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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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47화
운상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누구냐, 저 거지는?”
“개방.”
“개방이 왜?”
“사형들 소식을 들으려고 갔다가 만났지. 그때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더니 이젠 찾아와서까지 정보를 주는군.”
“나는 도대체 저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 황룡단은 그렇다 치고 선룡단, 구룡단 이놈들은 또 뭐냐? 왜 널 잡으려고 그놈들이 전부 몰려온다는 거지?”
“말했잖아. 내가 황룡단 놈들하고 싸웠다고. 그랬더니 지원군이 오는 모양이다.”
“거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말 돼, 인마. 내가 황룡단 반을 작살냈거든. 그래도 그렇지 지원군까지 오다니. 점점 일이 커지네.”
운호가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긁적거리자 운상이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창피해서 그냥 해본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계속해서 거짓말을 멈추지 않는다.
이럴 때는 어떡해야 하지?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워낙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어 불시에 주먹을 날렸다가는 그대로 드러누운 채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타이르듯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운호야, 그럼 저 거지가 하는 말이 사실이란 거냐?”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지금 가겠다는 거야. 그 몸으로?”
“그러니까 가야지. 몸이 다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무더기로 덤비는 놈들하고 싸울 필요 없잖아.”
운호가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챙기자 운상도 엉거주춤 일어섰다.
정말 이 밤에 길을 떠날 태세다.
“야, 너 정말 왜 그래?”
“운상아, 일단 가자.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줄게.”
“무슨 얘기?”
“황룡단하고 싸운 이야기. 꽤 재밌을 거다.”
“미치겠네.”
구룡단주 양무기는 달빛 아래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물은 달빛과 별빛이 반사되어 마치 보석처럼 아름답게 빛이 났다.
천계에 흐른다는 천상천의 모습이 이러할까.
강은 너무도 아름다워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양무기는 문득 생각난 듯 감상을 멈추고 옆에 있는 부단주 수진방을 바라봤다.
“정말 올까?”
“어차피 밤이라서 찾기 어렵습니다. 이슬 맞고 돌아다니는 것도 못할 짓이니 속는 셈치고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말이야, 만약 그놈이 정말로 온다면 나중에 알아봐야겠어. 그 새끼들이 왜 우리한테 놈에 대한 정보를 주었는지.”
“뭔가 얻어먹을 게 있었겠죠.”
“그놈들 특성이 얻어먹는 거니까 그건 당연한 건데, 문제는 대책 없이 큰 걸 달라고 할 수도 있어서 말이야.”
“큰 거라면 어떤 걸?”
“운남.”
“콩고물을 내놓으란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다.”
“왜 안 돼. 그놈들 근거지가 어딘지 몰라?”
“귀주가 운남과 붙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깟 정보 제공 정도로 빈대를 붙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놈들이 실성해서 욕심이 배 밖으로 나왔다면 모를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정보 제공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면?”
“점창과의 싸움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겠어?”
“천하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자들을 다 모은다면 가능도 하겠습니다.”
“상상이 너무 많이 나간 것 같지?”
“그럼요.”
“하긴. 그런데 생각할수록 이상하게 찜찜하단 말이야. 이 새끼들 하는 짓을 보면 꼭 뭔가 있는 것 같단 말이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다리기 지루해서 그런가. 자꾸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게 되는구만.”
“잠깐 눈 좀 붙이시지요. 놈들이 나타나면 깨우겠습니다. 아니, 그러실 필요 없을 것 같군요.”
강을 바라보는 쪽에 앉아 있던 수진방이 엉덩이를 비틀며 슬그머니 어깨를 가라앉혔다.
강을 건너는 두 개의 인영.
달빛이 좋은 밤임에도 그저 시꺼멓게 보이는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강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이거 달밤에 체조하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이냐. 한밤에 강이나 건너고.”
“그놈 참 말 많네. 가기로 했으면 그만 불퉁거려.”
“넌 인마,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서 그래. 널 찾느라고 정말 한숨도 못 쉬고 뛰어다녔어. 지금 피곤해서 펄쩍 뛸 지경이라니까.”
“자고 싶어?”
“응. 이불만 있으면 물을 침대 삼아 그냥 드러눕고 싶다.”
“조금만 참아. 여기서 한 시진만 가면 자공이 나온다. 일단 거기까지만 가면 쉴 수 있을 거다.”
