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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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74화
미인과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은 어떤 즐거움 못지않게 기쁜 일이었다.
현천우를 비롯해서 금룡표국 사람들은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에 한설아가 운호 일행과 함께 식사를 하겠다고 찾아왔다.
그녀는 현 국주 대신 왔다고 했지만 운상과 운여는 절대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으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어댔다.
그녀도 손님의 신분인데 누구를 접대한단 말인가.
보나마나 그녀는 운호 때문에 왔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추측이 맞는다는 것은 식사 시간 내내 운호를 흘끔거리는 그녀의 태도에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미안하게 되었어요.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게 어찌 소저 잘못이겠소. 상황이 변해서 그리 된 것을.”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마워요.”
운호의 대답에 그녀가 환한 웃음으로 답을 했다.
그녀의 웃음은 언제나 너무 예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운상이 입을 연 것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운호가 마주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릴 때였다.
“소저, 사실 우리는 이번에 금룡표국을 노리는 놈들 전부가 목표였소. 처음에는 능외쌍마뿐인 줄 알았는데 혈번과 신마까지 개입되었다고 하니 졸지에 사천에서 할 일이 없게 되었소이다. 청성 때문에 사천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라 억울하기도 하오.”
“그건 양해해 달라고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우린 이 일의 결과를 지켜보고 싶소. 어차피 청성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그자들을 잡을 수 없다면 가는 길에 구경이라도 하겠다는 뜻이오.”
“어떻게요?”
“우리는 섬서로 갈 생각이오. 다섯 개의 표물 중 섬서 방향의 표물을 따라갈 테니 만약 우리를 발견하더라도 이해해 주시오. 대신 절대 개입하지 않겠다는 건 약속하리다.”
“아, 그건 어른들께 말씀드려 놓을게요.”
운상이 미묘하게 말을 마치자 한설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사천이 모두 청성의 땅일 리 없으니 사람이 제 갈 길을 간다는데 시비 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더군다나 먼저 양해를 얻었기 때문에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해결할 수 있는 빌미가 충분해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따라서 대답하기 어렵지 않은 요청인데 문제는 운상의 시선이 묘하게 반짝였다는 것이다.
사천에서 섬서와 연결되는 선은 오직 하나.
운상의 시선에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 있고,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랬기에 대답을 마친 그녀의 얼굴이 도화 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들킨 처녀는 언제나 부끄러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백건이 돌아온 것은 약속한 그다음 날 오시 무렵이었다.
그는 십여 명의 인물과 함께 왔는데, 그중 반은 나이가 오십이 훌쩍 넘은 사람이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압도적인 기운을 가진 자들, 바로 청성의 장로급에 해당하는 만자배 무인들이었다.
청성이 보유한 만자배 무인의 숫자는 모두 열아홉이었으니 그중 다섯을 내려 보냈다는 건 청성에서도 이번 일을 무척이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걸 의미한다.
그들이 모두 월동문을 통해 안채로 사라지는 걸 확인한 운호 일행은 천천히 걸어 금룡표국을 빠져나왔다.
국주인 현천우는 청성에서 온 사람들로 인해 정신이 없을 터라 표두인 황충에게 인사를 전해달라는 부탁만 남긴 채 성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표물 출발은 내일이기 때문에 하루의 여유가 있었다.
청성의 자존심은 표물의 출발을 비밀로 하지 않을 것이니 숙면을 취하고 천천히 일어나 금룡표국으로 가면 충분히 표물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란 계산이 섰다.
사람이 여유로울 때 하는 행동은 몇 가지로 한정된다.
그중 하나가 잠을 자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가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물론 즐거움을 찾는 데는 수많은 방법이 있었으나 운호 일행이 택한 것은 성도주변의 명승지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신상사(信相寺)는 성도에서 북쪽으로 이십 리 떨어진 곳에 있는 고찰이다. 절 입구를 통과하면 제일 먼저 삼대사전(三大士殿)이 보이고 대웅전 안에는 본존불이 안치되어 있으며, 양옆 벽에는 십육존자의 상이 세워져 있다.
그 자체로도 볼거리가 충분했지만 신상사가 유명한 이유는 절 옆으로 흐르는 온천수 때문이었다.
사시사철 흐르는 온천수는 문화지로 연결되어 여행객의 심신을 달래주는 명소 중의 명소였다.
