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78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78화
운상은 엉덩이를 털고 천천히 마차 좌측에 홀로 떨어져 쉬고 있는 한설아를 향해 다가갔다.
백건은 유혁과 함께 뭔가를 숙의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운상은 헛기침을 한 후 털썩 주저앉으며 그녀에게 슬그머니 말을 붙였다.
“저기서 보니까 계속해서 뭔가를 보던데 무얼 그리 열심히 보고 계시오?”
“제가… 제가 뭘 봤다고 그러세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한설아가 말을 더듬었다.
그녀는 운상이 오기 전까지 운호가 만수자와 밀담을 나누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강호를 호령하는 강호의 여협도 이런 상황에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 한설아를 향해 운상이 빙그레 웃었다.
“부끄럽소?”
“그만하세요! 안 그러면 화낼 거예요!”
“어허, 그건 안 될 말이오. 세상에 누가 자신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을 욕한단 말이오.”
“저를 위해 노력하셨다고요?”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거요,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거요?”
“그건…….”
한설아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섬서로 가는 표행에 따라붙으라는 암시를 한 것이 바로 운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쉽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고 속마음도 꺼내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을 온 천하에 드러낼 정도로 그녀는 배포가 크지 못했다.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설레는 마음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운상은 오늘 기어코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이 표행으로 소저를 오게 만든 것 때문에 한 말이 아니오.”
“그럼요?”
“내가 운호한테 지속적으로 소저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오. 사실 아까 그자들이 공격하려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나서지 않으려 했소. 하지만 내가 강력하게 주장했소.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 소저가 다치면 안 된다고.”
“운호 소협이 아니고요?”
“운호는 청성의 일이라는 부담 때문에 망설이다가 한 소저가 다칠 수 있다는 말을 듣자 그때서야 나서더구려. 운을 뗀 건 내가 먼저였지만 전장에 먼저 나선 것은 운호였소.”
“그 말, 정말이죠?”
“나는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오.”
운여는 멀찍이 떨어져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이야기하며 웃고 있는 운상과 한설아를 의아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도저히 그의 머리로는 해석이 안 됐기 때문이다.
한설아는 운호에게 호감을 보였는데 웃고 떠드는 건 운상과 함께하고 있으니 그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한참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야 했다.
결국 운여가 간 곳은 운호를 향해서였다.
운호는 만수자를 비롯해서 청성무인들이 표물을 끄집어내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운여가 다가오자 빨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저 사람들, 왜 표물을 전부 끄집어 내리는 거냐?”
“내가 그러라고 했다.”
“쉽게 말해봐.”
“만 냥의 값어치가 나가는 표물, 그걸 찾자고 했다. 다시 공격해 올 것이 뻔한데 이대로 당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네 말은 중요한 표물만 찾아서 최대한 빨리 이동하자는 뜻이군. 그렇다면 일은 쉬워지겠네.”
“청성의 입장에서는 그렇겠지. 청성은 표물을 찾으면 광원까지 전속력으로 움직일 거다. 만수자께서는 이미 청성 본산에 전서를 띄워 광원으로 지원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셨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없어졌단 얘기다.”
“같이 가지 않는단 뜻이냐? 그럼 우린 뭐 하고?”
“우린 저기 마차들과 이동한다.”
운호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자 운여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뭔가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쉽게 알아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운호의 설명이 이어진 것은 운여가 주먹을 쓰다듬기 시작했을 때다.
“사천사흉 중 몇 놈은 분명 이쪽으로 온다. 우린 남아서 놈들을 잡는다.”
“아하!”
이제야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너무 간단한 논리였는데 청성의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운호의 논리는 이런 것이었다.
청성이 중요한 표물만 챙겨서 떠나면 분명 신비인들은 그들을 추격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진짜 표행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놈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청성이 조호이산지계를 쓸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호의 말대로 놈들은 전력의 일부를 표행 쪽으로 붙일 가능성이 컸다.
그랬기에 운여는 자신의 허벅지를 때리며 새삼 감탄사를 터뜨렸다.
운호 이놈은 가끔 가다 귀신같은 짓거리를 하곤 했다.
