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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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55화
운호와 운상이 갑자기 나타나 인사를 하자 전막을 나서려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청무자까지 놀람을 숨기지 못한 채 눈을 부릅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출현.
목숨이 경각에 달할 정도로 커다란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이곳에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운호와 운상은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검은 무복이 희뿌옇게 변할 정도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상태였다.
그런 그들을 향해 청무자의 눈이 번뜩였다.
“어떻게 된 일이냐?”
“의빈에서 벗어나 자공에 있다가 칠절문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오는 길입니다.”
“누가?”
“개방이었습니다.”
“개방이 너희에게 정보를 줬단 말이냐?”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일이 끝나면 제대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흐음. 상처를 입었다 들었는데 괜찮은 게냐?”
“치료를 해서 많이 좋아졌습니다. 싸우는 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운상이 부정했으나 청무자는 그의 전신을 스윽 살핀 후 검미를 찡그렸다.
고수의 눈은 이처럼 예리하다.
상처가 미처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먼 거리를 전력으로 달려왔기 때문에 기의 흐름이 원활치 않았는데 청무자가 그것을 단박에 알아본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지만 나중에 해야겠다. 적들이 공격할 생각인 모양이니 너는 운호를 데리고 뒤쪽으로 빠져 있어라.”
“무슨 말씀이신지?”
“너는 다쳤고 운호는 전장에 참여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멀찍이 떨어져 있으란 말이다.”
“사숙, 저희는 싸울 수 있습니다.”
“두말하지 않게 하라. 너는 최대한 멀리 벗어나 운호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야 된다.”
청무자가 말을 끊자 그동안 조리 있게 대답하던 운상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청무자가 지체 없이 전막을 나섰기에 운상은 더 이상 어떤 말도 붙일 수가 없었다.
삼 대로 나뉜 점창부대에는 각 대에 십삼검 중 셋이 배치되었는데 그들의 임무는 오행진을 이끄는 수두 역할이었다.
즉, 다섯이 하나가 되는 오행진 사이에서 오행진의 약점을 보완하고 적의 예봉을 꺾어 위험을 감소시키는 것이 바로 수두의 임무였다.
점창무인들은 적들의 부대가 움직이며 서서히 압박해 들어오자 오행진을 가동시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적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선두에 선 것은 운풍이 수두로 있는 세 개의 오행진이었다.
차기 점창장문인으로 내정되어 있는 운풍은 분광과 회풍의 경지가 청무자에 육박할 만큼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있어 선봉 역할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오행진의 삼 보 앞에서 다가오는 적들을 바라보는 운풍의 기세는 산악을 연상시킬 만큼 장중했다.
운청은 천천히 다가오는 적을 바라보며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아마 긴장을 풀기 위한 것 같았다.
제일 끝에 있는 후미였기 때문에 적을 맞아들이는 것도 가장 늦다.
그는 고개를 바로 한 후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운상과 운호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내보였다.
아직 적과의 거리는 백 장이 넘기 때문에 시간상 여유는 남아 있는 상태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물론 떠나기 싫어하는 사제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나 떠날 사람은 떠나야 한다.
“운상! 얼른 가라. 사숙의 말씀이 옳다.”
“가긴 어딜 가란 말씀입니까. 저희만 살자고 도망갈 수는 없습니다.”
“다친 몸으로 무슨 싸움을 한단 말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워낙 먼 길을 달려오느라 기가 잠깐 흐트러졌는데 그것 때문에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지금은 괜찮지 않습니까. 싸우는 데 지장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만해라. 사숙께서는 너희가 다치는 걸 원하시지 않는다.”
“사형제가 모두 죽음을 앞에 두고 싸우는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못 갑니다.”
“가야 한다. 운호가 낙오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청문 사숙께서는 잠도 못 주무실 정도로 괴로워하셨다. 오죽하면 풍운대의 임무를 제쳐놓고 운호를 찾으라 명하셨겠느냐. 운호는 내공이 없으니 전장에 가담하는 순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그것은 청무 사숙도, 청문 사숙도 바라는 바가 아니다. 너는 운호가 무사할 수 있도록 보호해야 한단 말이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압니다. 하지만 사형, 운호는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어허, 그렇게 말해도!”
