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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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81화
숲 속으로 뛰어들며 날린 일검에 손칠의 신형이 튕겨나가자 운호는 윗옷을 벗어 즉시 한설아의 몸을 가린 후 곧바로 도주하는 손평을 덮쳤다.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의 오감은 언제나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그것은 손평도 마찬가지였다.
운호가 장내로 뛰어들며 손칠을 일격에 날려 버리는 걸 보자마자 놈은 미친 듯 우측 숲속으로 몸을 날려 도주를 시도했다.
그 짧은 순간에 나타난 사람이 중강 싸움에서 무시무시한 위력을 선보인 마검 운호라는 걸 알아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미처 숲속으로 뛰어들지 못한 채 운호의 검과 마주서야 했다.
극에 달한 유운신법은 놈의 이동을 차단해서 다시 장내로 내려서게 만들었다.
“참으로 쥐새끼 같은 자로다.”
“으… 마검.”
“말해보라. 죽음을 앞에 둔 형제까지 팽개치고 도망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큭큭, 그거야 살기 위해서 아니겠느냐. 죽으면 형제도 소용없다.”
“비열한 놈. 그런 썩어빠진 정신을 가졌으니 온갖 못된 짓을 했겠지. 오늘 내가 널 죽여서 그동안 너에게 당한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주겠다!”
운호는 성큼성큼 걸어와 손평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나름대로 고수라 소문났고 웬만한 무인은 열이 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손평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고양이 앞의 쥐.
운호의 몸에서 발현된 압도적인 기세는 손평에게 대적할 의지조차 갖지 못하도록 했다.
하나 그의 몸이 폭발적으로 쇄도하며 접근해 온 것은 운호의 검이 움직이기 위해 막 흔들릴 때였다.
죽음을 각오한 공격.
어차피 죽는다는 생각에 모든 걸 포기한 자에게서 나오는 초인적인 힘.
전신의 공력을 모두 끌어당겨 한꺼번에 터뜨린 손평의 검이 다섯 개로 변하며 운호의 전신을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무서운 속도의 공격이었다.
흑룡검이 흔들리며 앞으로 튕겨 나간 것은 손평의 검이 그의 몸에 닿기 일보 직전이었다.
후발선지.
늦게 움직이고 먼저 친다.
운문에서 지낸 일 년 동안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얻은 절대의 검리가 깊은 잠을 깨고 세상으로 터져 나왔다.
그토록 강력하게 날던 쾌검의 변초가 순식간에 산산이 파괴되었고, 뒤이어 손평이 몸이 허공을 날아 숲 속에 처박혔다.
비명도 없고 더 이상의 꿈틀거림도 없었다.
죽여야 할 자는 단 일 검에 목숨을 끊어놓은 독심.
이것이 황수전투에서 얻은 운호의 굳센 의지와 신념이었다.
능외쌍마를 단숨에 격살한 운호는 한설아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다가와 말없이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는 지체 없이 몸을 날려 산허리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한설아는 운호가 나타나 자신을 구한 후 번쩍 안아 든 채 어디론가 움직이자 부끄러움으로 인해 입을 꾸욱 닫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입은 상처는 너무도 커서 그 고통이 그녀의 의지를 꺾고 입 밖으로 비명을 흘리게 만든 것이다.
운호의 신법이 그녀의 신음 소리를 들은 후 점점 빨라졌다.
무엇 때문에 흘리는 신음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상처를 입어본 운호는 상처로 인한 고통의 진행 과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시간으로 봤을 때 지금의 그녀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에 진입해 있었고, 온몸을 뜨겁게 만드는 발열 상태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랬기에 운호는 정신없이 움직여 동굴을 찾아낸 후 그녀를 눕히고 자신의 겉옷을 그녀의 몸에서 벗겨냈다.
한설아는 운호가 옷을 벗기는데도 움직이지 못하고 오들오들 떨며 웅크리기만 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운호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움직였다.
