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64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4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64화
운문은 점창산에서 돌연변이처럼 튀어나와 분지를 형성한 곳이다.
언제나 아침나절에는 안개가 끼었고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구름이 휘감고 돌아나가기 때문에 운문이라 불린다.
구름이 드나드는 문.
고요하던 운문이 시끄러워진 것은 장문인의 부름으로 상청궁에 다녀온 그날, 운상과 운여가 운호를 따라붙은 이후부터였다.
친구 셋이 붙어 있으니 만나기만 하면 시끄럽다.
오늘도 그들은 햇빛이 따사로운 널찍한 바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운상은 벌러덩 누워 있고 운여와 운호는 윗옷을 벗은 채였다.
금방 수련을 끝내고 몸을 씻었는지 운호와 운여의 몸에는 아직도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놈들아, 너희는 장문인 말씀도 못 들었어? 좀 쉬라잖아. 무리하지 말고.”
“너나 계속 쉬어.”
“그 검 안 닳았냐. 이 년 내내 휘둘러 놓고 부족해?”
“난 얘가 좋아.”
운상이 도끼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운여가 바위 끝에 놓인 자신의 검을 가슴에 품었다.
마치 사랑하는 여인을 보듬는 듯한 모습이다.
못 볼 걸 봤으니 운상이 그냥 넘어갈 리 만무하다.
“아주 웃겨. 산에서 내려가면 절대 그런 짓 하지 마. 사람들 있는 데서 그러면 변태라고 불러.”
“흐흥, 상관 마라.”
“그래, 맘대로 해. 언제 네가 내 말을 들은 적 있냐.”
운여가 희한한 웃음소리를 내며 콧방귀를 뀌자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눕히며 운상이 손사래를 쳤다.
그 모습에 운호가 입맛을 다셨다.
이놈들은 말도 안 되는 것들로 사람을 황당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운호의 입이 열린 것은 운여가 슬그머니 검을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을 때다.
“그나저나 내일이야. 참 시간 빨리 간다.”
“제법 크게 행사를 연다고 하던데, 들었어?”
“전 문도가 모인다고 하더라. 장문인 주관으로 출정식을 연다고 들었다.”
“백이십 년 만에 다시 시작되는 탕마행이니 장문인께서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것 같아.”
“아무래도 그렇겠지.”
운여의 말에 운호가 수긍한다는 표시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운상이 나섰다.
“그런 건 딱 질색이야. 사람들 많은 데서 행사에 참석하는 건 내 취향 아냐.”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있어. 행사만 있으면 손들고 나서는 사람.”
“누구?”
“운몽 사형.”
“진짜?”
“그래. 성격은 꼬장꼬장한데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아주 날고 긴다니까. 연설을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입을 열면 청산유수다. 거기다가 행사 절차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어서 식전 준비는 거의 운몽 사형이 하곤 했어.”
“거참 특이하네.”
“그나저나 기분이 이상해. 삼 년 동안 점창산을 떠난다고 하니 허전해서 잠이 안 온다.”
“당연한 거 아냐? 태어나서 거의 여기서 살았는데 오죽하겠어. 그런 말 하는 거 보니 네가 아직 정상이긴 하다.”
“난 항상 정상이야, 인마.”
“흐흥.”
“어째 웃음소리가 운여를 닮아가냐.”
“친구니까.”
“지랄, 닮을 걸 닮아. 그런데 마두들 명부는 받았냐?”
“응. 어제. 방에 있다. 이따가 보여줄게.”
“귀찮으니까 그냥 말해. 몇 명이나 돼?”
“마흔셋.”
“뭐가 그렇게 많아?”
“많은 것도 많은 거지만 더 큰 문제는 명부에 있는 자들이 모두 대단한 놈이라는 거다. 백대고수 안에 든 자가 열 명이나 되고 지역의 패주급이 아홉이다. 나머지도 절정을 넘어선 고수이고.”
“농담하지 마.”
“내가 뭐 하러 농담을 하겠어. 정말이다.”
“이놈, 좋은가 보네. 왜 실실 웃어? 인마, 우리 셋이 그런 자들을 어떻게 잡아. 우리가 걔들을 잡는 게 아니라 걔들이 우릴 잡겠다. 그 명부 가지고 돌아다니면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하겠는데?”
