흘리고 말았다.
숨길 내용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말하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설아는 운호의 반응과 상관없이 당운영의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아직 잊지 못한 거죠?”
“사람을 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오.”
“그렇겠죠. 하지만 그분은 다른 사람과 혼인했으니 언젠가는 잊어야 될 사람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그렇게 생각하오.”
“그럼 내가 기다릴게요. 오라버니가 그분 다 잊을 때까지 기다릴게요.”
“나는 고지식한 사람이라 꽤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오.”
“괜찮아요. 지금까지 오라버니를 좋아하면서 아무 말 못했지만 이젠 그렇게 하지 않을래요. 난 오라버니가 좋아요. 그러니 오라버니도 날 좋아해 줘요.”
“소저!”
“설아, 설아라고 불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