“잡을까?”
“잡으려면 아까 잡아야 했어. 여긴 사람이 많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
“꼬리를 달고 다니려니까 불편해서 죽을 맛이다.”
운여의 제지에 운상의 인상이 우그러들었다.
미행이 붙은 것을 안 건 반 시진 전이다.
처음에는 워낙 은밀하게 따랐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으나 신상사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들어오자 바로 인지했다.
사람이 많아지면서 거리를 좁혀온 것이 놈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표국에서부터 따라온 거겠지?”
“확실히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이런 횡재도 생기니 말이다.”
“무슨 횡재?”
“생각 좀 해봐. 놈이 우릴 왜 따라왔을 것 같냐?”
“감시, 정체 파악, 금룡표국에 들어간 목적?”
“우린 산에서만 산 사람이다.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 이유는 하나뿐이야. 분명 놈은 능외쌍마와 관련이 있을 거다.”
운호가 씨익 웃으며 단정적으로 말을 하자 운상과 운여가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운호의 말이 정말이라면 횡재라는 단어가 어울리기 때문이다.
금룡표국과 상관없이 놈들을 잡을 수만 있다면 청성은 점창의 행사에 입도 벙긋 할 수 없다.
“운호야, 저곳에서 돌아 나가자.”
“어디서 잡지?”
“능외쌍마는 분명 성도에 있을 거다. 표물을 감시해야 될 테니 말이야. 그러니 최대한 달고 가다가 성도 외곽에서 잡는 것으로 하자.”
“그게 좋겠군.”
천천히 여유 있게 걸으며 경치를 구경하는 것처럼 움직이자 그 뒤를 바짝 따르던 운상이 맞장구를 쳐왔다.
성도의 지리를 모르기 때문에 먼 곳에서 일을 벌이면 자칫 냄새나는 사내놈을 들쳐 없고 한참을 뛰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었다.
신상사에서 성도로 돌아오던 운호 일행이 미행하는 자를 덮친 것은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구릉지였다.
운상이 좌측으로, 운여가 우측을 향해 몸을 날렸고 운호는 곧장 몸을 돌려 유운신법을 펼쳤다.
놈과의 거리는 삼십 장.
갑작스러운 회전에 놈이 움찔하는 사이 운호의 신형은 화살처럼 뻗어 나가며 순식간에 십 장을 압축했다.
단순한 미행이 아니라는 건 놈의 신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군더더기 하나 배어 있지 않은 쾌속한 신법.
놈은 미행이 발각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산 쪽으로 몸을 숨겼는데, 시야에서 금방 사라져 버려 뒤쫓던 운호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숲으로 들어선 운호는 신법을 펼치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불과 숨 몇 번 들이켤 사이에 사라졌다는 것은 은닉을 했다는 것이니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내력을 끌어올려 사방으로 뿌리며 전진하던 운호가 운여와 운상에게 손짓을 한 후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런 후 곧장 이 장 정도 떨어져 있는 나무로 쇄도하며 삼검을 날렸다.
쐐액!
운호의 일검에 고목이 박살이 나며 비산했고, 나무 위에 숨어 있던 놈이 어깨를 감싸며 나뒹굴었다.
삼십 중반은 넘은 나이.
사내는 어깨에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은 채 일어서지 못하고 운호를 바라봤다.
그런 사내를 향해 입은 연 것은 운호가 아니라 운상이었다.
“그냥 깔끔하게 한 방에 가자. 능외쌍마 있는 곳만 알려주면 살려주겠다. 눈깔 돌리지 마! 잔대가리 굴리면 바로 죽인다!”
능외쌍마란 소리에 사내의 눈이 흔들리는 걸 확인한 운상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럴 때는 여유를 줘서는 안 된다.
운상은 발을 들어 사내의 왼 다리를 찍어 누르며 으르렁거렸다.
“다시 말한다. 능외쌍마 어디 있나?”
장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능선.
해가 지고 어둠이 슬그머니 내려앉아 장원은 희미한 그림자에 덮여 있었다.
운호 일행은 능선의 비탈면에 편하게 앉아 장원을 한동안 관찰하다가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뭔가 이상했다. 장원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불빛조차 없어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로 보일 지경이다.
