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44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44화
아무것도 없던 땅에서 뭔가 슬금슬금 움직이더니 사람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의빈의 개방분타주 황만과 왕일이었는데, 손에는 황색의 천이 들려 있었다.
황포은막(黃布銀幕).
정보를 생명처럼 다루는 개방에서 분타주 이상에게만 나누어준 지급품으로, 잠입과 비상시 은닉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는 물건이다.
“보고해야겠죠?”
“당연히.”
“점창에 검귀가 나타났다고 하면 믿을까요?”
왕일이 빤히 바라보며 묻자 황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결과가 나타날 거란 건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의빈 전투에서 포위망을 뚫고 도주할 때 보여준 운호의 무력은 놀라운 것이었으나 황룡단을 따라 뒤늦게 도착한 송추의 상황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빠르게 지형을 이용해서 땅을 파고 황포은막을 덮은 후에야 운호와 엽문의 대결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절정에 달한 고수들의 싸움.
사천을 들었다 놨다 할 정도의 고수로 알려진 엽문의 검이 운호의 검을 꺾지 못한 채 물러서는 걸 확인한 순간, 황만은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흥분을 느꼈다.
하지만 진짜 충격은 그다음이었다.
들은 것보다 훨씬 대단했던 사문두저진의 압박과 위력도 결국 운호를 어쩌지 못한 채 무수한 사상자가 생겼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차오르는 전율로 인해 온몸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 동안 개방의 정보 담당자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대소 전투를 눈으로 봐왔지만 이런 전투는 그의 삶에서 단연코 처음이었다.
절정을 뛰어넘는 무력을 가진 검객의 출현.
운호의 무력은 자신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서 앞으로의 일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일단 있는 사실 그대로 보고하자.”
“신통께서 길길이 뛰시며 우릴 죽이려고 할 텐데요.”
“정 궁금하면 직접 보러 오시겠지.”
“정말로 보냅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사천 전투가 점점 재밌어진다. 점창이 우리 대신 칠절문을 잡아줄 수도 있겠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당문까지 끼어들었으니 쉽지 않을 겁니다.”
“안 되면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지. 그자를 잘만 이용하면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도 있을 것 같아. 칠절문의 최대 약점은 후방이지. 후방이 괴로워지고 점창이 당문만 해결한다면 칠절문은 반드시 고꾸라진다. 그리 되면 사천과 운남은 저절로 우리 수중에 떨어질 수 있어.”
말을 하는 와중에 황만의 눈빛이 번쩍번쩍 빛났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를 왕일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일의 입이 열린 것은 황룡단이 사상자를 수습하고 다시 대오를 정돈할 때였다.
“황룡단의 추격대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비각은?”
“걔들은 아까 출발했습니다.”
“아마 보고가 올라가면 본단이 발칵 뒤집힐 거야. 만약 내 생각대로 진행된다면 우리의 과업을 최소 삼 년은 당길 수 있다.”
“생각지도 않게 큰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 사는 게 원래 그래. 재미로 시작해 목숨까지 거는 일이 뭐 한두 개겠어? 특히 이번 일은 값어치가 충분하고도 남아.”
“하지만 아무리 강해도 저렇게 혼자 다니면 저놈은 곧 죽게 될 겁니다.”
“우리가 도와주면 꽤 버틸 거다.”
비각삼대주 정풍은 운호를 따르며 혀로 입술을 열심히 축였다.
마음 같아서는 물이라도 마음껏 마시고 싶었으나 운호가 지속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럴 여유를 만들지 못했다.
사람이란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확실했다.
처음에는 두려움으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자 두려움 대신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풍은 싸움이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운호를 미행해 왔다.
은밀하게 행동하는 운호를 보고 요인 암살을 위해 들어온 자라고 확신했다.
