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5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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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56화
전왕은 백마에서 몸을 날려 청무자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투레질을 하고 있던 백마는 주인이 사라진 줄도 모른 채 여전히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다리를 찼다.
말 역시 지금 황수에 잔뜩 끼어 있는 전운에 흥분했는지 주인이 명령만 내리면 뛰쳐나갈 기색이 완연했다.
하지만 주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찰나의 이동.
속도와 은밀함을 두고 말한다면 그야말로 발군(拔群).
황수를 지켜보던 수많은 눈동자 중 움직임을 알아본 자는 손가락으로 헤아릴 만큼 그의 신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했다.
말에서 내려 땅바닥을 딛고 선 전왕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세가 살아나 공간을 압축시켰다.
기파의 발현이 유형화되어 점창의 오행진에까지 영향권을 확대시켰으니 절대고수의 면모는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다.
하지만 그 기파는 청무자가 검을 뽑는 순간 현격하게 감소되며 후퇴했다.
마주 선 청무자의 몸에서 올올히 일어선 내력의 비늘이 전왕이 뿜어낸 기파를 밀어내며 팽팽하게 맞섰기 때문이다.
전왕의 얼굴이 변한 것은 청무자에 의해 자신의 기파가 범위를 축소하며 물러섰을 때다.
“눈으로 보고도 못 믿겠구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소?”
“오랜 세월을 개처럼 살았으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겠는가. 통한을 가진 자는 불가능한 일도 해내는 법이니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그렇구려. 그럼에도 진정 대단하오. 하지만 나를 상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오.”
“그대는 검을 뽑고 기다리는 내가 보이지 않느냐. 그만 떠들고 어서 오라!”
“푸하하하! 좋소, 아주 좋아. 그 정도는 돼야 칼질할 맛이 나지.”
진정으로 만족했을 때 떠오르는 환한 웃음이었다.
전왕은 웃음 속에서 자신의 애병인 파천도를 꺼내 청무자를 겨냥했다.
황수에서 벌어진 전왕과 청무자의 혈투가 시작된 것은 태양이 머리 위로 올라서는 오시 무렵이었다.
분지의 중앙에서는 전왕과 청무자의 대치가 끝나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굉렬한 격돌.
초식의 교환은 눈에 보이지 않았고 오직 엄청난 기파가 주위를 초토화시켰다.
절대고수들의 싸움은 보는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혀 시야를 확보하기 어렵게 만들고 정신마저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격돌에 운호의 눈이 부릅떠졌다.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다가가 그들이 펼치는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전왕의 선공이 신호가 되었는지 칠절문의 전 병력이 점창이 펼친 오행진을 향해 물밀듯 밀려오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운호와 운상의 위치는 마지막 오행진이 펼쳐져 있는 후미에서도 삼 장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산으로 들어서는 비탈이라 칠절문의 움직임이 한눈에 보였다.
“운호야, 어쩌지?”
운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긴 뭘 어째. 당연히 싸워야지.”
“나중에 혼날 텐데?”
“그게 무서우면 넌 여기 남고.”
“지랄.”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 사형들은 오행진의 수두라서 위치를 고수해야 돼. 다시 말하면 사형들은 방어 중심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는 뜻이야.”
“그거야 당연한 거잖아.”
“그렇지. 그래서 우리가 중요하다. 지금 이곳에서 공격형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사숙과 우리밖에 없는데 사숙이 전왕에게 묶였으니 우리만 남았다.”
“저 속으로 들어가자고?”
새까맣게 분지를 덮은 칠절문의 병력을 보며 운상이 인상을 구겼다.
선봉과 오행진이 격돌하기 시작하면서 칠절문의 후진은 방향을 틀며 포위 진형을 만드는 중이었다.
오백의 병력.
숫자로 따지면 다섯 배의 차이였다. 거기다 칠절문의 주력이 거의 모두 모였으니 절정고수의 숫자도 흘러넘쳤다.
그야말로 온통 칠절문의 병력으로 뒤덮인 상태인데 운호는 그런 병력 속으로 뛰어들자고 말하고 있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황당한 얘기.
그럼에도 운상은 인상만 구긴 채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운호의 얼굴만 쳐다봤다.
그 역시 이 싸움에서 해야 할 임무를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운호의 분석은 정확했다.
어차피 오행진 속에 있게 되면 그들은 사형들의 움직임을 방해하게 된다.