특히 아주 어려운 것에 대한 해결책도 생각하지 못한 쪽에서 찾아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반대쪽에서 얼굴을 마주한 채 이야기하는 운상과 한설아를 바라보며 운여가 입을 연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건 아무래도 네 생각이 맞는 것 같다. 그러니 저들이 떠날 때 헤어지는 것으로 하자.”
“그러지, 뭐.”
“그나저나 쟤들은 지금 뭐 하고 있는 것 같냐?”
“저렇게 속닥거리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혹시 둘이 사귀는 거 아냐?”
“사이가 좋아 보이는 게 그럴 수도 있겠다.”
“뭐냐, 너? 한 소저가 운상과 사귀어도 괜찮다는 거냐?”
“그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아, 이놈, 진짜. 내가 말을 말아야지.”
운호가 자꾸 동문서답을 하자 운여가 홱하니 몸을 돌렸다.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면 속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운상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운호가 깊은 밤 홀로 앉아 한숨 쉬는 게 무척이나 보기 싫었다.
아직 해보지 않았으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얼마나 아픈 건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운호가 힘들어하는 걸 볼 때마다 진저리가 쳐졌다.
얼마나 아프기에 천하의 독종 운호가 저리 힘들어한단 말인가.
벗어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해줄 용의가 있었다.
말은 이상하게 했지만 운상이 한설아를 어떻게 해보기 위해 저리 찰싹 붙어 앉아 있는 건 아닐 게다.
분명 그는 늘 하던 대로 한설아와 운호가 잘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 분명했다.
만수자가 그 많은 표물 중에서 직사각형의 길쭉한 나무 상자를 꺼내 든 것은 거의 이각이 지난 후였다.
사람은 마음이 급하면 행동도 급해지는 법인데 만수자가 그랬다.
그는 천을 마련해서 삼 척이 넘는 나무 상자를 등에 움직이지 못하게 가로로 멘 후 운호 일행에게 다가왔다.
서두르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져 있었는데 표물의 정체를 확인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표물의 정체.
만수자 혼자서 골라낸 표물은 오직 그만 확인했기에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 표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언제나 온화하던 만수자의 얼굴이 무섭게 경직된 것을 보면 표물의 가치를 상상할 수 있었기에 운호 일행은 아무 말 없이 만수자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가르쳐 달라고 해서 가르쳐 줄 거였다면 애초부터 자신의 분신처럼 몸에 매달지도 않았을 것이다.
역시 예상은 맞았다.
만수자는 표물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우리는 지금 떠나려 하오. 마검 일행은 어쩌시려오?”
만수자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통보나 다름없는 말투였다.
쉽게 말해 이제부터는 청성 홀로 갈 테니 따라오지 말라는 태도였다.
도와준 사람들에게 할 행동을 아니었으나 운호는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급하면 만수자 같은 사람이 그리했을까.
그랬기에 운호가 일행을 대표로 나서며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우리는 급한 일이 없으니 천천히 갈 생각입니다. 보아하니 급하신 것 같은데 먼저 떠나시지요.”
“이해해 주니 고맙소. 그럼 먼저 떠나리다.”
겸양의 말조차 하지 않는다. 그만큼 급하다는 뜻이다.
만수자의 손짓에 즉시 따라붙은 청성의 무인들이 동시에 운호 일행에게 포권을 취했다.
그들은 사숙의 행동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입도 벙긋하지 않고 운호 일행과의 이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오직 한설아만은 갑작스러운 이별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운상의 도움을 받으며 즐거운 상상을 하던 그녀이다.
광원까지 여행하면서 운상이 가르쳐 준 대로 운호와 조금 더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지려 했다.
하지만 그러한 계획과 즐거운 상상은 일순간에 깨져 버렸고 오직 아쉬운 이별만이 남았다.
번개처럼 사라져 가는 사숙과 사형들의 신형은 아련한 그녀의 시선조차 오래 머물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청성무인들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리자 표두 황충은 운호 일행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복면인들이 다시 공격해 온다면 그들로서는 막아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도 표국 밥을 먹은 지 이십 년이 넘었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만수자가 가져간 것은 보나마나 복면인들이 노리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운호처럼 복면인들이 다시 공격해 올 거라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오래된 경험에서 얻은 결론이다.