“좋아, 그건 그렇고. 말해봐. 내공도 없는 놈이 어떻게 싸웠다는 거냐?”
“나, 내공 있어. 그것도 꽤.”
“이 자식이 또 거짓말일세.”
“진짜야. 사실 내공은 오래전부터 있었어.”
그동안 천룡무상심법을 익히던 과정을 하나씩 얘기해 나가자 운상의 입이 벌어졌다.
뇌호혈이 깨지면서 고통이 사라졌다는 말을 들은 후에는 한동안 대꾸를 하지 못했다.
유령단과 황룡단과의 전투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는 긴장 때문인지 마른기침만 토해냈다.
믿기지 않은 사실.
정말 방금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운호는 풍운대의 그 누구보다 강하다는 뜻이 된다.
혼자서 사문두저진을 격파했다는 대목에서는 전율이 일어 침조차 삼키지 못했다.
말로만 들어도 엄청난 기문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문진을 혼자 힘으로 박살 내고 황룡단을 반수나 잡았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내공이 회복된 기념으로 황룡단한테 네가 얼마나 강한지 시험해 본 거냐?”
“그래서 싸운 거 아니야.”
“그럼?”
“내가 풍운대니까. 풍운대의 목적은 적진의 후방을 교란하는 거잖아.”
“장하다. 미친놈.”
운호의 등짝을 힘차게 내려친 운상의 얼굴에 밝은 웃음이 피어났다.
같은 마음, 같은 의지.
점창이란 이름 아래 동문이 되었고 친구가 되었으니 운호의 마음이 곧 자신의 마음이다.
그랬기에 운상은 운호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웃으면서 강을 건넜다.
친구와 함께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거기에 덧붙여 운호가 강해졌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뻐 운상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강을 건너 갈대숲을 지났을 때 그들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기세를 가진 자들이 전면을 막은 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저놈들은?”
“우릴 기다리고 있는 것 같군.”
“우리가 이쪽으로 온다는 걸 알았단 말이지. 이거 냄새가 나는데? 운호야, 그 새끼 작품 같지 않아?”
“누구? 개방?”
“그 거지,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어. 몸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만큼이나.”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기도 하네.”
“언제부터 개방이 사람 파는 장사를 한 거냐. 생각할수록 웃긴 새끼일세.”
새삼 간단한 술수에 속은 게 억울했는지 운상이 주먹을 쓰다듬었다.
눈앞에 있으면 한 대 팰 기세다.
하지만 현실에는 거지 대신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내는 도객들이 서 있을 뿐이다.
“쉽지 않아 보이는데 어쩌지?”
“어쩌긴, 싸워야지.”
“나는 그냥 튀었으면 좋겠다. 너도 많이 다쳤고.”
“내 몸은 괜찮아. 그리고 막상 만나고 나니까 도망가기 싫어졌다. 눈앞에 적이 보이니 전의가 솟구쳐.”
“너 언제부터 그렇게 호전적으로 변했냐?”
“변한 게 아니라 원래 전투적이야. 그동안 쭉 봐왔으면서 아직도 몰라? 쯧쯧. 싸우다가 정 안 되겠으면 그때 튀자. 저놈들, 정말 강해 보이긴 하네.”
“그러니까 그냥 가자니까. 지금 튀는 거랑 몇 대 얻어맞고 튀는 거랑 뭐가 달라?”
“다르지. 싸우다 도망가는 건 전술적 후퇴라는 거고,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는 건 비겁한 거다.”
“캬, 명언이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대? 이제 보니 천잴세.”
“운문에 있는 책을 모두 읽은 사람이 나다. 너보다는 훨씬 유식하지. 일단 내가 먼저 놈의 수장하고 한판 뜰 테니까 잠깐 기다려. 그런 다음에 중간을 기준으로 해서 이쪽은 내가, 저쪽은 네가 해.”
운호가 웃으며 도객들의 중앙을 가리켜 좌우로 나누자 운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이 아무리 강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분광과 회풍이 몸에 장착된 이후 한 번도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양무기가 선두에서 구룡단을 끌고 중앙으로 다가서자 운상의 얼굴이 슬며시 굳어졌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의 압박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운호와 운상이 다가가자 구룡단이 반원 형태로 감싸듯 다가왔다.
그들 역시 운호와 운상의 기세가 만만치 않음을 느꼈는지 한 올의 빈틈도 내보이지 않았다.
