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7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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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76화
능선에서 내려와 이십 장까지 전진해 상황을 지켜보던 운호의 고개가 슬그머니 기울어졌다.
만수자와 이야기를 하는 자보다 뒤쪽 중앙에 서 있는 황금 번개 문양의 사내가 훨씬 무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이긴다는 보장을 하지 못할 만큼 대단한 기도가 사내의 전신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운상아, 싸움이 시작돼서 우리가 끼어든다면 아무래도 내가 저자를 막아야겠다.”
“누구?”
“저기 중앙에 선 자.”
“금마혈번은 만수자 앞에 있는 놈이야. 혈번 안 보여?”
“잘 봐. 내가 왜 그러는지.”
운호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운 채 번개 문양 사내를 바라보자 운상과 운여가 동시에 사내를 주시했다.
오래 볼 필요도 없었다.
그자의 몸에서 흐르는 패도적인 기운은 깊게 갈무리하고 있어도 은연중 흘러나와 중강변을 휩쓸고 있었다.
벌써 표행을 이끌던 표사들은 알지 못한 곳에서 흐르는 기세로 인해 온몸이 위축되어 있었다.
그들은 적의 수가 자신들보다 많기 때문에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라 생각했으나 사실은 번개문양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세가 그들의 행동을 제약한 것이다.
정체를 알지 못하는 사내의 무력은 그만큼 대단했다.
운상과 운여는 황수전투 이후 이 년간의 고련을 통해 훨씬 강해져 있기에 사내의 무력을 알아보고 즉각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놈은 누구기에… 청성이 위험하겠다.”
“어쩌지? 이대로 내버려 두면 꽤 죽을 텐데?”
“전력에서 차이가 너무 나. 지켜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그럼 나가자. 가서 물어보지, 뭐. 만수자 정도면 금방 사태 파악이 되었을 거다.”
“싫다고 고집 피우면?”
“그땐 할 수 없지. 그냥 가는 수밖에.”
“안 돼. 난 한 소저 다치는 거 못 봐. 그래도 인연이 있는데 어떻게 그냥 가냐?”
운여의 말에 운상이 고개를 흔들었다.
청성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문파이다.
설혹 불리한 상황이라도 외골수의 고집을 피우며 도움을 외면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랬기에 운상은 곁에 서서 표행을 관찰하는 운호를 쳐다봤다.
한설아가 다쳐도 괜찮으냐는 의문이 담긴 시선이다.
운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자로서의 호감 여부를 떠나 한설아와는 묘한 인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만약 냉정하게 떠나게 된다면 운상의 말대로 그녀가 위험해진다.
“자, 시간 없으니까 빨리 정리하자.”
“해봐.”
“일단 가서 물어보고 도와달라고 하면 싸우는 거야.”
“싫다면?”
“그땐 옆으로 물러서서 지켜보는 거지. 그러다가 위험해지면 나서고. 어때?”
“두 번째 경우는 마음에 안 든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거잖아.”
“그거하고는 달라. 거절당했다가 도와주는 거랑 위험에 빠진 걸 도와주는 게 어떻게 똑같아. 점창이 뭐가 아쉬워서 도움이 필요 없다는데 나서서 지랄을 하냐!”
“운여야, 인마. 한 소저가 제수씨가 될 수도 있어. 말 함부로 하지 마.”
운호의 말을 받은 운여가 인상을 찡그리며 반대하자 운상이 끼어들었다.
그는 여전히 한설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묘하게 운여한테는 먹혀들어 갔다.
“아우, 몰라! 알아서 해!”
“좋아, 일단 가자. 한 소저한테 또 점수 딸 일 생겼구먼. 운호야, 넌 좋겠다.”
“그렇게 자꾸 엮지 마라. 부담 느껴진다.”
운상이 눈을 찡끗하자 운호가 입맛을 쩍쩍 다셨다.
무슨 일만 있으면 자꾸 한설아와 연관시켜서 미칠 지경이다.