중요한 것을 노리는 자들은 어떤 것이든 결코 그냥 흘리는 법이 없다.
그의 눈으로 본 운호 일행의 무력은 막강 그 자체였다.
복면인이 아니라 그 할아비가 온다 해도 운호 일행만 있으면 안전할 것 같았다.
그랬기에 황충은 운호 일행에게 다가와 걸음을 멈춘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대협들께서는 어쩌실 생각인지요?”
“뭘 말씀입니까?”
“표행의 목적지는 광원입니다. 아쉽게도 청성의 대협들이 떠나 버려 저희 목숨이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목적지가 없다면 저희와 같이 가주십시오. 작으나마 호위 비용은 별도로 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 했소.”
“정말이십니까?”
“우리는 탕마행을 위해 내려온 사람입니다. 사문의 명에 의해 협의를 실천함이니 어찌 그대들을 사지에 넣고 떠날 수 있겠소. 걱정 안 하셔도 되오.”
“고마운 말씀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운여의 대답에 황충의 얼굴이 활짝 폈다.
표행을 수행하면서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렸고 복면인들의 공격으로 죽다 살아나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의 심지는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그런 마당에 천하를 쩌렁하게 울린 마검 일행이 호위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자 그는 금방 자신감을 회복하고 표사들을 독려해서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운호 일행은 황충에게 약속을 한 후 표행이 출발하자 모습을 감췄다.
그들의 최종 목적은 사천사흉을 잡는 것이기 때문에 은밀하게 표행을 따르면서 주변을 경계했다.
사천사흉은 그들이 표행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공격을 포기하고 도주할 가능성이 컸다.
서른 가까운 인원으로 출발한 표행의 숫자는 이제 열셋으로 줄어 단출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평상시의 표행이었다면 쟁자수를 비롯해서 마부들이 따라붙었겠지만 위험하다고 판단한 국주 현천우는 표사들로 그들의 숫자를 대신했다.
무척 현명한 판단이었다.
만약 그들이 따라왔다면 이전 싸움에서 태반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운호를 비롯해서 운상과 운여는 표행을 중앙에 두고 삼각형 형태로 멀찍이 떨어져 전진하고 있었다.
놈들의 접근을 외곽에서 확인하고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함이다.
예상대로 놈들이 나타난 것은 청성무인들이 떠난 그다음 날 저녁이었다.
광원까지는 반나절이 남은 거리였으니 목적지를 코앞에 둔 곳이다.
나타난 자들은 혈번과 신마, 그리고 이십여 명의 도객이었다.
그들은 복면을 하고 있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복면을 벗고 있었는데 혈번과 신마의 얼굴은 명부에 묘사된 것과 흡사했다.
문제는 적색 도객들이었다.
그들은 나타난 이후 한 치의 미동조차 보이지 않고 혈번과 신마가 하는 짓을 지켜보기만 했다.
가면을 쓴 것과 같은 얼굴. 몸에서 흘러나오는 불편한 기운은 시리도록 차가운 살기였다. 그 기세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표사들은 그들이 나타나자마자 두려움으로 칼조차 빼지 못하고 있었다 이전의 흑건 복면인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자들이었다.
혈번과 신마가 앞으로 나서며 황충을 닦달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들이 적색 도객들을 이끈다고 생각했으나 장내에 도착하자 그 판단이 틀렸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개개인의 무력은 혈번에 비해 떨어질지 모르지만 만약 붙는다면 혈번은 그들 셋을 감당하기 어렵다.
혈번이나 신마처럼 혼자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자가 아니라 하나의 전투부대에 소속된 특수병기란 뜻이다.
칠절문과의 전투에서 운호는 그런 자들과 싸운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전에 싸운 어떤 부대의 무인보다 더 강하고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랬기에 황금 번개 문양의 사내는 오지 않았으나 이번 싸움은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위험할 거라 생각했다.
이런 자들의 집단 공격 능력은 상상할 초월할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