“사형, 마검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혹시 들으셨습니까?”
“들었다. 칠절의 동부 세력을 박살 냈다는 소문이 사천에 자자하게 퍼졌으니 어찌 못 들었겠느냐. 나는 네가 정말 자랑스러웠다.”
“자랑스럽다니요?”
“점창마검이란 명호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가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
“마검은 제가 아니라 운호란 말입니다!”
당운영과 당문혁은 점창과 칠절문의 무인들이 대치하고 있는 분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인추산의 능선에서 양 진영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안면을 벗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당문혁은 삼십 초반의 호남형 얼굴을 지닌 사내였다.
분지를 병풍처럼 두른 인추산의 능선 곳곳에는 수많은 무인이 전장의 추이를 지켜보며 싸움이 벌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추산만 그런 게 아니었다.
지천강을 따라 형성된 둑의 곳곳에도 수많은 무인이 숨을 죽인 채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강호에는 언제나 피를 부르는 싸움이 벌어지지만 이처럼 대규모의 전투는 최근 십여 년 동안 일어난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천하를 넘보며 한 지역을 호령하는 패주들의 대결이니 무림의 관심은 극에 달한 상태였다.
점창이 산에서 내려온 그 순간부터 천하의 이목은 양측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전격적인 칠절문의 공격에도 이처럼 많은 무림인이 둘의 격돌을 지켜보기 위해 황수로 몰려들 수 있었다.
싸움이 끝난 후 이득을 보기 위한 자도 분명 있겠지만 대부분의 무인은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황수로 온 자들.
그래서 그들을 사람들은 무인이라 부른다.
당운영은 칠절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긴장된 표정으로 당문혁을 쳐다봤다.
그녀의 눈은 긴장으로 인해 이미 축축이 젖어 있었다.
“오라버니, 여긴 너무 멀어서 잘 안 보여요. 조금 더 가까이 가요.”
“여기가 구경하기엔 최적의 장소다. 더 가까이 가면 자칫 싸움에 말려들 수도 있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가까이 가요. 정말 안 보여서 그래요.”
“허어, 어디로 가자는 말이냐?”
“저기요.”
당문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자 당운영이 즉시 손을 들어 한 지점을 가리켰다.
산자락에 툭하니 솟아 있는 작은 능선.
그야말로 분지와 거의 맞닿은 능선은 점창무인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장소였다.
그 능선에는 세 명의 황색 무복을 입은 무인이 분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칠절문이 이동을 시작하자 위험을 느꼈는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는 중이었다.
당운영은 말을 꺼내는 순간부터 이미 결정하고 있었는지 먼저 몸을 날려 그곳으로 향했다. 당문혁은 한숨을 몰아쉰 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신형을 날려야 했다.
어차피 끝장을 보기로 했으니 미련을 둘 이유가 없었다. 전왕은 부대를 움직여 분지로 들어섰다.
분지의 안쪽 오십 장에 펼쳐진 오행연환진을 확인한 전왕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오행연환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하나의 거대한 검을 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대단했다. 그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신음성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점창.
백여 년간 끝없이 쇠퇴의 길을 걸어온 문파.
천하에는 삼십팔무맥이 있으나 세상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그중 하나를 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점창이었다.
천하를 분할하고 있는 거대 문파들은 세를 불리기 위해 문도의 숫자를 늘려왔으나 점창은 끝없이 세가 축소되어 본산 제자의 숫자가 삼백에도 못 미치는 상태였다. 속가의 숫자 역시 다른 문파에 비해 보잘것없는 수준에 머물렀다.
오죽했으면 다른 명문들이 한때 천하제일이라고 추앙했던 점창을 구대문파의 지위에서 끌어내렸을까.
그랬기에 운남 공략을 결행했다.