운호 일행이 전권으로 내려선 것은 모사충이 대화를 마치고 뒤로 물러날 때였다.
만수자는 왼손에 든 검을 천천히 빼어 들다가 깃털처럼 내려선 운호 일행을 확인하고는 출검을 잠시 멈추었다.
검은 무복, 적색 매.
점창의 상징인 전도복을 알아본 만수자의 시선이 흔들렸다가 금방 바로 잡혔다.
“점창이오?”
“그렇습니다.”
“아이들 말로는 떠났다고 하던데 따라온 모양이구려?”
“가는 길이었습니다. 청성의 행사라 나서지 않으려 했지만 많은 사람이 다칠 것 같아 무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마검이 왔다고 하던데, 누구시오?”
“접니다.”
운호가 나서며 대답하자 만수자의 시선이 날카롭게 전신을 훑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후 그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
“천하의 마검을 보니 반갑소. 나는 광성검이라 하오. 거두절미하고 말하리다. 상황이 어려워졌으니 정중하게 도움을 청하겠소. 저자를 맡아주시면 나머지는 청성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소. 그러니 부탁하오.”
역시 무인이다.
부탁을 하면서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고, 자존심을 뒤로한 채 황금 번개 문양의 사내를 가리켰다.
스스로의 무력이 부족하다는 걸 시인하고 있으니 용기가 없다면 무림의 명망 있는 무인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운호는 즉시 대답했다.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만수자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하겠습니다.”
“점창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것이오.”
“청성과 점창은 오랜 우의를 다져왔으니 돕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수자가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하자 운호가 답례를 하고 뒤로 물러섰다.
돕기 위해 왔을 뿐 이곳 행사의 주인은 청성이니 적이 공격할 때까지 뒤로 물러나 추이를 관망하는 것이 예의였다.
하지만 운호는 뒤로 물러서지 못했다.
황금 번개 문양의 사내가 번뜩 신형을 날려서 다가와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황수전투의 마검이 너란 말이냐? 여기에는 왜 왔느냐?”
“탕마행!”
“가소로운 짓을 하는구나.”
“사천에 온 건 당신 휘하에 있는 몇몇 때문이었어. 한데 이제 보니 저들은 잔챙이에 불과한 것 같군. 얼굴이나 보자. 뭣 때문에 날도 좋은데 복면을 하고 다니는 건가?”
“내 얼굴을 보면 넌 죽는다.”
“그 말은 정체를 알려주지 못한다는 뜻이군. 복면에 복화술이라……. 어지간히 지랄 맞은 인간인 모양일세. 잔소리 말고 한판 붙자.”
“너무 안달하지 마라. 곧 죽여줄 테니.”
“누가 죽는지 한번 보지. 아무려면 천하의 마검이 복면이나 뒤집어쓰고 다니는 자를 두려워할까.”
“그 새끼, 정말 가소롭구나.”
마치 주욱 미끄러지는 것처럼 뒤쪽으로 물러난 신비인이 천천히 팔을 들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것이 신호인 모양이다.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칠십여 명의 흑건사내가 마치 비익조처럼 날아서 표행을 덮쳐왔다.
금마혈번은 만수자를 목표로 핏빛 깃발을 던졌고, 백건과 한설아를 향해서도 왼팔에 적색 견장을 낀 사내들이 덮쳐왔다.
난전.
장내는 순식간에 피가 흐르는 혈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황금 번개 문양의 신비인이 칼을 꺼내 든 것은 혈번의 깃발이 만수자의 검과 부딪치며 불꽃을 피워낼 때였다.
귀두도(鬼頭刀)이되 협봉도를 혼합해 놓은 것과 같은 기형 병기.
묵빛 칼은 도갑에서 뽑힌 순간부터 그릉거리는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도명(刀鳴).
신비인의 칼에서 흘러나온 건 절정을 넘어서 절대의 경지에 접근한 자들만이 이룬다는 도명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