처녀의 알몸을 만진다는 건 천하에 다시없을 강적과 대면한 것처럼 어렵고 힘든 일이었으나 운호는 눈을 꽉 감았다가 뜬 후 거침없이 손을 놀렸다.
“미안하오, 소저. 그대를 살리기 위함이니 부디 용서하시오,”
운호가 말을 했으나 그녀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고통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도 운호의 손이 자신의 몸을 만진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입을 열어 운호의 행동을 만류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이 얼마나 위험에 처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운호는 최대한 빨리 손을 움직였다.
금창약을 바르기 전 검상에 당한 어혈을 풀기 위해 내력이 주입된 손으로 상처 부위를 추궁했다.
그녀가 입은 상처는 네 군데.
어깨와 옆구리, 그리고 왼팔과 허벅지였다.
운호는 모든 상처를 추궁해서 피가 흐르게 만들었으나 허벅지는 건들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여인네의 속살을 만진다는 것은 아무리 상처를 치료하기 위함이라 해도 무척이나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운호는 잠시의 망설임을 뒤로하고 허벅지에 손을 댄 후 추궁을 시작했다.
뜨거워진 운호의 손이 허벅지를 추궁할 때마다 감긴 한설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부끄러움.
뼈를 깎아낼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 그녀는 한없는 부끄러움을 숨긴 채 끝내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운호에게 맡겼다.
추궁을 끝낸 운호의 손이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금창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추궁으로 흐른 선명한 피를 닦아내고 금창약을 바르는 운호의 손은 마치 갓 태어난 아기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모든 상처를 보듬은 운호가 자신의 깨끗한 상의를 벗은 후 잘게 찢었다.
깨끗한 붕대를 마련할 길 없으니 이것으로라도 상처를 싸매기 위함이다.
꼼꼼한 손길.
잘게 잘린 천으로 한설아의 몸을 싸맨 운호가 말없이 그녀의 눈 감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치료를 한 사내도 이토록 가슴이 뛰는데 벌거벗긴 채 치료를 받은 그녀의 부끄러움과 민망함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운호는 천천히 그녀의 옷을 찾아 입히기 시작했다.
비록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으나 몸을 가릴 수 있을 정도는 되었기에 운호는 옷을 모두 입힌 후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긴급한 조치는 했지만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최대한 빨리 광원으로 이동해 의방을 찾아 치료해야만 그녀를 위험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세 시진이 흘렀고, 운상과 운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둘 중의 하나.
그가 걱정되어 찾아 나섰거나 아니면 적을 만나 위험에 처한 경우이다.
하지만 운호는 전자라는 판단을 내리고 곧바로 광원을 향해 신법을 운용했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 해도 운상과 운여 정도라면 충분히 몸을 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한설아의 몸은 그야말로 용광로처럼 펄펄 끓었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그녀의 신음 소리는 커져 갔다.
운호의 신형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약속 장소에서 광원까지의 거리는 오 리 정도 떨어져 있었으나 그가 도심지 중심에 위치한 의방에 도착했을 때는 불과 반각이 지났을 뿐이다.
의원이 들어와 그녀의 몸에 손을 댔을 때 운호는 방에서 나가기 위해 천천히 일어났다.
밝은 곳에서 그녀의 알몸을 다시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운호는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고 말았다.
그 고통 속에서도 한설아가 손을 내밀어 그의 다리를 잡아왔기 때문이다.
“가지 말고 지켜주세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싫어요. 정신이 어지러워요. 이대로 잠들 것 같으니 여기서 날 지켜줘요. 부탁해요.”
“소저…….”
미처 거부하기도 전에 한설아는 스르륵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고 더 이상 뜨지 않았다.
너무 당황스러워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고, 이대로 여기에 남아 있는 것도 부담이 되어 마음이 돌덩이를 얹어놓을 것처럼 무거워졌다.
의원이 어쩌면 좋겠냐는 시선을 보내왔다.