“하나가 아니고 둘이네? 점창인가?”
“너희는?”
“우린 구룡단이다.”
“어쩐지 대단하다 했어. 들어봤다. 구룡단. 어떤 거지가 말해주더군.”
“세상에 거지가 많긴 하지. 하지만 우릴 아는 자는 많지 않은데 어떤 거진지 궁금하구나.”
“이름을 물어볼 걸 그랬나? 하긴, 난 거지는 이름이 없는 줄 알았으니 물어볼 생각도 못했겠다.”
“하하하, 재밌는 놈이구나.”
“재밌다니 다행이다.”
“누가 운호냐?”
“나다.”
“그럴 것 같았다. 서신이 왔더라. 널 죽이라고.”
“누가 보낸 건데?”
“우리 총사가.”
“날 막으면 네가 죽는다는 건 안 쓰여 있었어?”
“재밌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 놈일세.”
“조금 이따가는 다르게 불러야 될 거다. 무서운 분이라고.”
“크크크, 뚜껑 열리게 하는 재주도 있는 놈이네.”
“왜, 거짓말 같아?”
“나와 붙어보자는 말이냐?”
“겁나면 안 해도 돼.”
운호가 턱을 치켜들고 도발하자 양무기의 얼굴에서 잔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룻강아지는 저가 죽을지도 모르고 호랑이 앞에서 짖기도 한다.
양무기의 눈에는 운호가 꼭 그 하룻강아지로 보였다.
“네가 황룡단의 반을 쓸었다는 소릴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구나. 좋다, 내가 상대해 주마.”
두 사람이 공터의 중앙으로 나서자 나머지가 뒤로 물러나 공간을 확보해 주었다.
구룡단도 그렇고 운상도 그렇고 만류할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운상이야 오면서 미리 말을 맞춘 것이 있으니 그렇다 쳐도 구룡단 역시 자신들의 숫자가 많다는 유리함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표정이다.
그들이 자신의 단주인 양무기를 전적으로 믿고 있다는 뜻이고, 그가 그들의 믿음만큼이나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도 했다.
달빛에 잠긴 갈대밭이 문득 불어온 바람에 수초처럼 흔들렸다.
그 사이에 마주 선 두 사람이 천천히 자신의 병기를 꺼내 들었다.
전왕 혁기명의 독문 무공은 뇌진도법(雷震刀法)이다.
도법의 특성상 중병으로 분류되는 귀두도(鬼頭刀)를 쓰는데, 그 위력이 절정에 도달하면 집채만 한 바위를 가루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양무기는 전왕의 수제자로 이십 년 동안 뇌진도법(雷震刀法)을 익혔고 그 성취가 구성에 달했다.
비록 뇌진도법을 극성으로 익히지는 못했으나 그 정도만 가지고도 양무기는 칠대주력부대의 단주들을 제압할 만큼 강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칠절문의 차기 후계자로 거론되는 절정의 무인인 것이다.
전왕은 능력과 무력이 뛰어난 자에게 칠절문을 물려주겠다고 공언했으니 사천무림은 당연히 양무기가 칠절문의 차기 주인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문 내 칠대주력부대의 단주들과 호법들마저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만큼 그의 무력은 강했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성품 또한 남달랐다.
바람이 귀를 간질이고 돌고 돌아 옷깃 사이로 흐른 후 갈대밭을 흔들며 지나갔다.
흔들리는 갈대밭은 물결에 흔들리는 수초 같았다.
달빛은 갈대밭을 반사시켜 자욱한 안개가 흐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황홀한 광경.
서로에게 적의를 품고 대치하는 무인들만 아니라면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로 보일 지경이다.
그 속에 운호와 양무기가 마주 섰다.
두 사람은 삼 장을 격한 뒤 병기를 내려뜨린 채 서로의 시선을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고수들 간의 교감.
말을 하지 않았을 뿐 그들은 서로의 기세를 통해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양무기였다.
양무기가 칼을 천천히 가슴으로 끌어당기자 그에 맞추어 운호가 흑룡검을 진격세로 만들며 왼발을 일 보 앞으로 밀어냈다.
개전(開戰).
칠절문이 자랑하는 구룡단과 두 명의 풍운대가 혈투를 벌인 동강벌전투는 그렇게 운호의 섬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