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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77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15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풍운사일 77화

운호의 검이 뽑힌 것은 신비인의 칼이 도명을 울리기 시작할 때였다.

이 년 만에 적을 상대로 뽑힌 검이다.

오랜만에 만난 적이 도명까지 울리는 고수였기에 운호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긴장이 그를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손에 든 것은 여전히 흑룡검이었으나 주인은 예전의 운호가 아니었다.

“이름을 알면 좋았을 것을… 누굴 죽였는지도 모를 테니 내 검이 답답하겠구나.”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네 목이 떨어질 테니 말이다.”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거지. 하지만 어떤 일은 예상이 가능하기도 해. 그래서 인생이 재밌는 거 아니겠어? 내가 봤을 때 당신은 오늘 날을 잘못 잡았다.”

“무슨 개소리냐?”

“내 검이 너무 강해 보였나? 설마 흑룡검에 눈까지 먼 거야?”

신비인이 스산한 목소리로 묻자 운호의 눈이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일방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름 아닌 운상과 운여 때문이다.

그들은 흑건사내들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거침없이 검을 뿌려대고 있었다.

벌써 고혼으로 변해 바닥에 쓰러진 흑건인은 열이 넘었고, 피해는 계속해서 커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반 시진도 되지 않아 흑건인은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황금 번개 문양 사내의 눈이 전장을 훑은 후 다시 운호에게 돌아왔다.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확인했음에도 그의 시선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뱀처럼 차가운 눈이다.

고수는 뒤에도 눈에 달려 있으니 전장의 상황을 파악한 것은 한참 전의 일이다.

그럼에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은 지금 죽어나가는 자들의 죽음이 그와는 상관없기 때문이다.

놈들은 어차피 이 일이 끝나면 죽을 운명이었다.

“네 친구들이 한가락 하는구나.”

“서두르지 않으면 모두 죽을 것이다.”

“어차피 죽는 게 인생인데 조금 일찍 죽는다고 해서 뭐가 아쉽겠느냐.”

“갈수록 태산이군. 도대체 당신 뭐야?”

“큭큭, 크크, 애송이, 너무 답답해하니 알려주마. 나중에 죽어서 저승에 사는 누군가가 묻거든 단황야가 보내서 왔다고 전하거라.”

“단황야?”

괴소를 흘리며 칼을 끌어올리는 신비인의 행동에 운호의 검이 마주치듯 앞으로 내밀어졌다.

그 짧은 순간,

머리를 전부 헤집어봤으나 무림 인사 중 단황야란 별호를 가진 자는 찾을 수 없었다.

운학 사형이 가져다 준 무림명부를 거의 달달 외웠기 때문에 명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황야는 무림명부에 없는 자였다.

저 정도의 기세를 가진 무인이 무림명부에 없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의문을 가질 때가 아니었다.

강적을 상대하면서 정신을 분산시키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벌써 단황야는 허공을 찢으며 칠도를 날려 오고 있었다.

 

콰앙!

신경을 쓰지 않는 척했지만 단황야는 최대한 빠르게 승부를 결정짓고 싶은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칠도는 방어 초식인 비화(飛花)의 꼬리를 따라잡으며 독사의 혓바닥처럼 운호의 전신을 노렸다.

한 번의 충돌이 아니라 연환이었고, 강기는 중첩되며 날아와 운호의 흑룡검을 계속해서 밀어냈다.

대단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지만 상상보다 훨씬 강한 자였다.

유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귀두도는 수많은 빛의 잔영을 남기며 한 점의 광구가 되어 떨어졌다.

광구 하나하나의 위력은 천지를 갈라놓을 만큼 엄청나서 충돌할 때마다 손아귀가 저려왔다.

바람을 탄 구름 유운이 운호를 태우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단황야의 칼이 수직에서 수평으로 변하며 도기를 난사할 때였다.

흑룡검에서 뿜어져 나온 분광이 유운신법과 어울려 단황야의 도기와 맞섰다.

선제공격에 밀린 운호의 신형이 멈췄고, 팽팽한 균형이 맞춰지며 두 사람의 공전절후의 결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운호는 냉정한 눈으로 폭풍처럼 다가오는 단황야의 강기를 하나씩 일일이 차단해 나갔다.