“어떡하지?”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어.”
“그 새끼가 거짓말한 거 같지는 않은데… 이상하네.”
“가보면 알겠지.”
역시 먼저 행동한 것은 운호였다.
신중할 땐 신중하지만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누구보다 판단이 빠르다.
운호가 먼저 일어나 신형을 날리자 운상과 운여가 그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멀지 않은 길이었으니 장원에 도착한 것은 반각도 걸리지 않았다.
예상대로 집은 비었다.
각자 방향을 나누어 조사했으나 장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한자리에 모이자 운여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꺼냈다.
“거짓은 아니야. 놈들은 여기에 있었다. 떠난 지 얼마 안 돼.”
“맞는 말이다. 기껏 두 시진, 가깝게 잡으면 한 시진 반?”
“거사 일은 내일인데 왜 벌써 움직였지? 이해가 안 되는구만.”
“그것도 그렇지만 숫자도 맘에 안 들어. 최소 이십 명 이상이 상주하고 있었다.”
운여가 고개를 흔들자 운상도 비슷하게 머릴 흔들었다. 오랜 세월이 그들에게 비슷한 습관을 갖게 만든 모양이다.
운호가 나선 것은 운여가 어질러진 방을 발로 슥슥 문지르며 마른기침을 할 때였다.
“자, 지금부터 내가 정리해 볼 테니까 말이 안 되거나 이상한 거 있으면 바로바로 이야기해.”
“해봐. 어차피 한 번은 정리해야 하니까.”
“첫째, 여기에 머문 자들의 숫자로 봤을 때 능외쌍마 단독으로 일을 벌인 건 아니란 게 확실해졌다. 그건 현 국주가 얘기한 대로 혈번과 신마가 관련되었다는 가능성이 커졌다는 걸 의미하지.”
“인정. 다음.”
“둘째, 놈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몰려다닌 적이 없는데 금룡표국 일에 동시에 나타났어. 놈들을 한꺼번에 묶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당연히 표물이겠지. 금룡표국에 의뢰한 표물이 놈들을 움직일 정도의 귀물이라면 얘기가 된다.”
“그 정도 가지고는 이유가 안 돼. 만약 그런 귀물 때문이라면 능외쌍마나 귀영신마는 혈번이 관련된 순간 발을 뺏을 것이다. 일이 끝나면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건 누구보다 놈들이 잘 알아.”
“목숨을 걸 정도의 귀물이라면?”
“그게 고민이다. 과연 목숨을 걸 정도의 귀물이 뭐가 있을까?”
“천문상단에서 운송 비용으로 만 냥씩 낸 거 보면 뭔가 냄새는 나. 귀물이니까 그 정도의 돈을 내고 운반하는 거겠지. 그래도 혈번이 나섰다면 그 새끼들은 포기했을 것 같다. 원래 다른 사람 목숨을 우습게 아는 새끼들일수록 제 목숨은 아까워하는 법이거든.”
“그래서 말인데, 놈들이 혹시 어떤 조직에 하나로 묶여 있다면 어때?”
“그건 더 말이 안 되잖아.”
“만약에?”
“그거야… 에이, 그래도 그건 아닐 거다.”
“좋아, 머리 아픈 건 통과. 셋째, 놈들이 우릴 미행한 걸 보면 분명 금룡표국을 감시하고 있었을 거다. 청성에서 추가 병력이 도착한 것도 알 거고 표행이 떠나지 않은 것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도 전부 거점을 버리고 떠났단 말이지. 이건 무슨 의미냐?”
“포기한 걸까?”
“그건 아닌 것 같군.”
“그럼?”
“놈들은 우리와 달라. 강호 경험이 흘러넘치는 놈들이니 금룡표국 뒤에 청성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거야. 지원군이 왔다고 포기할 놈들이었다면 시작도 안 했을 거다.”
“점점 골치 아파지네.”
중간에서 운여가 치고 나와 설명하자 운상이 머리를 문질렀다.
도통 알 수 없는 일 천지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자 운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강적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일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답도 없는 이야기를 하는 건 체질상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본능적인 감각이 자꾸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해. 생각하면 할수록 이 새끼들 뭔가 있어. 천문상단도 그렇고 이 새끼들도 비밀 투성이란 말이지. 아무래도 난 청성이 늪에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