“흐흐, 천하의 운상이가 겁먹은 모양이네.”
“겁먹은 게 아니라 황당해서 그런다. 나쁜 놈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세? 지금이 나쁜 놈들 전성시대냐?”
놀라긴 놀란 모양이다.
운상은 백대고수에 포함되는 마두가 열이라는 소리를 들은 이후로 잠시도 쉬지 않고 연신 떠들어댔다. 놀란 것은 운상만이 아닌 모양이다.
“설마 사문의 어른들께서 우리를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하려고 그런 건 아닐까? 말 안 듣는다고.”
“얼씨구, 넌 또 왜 그래? 운상이 하나만 가지고도 힘들어. 운여 넌 그냥 조용히 있어.”
“운상이가 한 말이 일리가 있잖아. 삼 년 만에 어떻게 명부에 있는 자들을 다 해결해. 말도 안 되는 얘기라니까. 더군다나 그렇게 강력한 무력을 가졌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다 잡으라는 거 아냐.”
“그건 또 뭔 소리야?”
“뭔 소리긴, 말 그대로지. 운학 사형께서 말씀하시길 우리한테 준 명부는 참고용이래. 사형들하고 십삼검이 해치우기 부담되는 자들을 따로 적어놓은 거라고 했다.”
“뭔 소린지 모르겠네. 그 말은 우리보고 잡으라는 거잖아. 뭔 말을 그렇게 빙빙 돌려서 해?”
“가능한 자만 처리하라신다. 절대 무리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현명하게 움직여 달라고 부탁하셨대.”
“누가?”
“장문인께서.”
“왜 우리한테는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지?”
“너 같으면 탕마행을 하라고 내려 보내면서 그런 소릴 할 수 있겠냐? 나쁜 놈과 만나더라도 강하면 도망가라는 말을 대놓고 할 수 있겠어? 그럴 때는 역시 전언이 제일 좋은 방법이지. 장문인께서는 역시 머리가 좋으셔.”
“하긴 그렇기도 하겠다.”
“잘된 거야. 우리한테 일임하셨으니 우리가 잘하면 돼. 어차피 하산해서 그놈들을 만나면 그냥 놔줄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 어떤 놈을 만나도 마찬가지야. 난 절대 두려워서 도망치는 짓은 안 할 테다.”
“운호 이놈아, 그 호전적인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또 광분을 해. 너 때문에 당한 상처를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는데 얼마나 지났다고 그래?”
“아직도 그 얘기야? 그럼 넌 멀리 떨어져서 다녀. 너 대신 운여하고 붙어 다닐 테니까.”
운상이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쳐들자 운호가 엉덩이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불안하다.
운상은 이 년 전 상처에 대한 기억이 생각날 때마다 운호의 등짝을 때렸다.
방금도 그런 전조가 보였기 때문에 즉시 거리를 확보한 후 운여를 쳐다봤다.
도와달라는 뜻인데 운여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싫어, 나도. 네 뒤 따라다니면서 칼 맞긴 싫다. 운상이 얘기 들어보니까 아주 죽다 살아났더군. 한참 새파란 청춘이 기껏 칼하고 놀아야겠어, 아름다운 여인들도 많은데? 나하고는 여인들 만날 때만 친하게 지내자고.”
출정식은 근래에 보기 드물게 성대히 치러졌다.
원시천존(元始天尊), 현천상제(玄天上帝:北極星), 문창제군(文昌帝君), 후토(后土), 서낭신(城隍神)에 대해 차례대로 전문도가 배례를 지낸 후 신부(神符), 옥결(玉訣:秘試), 영도(靈圖:鬼神像), 보록(譜錄) 등의 경전을 계율원주인 운청자가 낭송했다. 그 뒤로 장문인인 청현자와 장로들의 찬송(讚頌)이 이어졌는데 행사는 거의 반 시진이 되도록 계속되었다.
행사의 끝은 점창의 수장인 청현자가 출정하는 제자들에게 명경(明鏡)과 호부(護符)를 채워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명경과 호부는 요괴를 피할 수 있는 귀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것을 굳이 채워준 이유는 세상에 나가는 제자들의 무사 귀환을 염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당문과 약속한 장안평은 운남과 사천의 경계에 있는 들판이다.