수두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순간 오행진마저 위험한 결과가 만들어질 것이 뻔하니 방법은 오직 공격뿐이었다.
운호는 운상이 말을 잇지 못하고 전장과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자 즉시 입을 열며 손가락을 들어 좌측을 가리켰다.
“보이지, 저기? 저놈들은 우리가 의빈 외곽에서 만났던 구룡단이다. 강력한 자들이지. 저들을 해치우지 않으면 운학 사형이 위험해져. 최대한 빠른 시간에 제압하고 붉은 옷 입은 자들 쪽으로 이동한다. 내 손가락 잘 봐. 거기 말고. 그래, 그 옆. 붉은 도객들을 잡으면 중앙으로 이동해서 저기 흰색 옷을 잡는다.”
“얼굴에 수염 난 놈?”
“그리고 그 옆의 영웅건. 해치워야 할 놈들이 많네. 역시 칠절문, 대단해.”
“쟤들이 누군데?”
“나도 모르지. 기파가 센 놈들만 고른 거니까.”
“얼씨구. 아주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저 정도 기파면 최소 단주급 이상이야. 한둘도 아니고 우리 둘이 무슨 수로 저 많은 놈을 잡아?”
“약한 놈 잡을 거면 뭐하러 가. 내 말 마저 들어. 시간 없으니까. 저자들 다음엔 우측으로 이동해서…….”
운호는 일일이 손가락으로 적진에 있는 자들의 면면을 짚으며 이동 경로를 설명했는데 마치 준비하고 있던 사람처럼 보였다.
열정적인 설명.
하지만 듣는 운상의 인상은 점점 일그러져 이제는 거의 우그러진 상태였다.
간단했다. 적들 중 절정고수들만 공격해서 제압하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쉬울 수 있겠는가.
아군은 하나도 없는 곳에서 적들의 수뇌를 습격하는 것은 자살을 하자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습격 후 이동 과정에서의 내력 소모를 최소화하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오행진으로의 회피 경로를 다섯 군데나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오행진이 모두 깨지지 않는 이상 쉽게 죽지는 않을 것이란 뜻이 된다.
“간다. 잘 따라잡아.”
운호는 흑룡검을 꺼내 들고 지체 없이 신형을 날려 좌측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황수의 분지는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져 곳곳에서 병기 소리와 함성 소리가 난무하고 있었다.
무림을 호령하는 자들의 충돌.
이곳에 모인 무인들은 칠절문의 최정예 병력이기 때문에 그들은 전위와 중위, 그리고 후위를 완벽하게 갈라 차륜전을 펼치며 점창의 오행진을 압박했다.
가장 효율적인 공격 전술이다.
그러나 점창의 오행진은 운풍이 선두가 된 수두들을 중심으로 완벽한 방어망을 형성한 채 칠절문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운호와 운상은 포위망의 좌방을 뚫고 곧장 후미를 관통해 운학을 노리고 있는 구룡단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네 명의 구룡단원은 운학을 협공하고 있었는데,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운학은 오행진의 엄호를 받으며 간신히 버텨내는 중이었다.
역시 칠절문의 암천 구룡단의 무력은 무서우리만치 강력해 절정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십삼검의 일인임에도 혼자의 힘으로 받아내기 어려웠다.
운호는 구룡단의 뒤쪽에서 후위를 형성하고 있는 선룡단을 박살 내며 무서운 속도로 전진했다.
일수 삼검.
그는 오늘 살귀가 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막는 자 죽는다. 검이 오면 검을 꺾었고 칼이 날면 칼을 부쉈다.
피의 향연.
그들의 검은 불과 일다경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십여 명을 척살하고 곧장 구룡단을 덮쳤다.
그야말로 쾌도난마(快刀亂麻).
뒤쪽에서 갑작스럽게 다가온 거대한 압력에 놀라 협공을 풀며 반격을 해왔으나 가장 후미에 있던 구룡단원이 운호의 분광에 당해 가슴이 반이나 잘린 채 뒤로 날려갔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시간과의 싸움이란 걸 너무나 잘 아는 운호는 뒤로 날아가는 사내의 신형을 그대로 따라붙었다. 그리고 우방에서 공격해 오는 구룡단원의 칼을 향해 칠검을 퍼부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우.
빛이 원이 되고 회전하며 돌고 돌아 칼과 부딪쳤다.
콰광!
충돌음은 언뜻 들으면 하나인 것 같았으나 무수한 여명이 뒤를 따르며 땅을 진동시켰다.