회풍을 꺼낼 수도 있었으나 그리하지 않은 이유는 단황야의 정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공에 대한 연원도 알지 못했고,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현재의 공격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고수들의 맞대결이 단박에 끝나지 않는 이유는 섣불리 전력을 다해 공격했다가 예상치 못한 반격을 당하게 되면 치명상을 입기 때문이다.

절정을 넘어선 고수들은 언제나 적정의 원리로 맞서다가 상대의 기운을 마지막까지 파악한 후에야 비기를 꺼낸다.

더군다나 단황야란 자는 지금까지 싸운 누구보다 강한 자였기에 운호는 섣불리 모험을 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공방이 지속되었고, 충돌 음은 수시로 그 색깔이 바뀌었다.

천둥처럼 크게 터졌다가 비단천이 찢어지는 소리로 변했고, 어떨 때는 바람 소리로도 들렸다.

번천지복.

정말로 무시무시한 대결이었다.

단황야가 공중으로 떠오르며 십이도를 날린 것은 운여가 마지막 남은 복면인을 쓰러뜨렸을 때다.

십이도가 하나로 모이며 거대한 구체가 되어 운호를 향해 날아갔다.

비기다.

지금까지 펼치지 않은 초식.

거대하게 변한 빛의 정화가 날아오자 운호는 이를 지그시 악물고 회풍을 꺼내 들었다.

콰앙! 쾅! 우르릉!

연속되는 충돌에 땅이 뒤집혔고, 바람이 통과하지 못하는 진공 상태가 두 사람 사이에서 펼쳐졌다.

단황야가 삼 장이나 물러서며 고함을 친 것은 충돌의 여파가 끝나지도 않았을 때다.

“물러나라!”

단황야의 외침에 만수자와 싸우던 혈번과 백건 등을 압박하던 자들이 일거에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단황야를 따라 십여 장을 후퇴해서 진형을 갖췄는데, 싸움의 여파로 인해서인지 살기가 뭉텅이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살기를 잠재운 건 단황야였다.

“마검, 참으로 대단하구나.”

“왜, 그냥 가려고?”

“크크크, 어중이떠중이 모아서 일을 하려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너로 인해 여기 있는 자들이 모두 죽을 테니 너무 자만하지 말거라.”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어!”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때는 모두 죽여줄 테니 기다리도록.”

말을 마친 단황야가 손짓하자 뒤에 서 있던 네 명의 복면인이 먼저 능선으로 날아올랐다.

사내들이 모두 사라지자 그도 허깨비처럼 신형을 흔들거리며 물러났다.

운상이 따라잡으려는 듯 움찔했으나 운호가 급히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저 정도 무력을 지닌 고수의 도주를 막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반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칠십에 달하는 복면인을 모두 해치운 것은 운여와 운상, 그리고 청성의 호풍검 유혁이었다.

운여와 운상의 무력은 이 년 전과 또 다른 경지에 도달해 있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호풍검 역시 청풍팔검의 일인답게 막강한 위력을 선보였다.

일방적인 승리였으나 그럼에도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었다.

피로 물든 중강변.

사람의 죽음은 언제나 기분을 좋지 않게 만든다.

더군다나 일곱 명의 표사가 목숨을 잃어 나머지 표사들이 그들의 주검을 붙잡고 울었기 때문에 분위기는 훨씬 가라앉았다.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 것은 만수자를 비롯해서 청성무인들이 죽은 복면인들의 정체를 알게 된 후였다.

죽은 자들은 사천을 기반으로 온갖 못된 짓을 하며 떠돌아다니던 사특한 무리였다.

월영사귀, 칠면랑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두 죽었다는 걸 알면 사천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부를 정도로 나쁜 짓을 하고 돌아다니던 놈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자들이 한꺼번에 모여 표물을 노렸다는 점이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해서 쥐새끼처럼 숨어 다니던 이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단 말인가?

진정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표행의 최종 목적지는 추측한 대로 광원이었다.

광원이라면 앞으로도 삼 일은 걸어야 할 거리이다.

물론 표물 없이 신법을 발휘한다면 한나절 거리에 불과했으나 마차를 끌고 가야 하니 줄기차게 걸을 수밖에 없다.