시야가 완벽하게 확보된 광활한 들판이기 때문에 상대를 속이고 병력을 매복시킬 방법이 전무한 곳이다.
점창과 당문이 장안평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가장 커다란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서로는 서로에게 늑대이고 호랑이다.
이 년 전 사천혈투 당시 당문은 칠절문의 모사인 천수의 잔수에 넘어가 점창의 풍운대에게 꽤 많은 문도를 잃은 바가 있다.
그 보상으로 칠절문의 세력권을 고스란히 넘겨받았으나 점창에 대한 감정이 완벽하게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점창도 마찬가지였다. 피 흘려 싸운 결과물을 고스란히 넘겨주고 산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배경에는 당문이 있었다.
남의 싸움에 젓가락을 올려놓고 온갖 이득을 본 자들이다.
물론 협상을 했고 그 신의를 지키기 위해 물러났지만 점창은 피에 대한 대가를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사천에서 물러나야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껄끄러운 사이란 뜻이다.
그랬기에 암습에서 자유로운 장안평이 선정되었고, 참가 인원도 한정이 되었다.
장안평을 바라보는 청문자의 눈이 슬그머니 굳어져 갔다.
돈이 없어 제자들이 수련해야 하는 건물조차 다시 짓지 못하는 점창이다.
장문인은 그저 웃으며 손봐서 쓰면 된다고 말했지만 청문자는 그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아팠다.
모든 이득을 챙긴 당문. 그 이득의 반만 챙겼더라도 장문인의 고민은 단숨에 해결해 줄 수 있었을 것이란 자괴감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을 눈 아래로 지켜보던 당문주 당청의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칠비라고 했던가.
반드시 꺾어주마.
점창을 건드린 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이었는지 철저하게 확인시켜 줄 테다.
명자배 점창십삼검의 나이는 모두 서른을 넘었다.
수검인 명수의 나이는 서른여덟이고 제일 적은 명화조차 서른넷이니 풍운대보다 어린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운곡을 비롯해 풍운대에게 최대한의 존경을 표하며 따랐다.
사문의 항렬도 항렬이지만 이 년 전 황수전투와 양문전투에서 보여준 풍운대의 무력이 그들을 진정으로 감복시켰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은 풍운대의 등을 바라보며 기러기 날개 모양으로 서서 장안평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온 후 한 번도 풍운대의 앞으로 나서지 않았으니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충분히 알 만하다.
“우리가 너무 빨리 왔나?”
“미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빨리 온 건 아니다. 아무래도 이자들이 우릴 기다리게 할 모양이다.”
기다리기 지루했던지 운상이 슬그머니 입을 열자 운여의 눈매가 올라갔다.
약속된 시간에 오지 않는 당문의 행위가 괘씸하게 여겨진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도착한 지 일각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당문이 늦는다고 탓하기에는 일렀다. 그랬기에 운호는 그들과 달리 여유 있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것들이 사형들도 조용히 계시는구만 어디서 신경질을 부려? 차분히 기다려. 금방 오겠지.”
“어쭈, 너 당운영 소저 때문에 편들어주는 거냐?”
“갑자기 웬 뜬금없는 소릴 하고 그래?”
“그럼 뭐냐?”
“관두자. 내가 잘못했다.”
운상의 쌍심지에 운호가 말을 끊고 고개를 돌리자 대신 운여가 나섰다.
“흐흥, 당 소저가 올지도 모르겠네. 오면 좋을 텐데.”
“너희, 저쪽으로 좀 가라. 덥다.”
“싫다. 여자 얘기 할 때는 안 떨어진다니까!”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잖아. 사문의 명예를 걸고 비무를 한다는데 너희는 농담이 나와?”
“긴장 완화라는 말 못 들어봤어? 이럴 때는 이 악다물고 있는 것보다 농담하면서 긴장을 푸는 게 훨씬 좋은 거다. 뭘 알고 떠들어.”
“냅둬. 운호가 아직 세상 사는 법을 잘 몰라서 그래.”
“아우!”
운상과 운여가 돌아가면서 협공하자 운호의 입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그동안 지켜만 보던 사형들과 십삼검이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운호와 운상, 운여는 제일 끝 쪽에서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지만 운곡을 포함한 풍운대와 십삼검은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청문자도 마찬가지였다. 이야기를 들었는지 얼굴에 미소가 번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