그랬기에 문의 수뇌부에 지급으로 전서를 띄웠으나 놈은 그런 자신의 판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정면 대결을 펼치며 의빈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문의 문책보다 더 괴로운 건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황룡단주 엽문과 맞상대할 만큼 무력이 뛰어나다는 건 인정하겠으나 그렇다고 혼자서 칠절문을 전부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놈은 당당하게 싸우겠다고 했으며, 스스로 그 말을 지켰다.
더욱 미치고 펄쩍 뛰는 건 그가 또다시 의빈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뭐가 있기에 의빈을 떠나지 못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록 황룡단이 당했다고는 하나 전멸한 것은 아니었고, 더군다나 엽문과 수뇌부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송추 전투에 대해 전서가 날았으니 곧이어 본단에서 새로운 조치도 내려올 터였다.
의빈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음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 가는 것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운호는 멀리 있는 의빈을 바라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어둠이 지며 도시는 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온몸은 피로 물들었고, 옷은 넝마처럼 찢겨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이다.
등짐을 풀고 당운영이 준 활인고를 꺼냈다.
그녀는 운호가 길을 떠난다고 하자 비상으로 가지고 있던 활인고를 아낌없이 주었다.
대부분의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아 이미 피가 멎어 있었지만 우측 어깨와 허벅지에 난 상처는 제법 컸다. 살이 벌어진 채 움직일 때마다 피가 찔끔거리며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옷을 모두 벗고 상처마다 꼼꼼하게 활인고를 발랐다.
싸움이 끝난 게 아니란 걸 너무나 잘 알기에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급했다.
등짐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은 운호는 즉시 가부좌를 틀고 천룡무상심법을 운용했다.
천룡무상심법의 뛰어난 효능 중의 하나는 다른 심법들과 다르게 언제든지 심법 운용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제 어느 때고 위험이 감지되면 즉시 기운을 회수하고 대처가 가능했다.
그랬기에 운호는 적이 추격하는 상황에서도 천룡무상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천천히 발현되기 시작한 황금빛 안개가 운호의 온몸을 은은하게 감싸며 피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밝아지더니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운호가 눈을 뜬 것은 황금빛 안개가 사라지고 채 다섯 호흡이 지나지 않았을 때다.
운호는 짐을 정리하고 지체 없이 의빈을 향해 유운신법을 발휘하다 급작스럽게 방향을 틀었다.
의빈이 칠절문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도시라 해도 불과 두 시진 만에 찾아내서 포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행적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는 건데, 그것은 곧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심법을 운용하면서 사방으로 기를 퍼뜨리자 미세한 호흡이 느껴졌다.
숫자는 넷.
둘은 좌측 십 장 거리에 있고, 나머지 둘은 우측 십 장 거리에 은닉해 있다.
도대체 지금까지 미행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가 뭘까?
분명 유령이대가 미행했을 때는 오감이 경고음을 울렸는데 이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시간으로 따져 봐도 꽤 오래 자신을 미행한 것 같은데 이제야 눈치를 채다니 새삼 얼굴이 붉어졌다.
경험 부족이다.
유령이대는 자신을 얕보고 기세를 숨기지 않은 채 따랐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었지만 지금 따르고 있는 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철저한 훈련을 받은 자들임이 분명했다.
우측으로 방향을 튼 운호는 달리면서 흑룡검을 꺼내 들었다.
단 일격에 해치우고 나머지를 잡아야 일이 쉬워진다.
어둠이 찾아온 지 꽤 되었으나 사물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어느새 뜬 만월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운호는 검은 야행복을 입은 채 정신없이 신형을 날리는 비객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 낼 수 있었다.
자신이 급작스럽게 움직이자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측으로 반원을 그리며 돌았기 때문에 비객들을 만난 것은 그들의 측면이었다.
정체를 몰랐으면 모를까, 안 이상 비객들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유운신법으로 비객들 사이를 스쳐 지난 운호의 검이 그들의 심장을 갈랐다.
워낙 빠른 기습이라 공격해 오는 것조차 알지 못했으니 고통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비각삼대주 정풍은 운호가 급작스럽게 움직이자 은신처에서 일어나 신형을 날렸다.