복면인들의 시신은 방치할 수 없어 한군데에 모아 매장했고, 표사들의 시신 역시 별도로 천에 싸서 가매장을 한 후 표식을 해놨다.

돌아오는 길에 가져가기 위함이다.

일행이 휴식을 위해 멈춘 것은 중강을 벗어나 삼십 리를 더 전진한 후였다.

만수자가 다가와 운호의 옆에 앉은 것은 운상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한설아에게 다가갔을 때다.

“한 가지 물어도 되겠소?”

“말씀하시지요.”

“싸우는 와중에 얼핏 단황야란 말을 들었소. 그자의 이름이오?”

“그자는 스스로 그리 말하더이다. 이름이기보단 별호인 것 같았습니다.”

“마검도 처음 듣소?”

“그렇습니다. 저도 처음 듣는 명호입니다.”

“그자의 무력은 어땠소?”

은근한 목소리로 만수자가 물어왔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닐 것이다.

자신도 절정의 반열에 든 고수이고 스스로 단황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력을 봤으니 충분히 짐작했을 터이다.

그럼에도 물은 것은 무림백대고수에까지 거론된 마검의 평가를 듣기 위함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운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겸허한 마음으로 물어온 무림의 선배에게 무안 주기 싫었다.

더군다나 그는 광명정대한 성격을 지녀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오는 노강호였다.

“진기와 비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럼 정기로만 겨뤘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허어, 그 정도였소?”

“자칫하면 당할 수 있었으니까요. 일각 만에 끝났기에 진기조차 쓸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무슨 소린지 알겠소. 그런 무시무시한 싸움이 정기만 사용된 것이었다니,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구려. 마검에 대한 명성이 천하에 진동했어도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대단하오.”

“별말씀을…….”

순식간에 운호의 말뜻을 알아들은 만수자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진정을 감복했다는 뜻이다.

비기란 무인이 가지고 있는 최후의 초식을 일컫는 말이고, 진기를 썼다는 것은 전력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정기로 싸웠다는 건 상대의 내력의 맞춰 적정의 원리로 부딪친 걸 뜻한다.

쉽게 해석해서 말한다면 두 사람 모두 전력으로 싸우지 않았다는 건데, 그만큼 상대를 두려워했다는 뜻도 된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를 정도로 강력한 적이었기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걸 운호는 에둘러 말한 거였다.

그랬기에 만수자는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참아냈다.

점창 마검의 무력이 황수벌판을 완벽하게 장악했다고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감탄을 속으로 접어두고 또다시 입을 열었다.

“나와 싸운 자는 혈번이었고 나머지는 신마와 능외쌍마가 분명했소. 더군다나 복면인들은 전부 사파의 인물이었소. 그대는 이 일을 어찌 생각하오?”

“그자는 어중이떠중이를 끌어모았다란 표현을 썼습니다. 수하들이 죽어가는데도 일말의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는 건 그들이 단황야의 진짜 수하가 아니란 뜻입니다. 아마 죽은 자들은 혈번을 포함한 사천사흉이 미끼를 주고 끌어들였을 겁니다.”

“일회의 소모성으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천사흉은?”

“저희는 이곳으로 오면서 혈번과 신마, 능외쌍마가 한 단체에 속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설마?”

“가능성이 큽니다. 아까 보지 않았습니까. 단황야의 명령을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따랐습니다.”

“음…….”

듣고 보니 그랬다.

물러서란 말에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후퇴했고, 손짓 하나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확실한 명령 체계에 있지 않았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을 운호가 끄집어내자 기어코 만수자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문제는 앞으로의 일입니다. 단황야란 자는 분명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전력을 확인하자 가차 없이 후퇴할 정도로 냉정한 자였으니 다시 올 때는 어려워질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자칫 모두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표물을 지키면서 무리하게 놈들을 기다리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다른 생각이 있는 모양이오?”

“저기 있는 표물이 전부 놈들의 목표는 아닐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차피 목표는 표물의 안전한 운송입니다. 목적만 달성하면 되는 것이니 구태여 힘든 길을 갈 필요는 없지요.”

“푸하하! 좋소! 좋은 생각이요!”

“청성에 연락해서 광원으로 와달라고 하십시오. 지금부터 전력으로 달리면 놈들과 마주치는 건 광원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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