술에 취한 것처럼 다섯 발자국이나 후퇴한 구룡단원의 입에서 울컥하며 핏물이 흘러나왔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그가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내상은 치명적이다.
외상은 내력의 발현을 방해하지 않지만 내상은 내력의 운용을 방해해 본래의 무력 발현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비록 허리를 숙인 채 힘들어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대단한 자임에는 분명했다.
기습이란 확실한 이득을 가지고 공격했음에도 어느새 운호의 어께에서 핏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전장이 아니라면 힘겹게 자신을 노려보는 적을 향해 더 이상 검을 휘두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는 전장이었고, 전장은 인정을 남기지 않는 곳이다.
운호는 망설이지 않았다.
유운보를 펼쳐 미끄러지듯 사내를 향해 다가서며 분광을 펼쳤다.
확실하게 목숨을 거두는 것이 적에게 아량을 베푸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구룡단원은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발악적으로 칠도를 펼쳐 반격했다. 하지만 쏘아진 검기의 물결을 받아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꼬꾸라지듯 쓰러졌다.
둘을 잡았으니 둘이 남았다.
전장을 확인해 보니 운상이 청건을 쓴 자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우세를 점하고는 있으나 팽팽하게 맞서고 있어 금방 승부가 날 것 같지는 않았다.
운학을 공격하던 나머지 하나가 급히 뒤로 물러나 운호를 견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죽은 자들은 형제일 것이니 슬픔과 분노가 한꺼번에 담긴 그의 눈이 운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안다, 그 마음.
죽고 죽이는 전장은 분노가 강을 이루고 슬픔이 땅이 되어 모든 이의 가슴에 통한을 심어놓는다.
하지만 어이하리.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그대들도 여기에 오지 않았는가.
운호는 서슴없이 칼을 빼 든 채 다가오는 구룡단원을 향해 굳은 얼굴로 검을 겨눴다.
구룡단원의 분노가 담긴 얼굴이 일 장 앞으로 다가왔을 때 운호는 거침없이 사내를 향해 검을 뿌렸다.
좌방에서 시작된 검기의 물결이 사내의 전신을 휩쓸었다.
적정의 원리가 장착된 운호의 검은 은은한 뇌성을 울리며, 다가선 구룡단원의 칼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뜨거운 심장, 굳은 의지.
운호의 눈에 담긴 것은 사랑하는 사문과 형제들을 지키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운호야, 가자!”
어느새 구룡단원을 해치운 운상이 주변에 있는 선룡단 사이를 헤집고 있는 운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운상이 싸움을 끝내는 동안 운호는 포위망을 좁혀오는 선룡단원들을 쓰러뜨리며 사방을 휩쓸고 있었다.
운상은 구룡단원의 칼에 당했는지 옆구리와 허벅지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냉철함을 잊지 않고 운호를 제지했다.
그 짧은 시간에 구룡단을 셋이나 잡고 선룡단마저 헤집고 돌아오는 운호를, 운상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맞아들였다.
이제 운상은 운호가 무슨 짓을 해도 놀라지 않았다.
“운상, 그사이에 다친 거냐?”
“스친 거야. 크진 않다. 그런데 저쪽으로 가기에는 놈들이 너무 많다. 우회하는 게 어때?”
“오행진을 통과하자는 거지?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선룡단을 상대로 싸움을 계속할 수도 있으나 그러고 있기엔 전장의 상황이 녹록하지 않았다.
절정고수의 숫자가 많은 칠절문은 다수로 오행진의 수두들을 집중 공격하는 전략을 쓰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적들의 수뇌부를 잡아 사형들의 부담을 덜어줄 필요성이 있었다.
운호가 다음 상대로 노린 것은 좌방으로 이십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적색 도객들이었다.
바로 십오천강. 칠절문이 자랑하는 특수부대로, 상대하기 어려운 고수를 잡기 위해 키워졌다고 알려진 자들이다.
잠깐 사이에 이십여 명이나 피해를 입은 선룡단은 운호와 운상의 무력에 질려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쪽의 공격을 이끌던 구룡단원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운호의 압도적인 신위에 대적이 불가하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놀란 것은 선룡단의 도객들만이 아닌 모양이다.
오행진을 이끌던 운학은 거의 찢어질 듯한 눈으로 운호를 쳐다보며 경악성을 흘려냈는데 마치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