비각대원들이 익힌 천조련은 은밀함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뛰어난 추적 신법이었다. 전력으로 달렸어도 아무런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좌측을 맡은 조원은 자신보다 이 장 앞쪽에서 달리는 중이다.
이백여 장을 전진하던 정풍이 신형을 정지시킨 채 몸을 땅 속으로 묻은 것은 운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워낙 뛰어난 신법 때문에 운호를 놓친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오랫동안 시야에서 벗어난 적은 없었다.
조원은 자신이 멈춘 것도 모르고 여전히 달리는 중이다.
정풍은 숨마저 멈춘 채 천천히 주변을 살펴 나갔다.
슬금슬금 시작된 불안감이 점차 커지더니 전신을 집어삼켜 움직임을 제어했다.
다른 자들보다 먼저 대주의 자리에 오른 것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남들보다 뛰어난 머리와 직관력 때문이다.
위험에 대한 타고난 본능은 정보 업무를 담당하는 그의 목숨을 여러 차례 구해주었고, 그것은 곧 탁월한 업무 수행 능력으로 직결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 본능이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맹렬한 경고를 하고 있었다.
‘아!’
천천히 주변을 살피던 그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보였다. 우측에서 한 마리 독수리처럼 날아오는 어두운 신형이.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형체만으로 사문두저진을 파괴한 자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앞서 달리던 조원은 그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오직 앞만 보고 움직이고 있었다.
단 일 검에 조원이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마치 사물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조원은 한참을 서 있다가 천천히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정풍은 조원이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눈을 감고 여간해서는 쓰지 않는 귀식대법을 펼쳤다.
귀식대법은 쓰게 되면 깨어난 후 거의 열흘 동안 앓아누워야 될 정도로 기력 손상이 상당했다. 웬만한 위기가 아니라면 쓰지 않지만 정풍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땅 속으로 파고들었다.
기력이 상하는 것보다 목숨을 구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천수는 방 안을 가득 메운 난초를 정성스럽게 닦다가 급히 들어오는 비각주를 향해 가볍게 혀를 찼다.
조용한 저녁.
웬만해서는 찾아오지 않을 시간에 비각주가 나타났다는 것은 꽤나 큰일이 터졌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천수는 그걸 알면서도 타박부터 했다.
“쯧쯧. 어찌 그리 급한 겐가, 조심하지 않고?”
“총사,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닙니다.”
“천하의 비각주를 이리 허둥거리게 만들다니 뭔지 궁금해지는군. 그래도 일단 앉아.”
천수가 먼저 자리를 잡자 비각주는 반대쪽에 급히 앉으며 입부터 열었다.
“당문 쪽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청문자가 용화에 갔다면서?”
“간 것은 맞는데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청문자가 당추와 함께 간양(簡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혼자 말이냐?”
“그렇습니다.”
“나머지는?”
“용화에 남아 있습니다.”
“음…….”
비각주의 대답을 들은 천수의 양손이 깍지를 만들었다. 그런 후 엄지손가락을 가볍게 부딪치며 한동안 입을 닫아버렸다.
천고의 기재 천수가 생각에 잠길 때 늘 하는 버릇이다.
미추에서 용화를 잇는 길을 따라 풍운대는 수많은 당문 무인을 베었다.
처음에는 비각을 동원해 일부러 소문을 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소문은 사실이 되었고,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중이다.
명예를 흠집 내는 작전은 거의 완벽하게 들어맞아 당문과 점창은 이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상태였다.
청문자의 용화 진출은 이 작전의 백미였다.
수많은 고민 끝에 만들어진 작전은 시간과 장소, 여건이 모두 완벽하게 맞아들어 청문자를 용화로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청문자가 용화로 진출한 이상 두 문파의 싸움은 점입가경으로 치닫게 될 터였다.
그런데 간양으로 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