칠절문의 세력은 삼십팔무맥의 상위권은 아니었으나 점창 정도는 쉽게 굴복시킬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모두 죽일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쇄락할 대로 쇄락한 문파를 치는 것은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트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점창이 머리를 숙이고 양보한다면 운남의 알짜만 차지하고 나머지는 먹고살 만큼 떼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점창은 예상 범위를 계속해서 벗어났다.
고개를 숙이지 않은 건 둘째치고 말도 안 되는 무력을 선보이며 칠절문을 압박해 사천의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뭔가의 계기가 점창을 새롭게 만든 것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날 생각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천수에게 말한 것처럼 죽기 전에 무인으로서의 야망과 의지를 세상에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유리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칠절문의 무인들은 사천 곳곳에서 계속 몰려드는 중이다.
통발을 돌리고 출발했기 때문에 뒤늦게 부대들이 속속 도착해 합류하고 있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 사백이었던 병력의 숫자는 어느새 오백으로 늘어났고, 흩어져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단주급 고수도 다섯이나 합류했다.
그럼에도 전왕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자공으로 갔던 삼절과 십오천강이 도착하자 미련 없이 공격을 위해 진형을 움직였다.
지천강과 인추산에서 전장을 지켜보는 군웅들에게 조금이라도 비겁한 모습은 보여주기 싫었다.
청무자는 다가서는 적들을 바라보며 혀를 꺼내 입술을 적셨다.
아무리 철의 심장을 가진 그라도 긴장감을 털어내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백마를 타고 오는 무인.
바로 사천의 서부를 완벽하게 틀어쥔 칠절문의 주인이자 무림십왕 중의 일인인 전왕 혁기명이다.
일인문파의 위력을 지닌 절대고수.
세상에 알려진 그의 무림 서열은 육십칠 위였고, 극성으로 익힌 뇌진도법은 천지를 개벽할 만큼 강한 위력을 지닌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완벽하게 기세를 풀어내며 수많은 병력과 함께 다가서는 전왕을 청무자는 분지의 끝에 홀로 서서 맞아들였다.
그의 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전왕, 잘 왔다.”
“그대는?”
“청무.”
“청문이 아니라 청무였구려. 청문자께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오?”
“워낙 먼 길이라서 조금 늦는 것 같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너무 일찍 왔구려.”
“크크크.”
전왕의 대답에 청무자의 입에서 기괴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청무자가 세 살이나 많기 때문에 말을 올려주고 있었으나 전왕은 대놓고 그를 무시하고 있었다.
청무자의 기괴한 웃음은 전왕의 행동에 자극받았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전왕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한동안 계속되던 청무자의 웃음이 끝났을 때였다.
“도절이 당하고 와서 그러더군요. 검이 꽤나 무서웠다고. 왜 살려주었소?”
“그자는 전하라는 말도 제대로 전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내가 이렇게 말했다. 칠절문을 어떻게 때려잡는지 구경이나 하다 죽으라고. 결코 불쌍해서 보내준 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
“푸하하하! 예전부터 청무자가 간덩이가 잔뜩 부었다는 소릴 들었는데 지금 보니 소문보다 훨씬 더하구려. 도절 정도 잡은 게 그렇게 자랑스러웠소?”
“자랑은 무슨, 자랑을 하려면 전왕 정도는 잡아야지. 내가 널 잡고 사천 전역에 떠든다면 아마 그것이 자랑일 것이다.”
“점창이 날 원망하겠구려. 당신을 죽이고 청문자마저 죽이면 점창의 청자배는 대가 끊기게 될 테니.”
“크하하! 전왕의 실력은 귀가 따갑게 들었다. 하지만 그 정도 가지고 점창을 어쩔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충분하고도 남소.”
“개소리하지 마! 지금 네 자신감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 내가 보여주마.”
“나와의 대결을 원하오?”
“그렇다.”
“그렇지 않아도 도절의 원수를 갚아주고 싶었소. 늙어빠진 노인네를 죽이는 게 맘에 걸리기는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전왕의 이름으로 멋지게 보내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