두 사람의 행동으로 인해 한설아의 옷을 벗기지 못한 채 의원은 눈치를 보고 있다.
의원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인들을 치료할 때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자신의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운호의 입이 열린 것은 한참을 망설인 후였다.
“그대 뒤에 있을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치료에 전념해 주시면 고맙겠소. 나는 책을 읽고 있겠소.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거나 해줄 일이 있다면 즉시 부르시오.”
운호는 의원의 뒤쪽에서 등을 돌린 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정신이 다른 곳에 있으니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지만 그는 한순간도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치료가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스럽게 치료는 한 시진이 지나자 끝났는데, 매우 힘들었는지 의원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기야 충분히 이해는 된다.
한설아가 운호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의원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자신을 못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이라도 서툰 짓을 하거나 치욕스러운 일을 한다면 즉시 참해달라는 부탁으로까지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의원은 정성에 정성을 거듭해서 그녀를 치료했다.
일이 무사히 끝나자 황천에 갔다가 온 사람처럼 기력이 빠져나간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치료가 모두 끝났습니다.”
“수고했소.”
“이제 저는 나가서 탕약을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환자가 움직이지 않도록 조심해 주십시오.”
“그러리다.”
“그럼 저는.”
“아, 나가시거든 여인네 옷 한 벌만 구해주시오. 옷이 성치 않구려.”
“그리하겠습니다.”
의원은 운호의 말에 흘끔 한설아를 쳐다본 후 서둘러 방을 나섰다.
한설아는 어느새 깨끗한 붕대로 싸매져 있었는데 여전히 찢어진 옷으로 몸을 가린 상태였다.
잠이 든 걸까? 그녀의 가슴은 고르게 움직였다.
치료가 효과를 보는지 열이 가라앉아 홍시처럼 붉어졌던 얼굴이 정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다.
상처를 입고 누워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한설아의 외모는 아름다움을 넘어 고귀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운상과 운여를 찾아야 된다는 생각을 했으나 운호는 끝내 한설아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녀가 잠든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평생 후회하며 살지도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깨워 사정을 얘기한 후 친구들을 찾아 나서고 싶었지만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그만두고 말았다.
어차피 조금만 기다리면 의원이 탕약을 지어 방으로 올 테니 자연스럽게 깨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의원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로부터 일각 후였다.
탕기와 그릇이 담긴 다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온 의원은 약을 그릇에 따른 후 한설아의 잠을 깨웠다.
그녀가 스르륵 눈을 뜨자 의원이 운호를 바라봤다.
그의 손에 탕약이 들려 있으니 부축해서 일으켜 달라는 시선이다.
운호는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상체를 세웠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떨려왔다.
동굴에서 피범벅이 된 그녀를 치료할 때와는 또 다른 감각이고 또 다른 감정이었다.
팔로 한설아의 목을 부축해서 받치자 그녀가 눈만 돌려 운호를 보았다.
불안에 가득하던 눈동자는 사라지고 그 눈에는 어느새 평온이 들어 있었다.
탕약을 먹고 의원이 나간 후 운호는 그녀의 몸을 부축해서 다시 자리에 뉘었다.
“소저, 많이 다치셨소. 아무래도 여기서 며칠 동안 요양을 해야 될 것 같소.”
“…네.”
“내가 급하게 그대를 치료했소. 아시오?”
“알아요.”
“너무 급해 어쩔 수 없이 그리하였소.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거 잘 알아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구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고마워해야죠.”
그러나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말로는 고마워한다고 했으나 절대 고마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처녀의 알몸을 본 자가 고의가 아니었다며 책임이 없다는 말부터 하자 그녀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차라리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면 천길 무저갱 속으로 빠져드는 괴로움은 느끼지 않았을 텐데 운호는 그저 미안하다고만 하고 있다.
저 사람, 정말 나에게 느낀 감정이 미안함뿐이라면 난 이제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