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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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43화
엽문의 손이 올라가자 황룡단이 사방위를 완벽하게 제압한 채 다가왔다.
언제 왔을까?
아마 엽문과의 싸움에 몰입해 있을 때 은밀하게 다가와 포위하고 있던 모양이다.
“끝까지 비겁하구려.”
“뭐, 그렇게 됐다. 네가 워낙 강하고 빨라 어쩔 수가 없었다.”
“아쉽소.”
“뭐가?”
“당신의 삼두홍을 아직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끝내게 돼서 말이오.”
“그것까지 알고 있었느냐?”
운호의 말에 엽문의 얼굴에서 웃음이 슬쩍 지워졌다.
삼두홍이란 벽사검법의 마지막 초식을 일컫는다.
강호에 나와 딱 두 번밖에 쓰지 않은 초식.
마지막으로 쓴 것이 십이 년 전이었으니 아직 새파랗게 젊은 운호가 삼두홍을 알고 있는 것은 의외였다.
하지만 칠절문을 부수고자 하는 점창의 의지는 상상한 것보다 훨씬 치열했다는 걸 그는 몰랐다.
“아쉬워도 참아라. 대신 더 좋은 것을 보여주마.”
“그게 뭐요?”
“사문두저진(四門斗底陳)이다.”
“저들이 지금 펼치고 있는 걸 말하는 것이오?”
운호가 황룡단원들을 가리키자 엽문이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천천히 석송이 있는 곳까지 물러났다.
“네 무력이 대단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황룡단의 사문두저진을 뚫지는 못한다. 내가 끝까지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팔다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구나. 더군다나 여기저기 상처를 입어서 쑤시기도 하고. 하여간 오늘 무척이나 즐거웠다. 석송!”
“예, 단주님.”
“시작해!”
엽문이 진 밖으로 완전히 물러선 것을 확인한 석송이 풍멸대의 중앙에 자리를 잡으며 소리 질렀다.
“개진!”
사방위를 장악한 황룡단의 자세가 변하며 인의 장막을 형성시켰다.
사문두저진은 대오를 밀집하여 끊어지지 않게 만드는 수진(數陣)으로서, 사문에 병기의 효용을 더해 그 무서움을 몇 배 가중시킨 절진이다.
좌측에 포진한 수룡대의 손에 들린 것은 오문 중에 가장 악독하다는 뇌정추였고, 전면의 독전대는 강철방패와 쇄겸도를 갖췄다.
반면 우측의 풍멸대는 강창으로 무장했고, 후미의 풍마대는 탄궁과 수리도를 지녔다.
근접 공격과 원거리 공격을 모두 가능케 하는 무기들이 골고루 혼재되어 포위된 적을 주살하는 데 최적의 구성을 갖추니, 포위된 자는 끝없이 방어만 하다가 결국은 목숨을 잃는다.
상대하기 힘든 절정고수를 잡기 위해 만들어진 절진.
최악의 상황에 빠졌으나 운호는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온몸을 척척하게 적셨고, 백여 명의 적으로 둘러싸인 채 철저하게 고립되었으나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검을 치켜세울 뿐이다.
하지만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한 상태였다.
엽문과의 대결에서 팔성의 공력만 꺼냈음에도 대등한 싸움을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분광과 회풍은 꺼내지도 않았으니 끝장을 봤다면 충분히 엽문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사문두저진은 그런 자신감을 일거에 날릴 만큼 강력한 압박을 가해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포위망을 뚫는 것이 중요했다.
운호는 좌측을 향해 뛰어올랐다.
포위망을 뚫고 나가려면 창천 가지고는 안 된다는 판단에 단호히 분광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운호는 검을 마저 뿌리지 못하고 분광에서 비화로 초식을 급변시켜야 했다.
오문 중에 가장 악독하다는 수룡대의 뇌정추가 한꺼번에 허공을 가득 메우며 날아왔기 때문이다.
내력이 깃든 서른 개의 뇌정추는 마치 그물처럼 보이지만 적중되는 순간 몸이 폭파될 만큼 하나하나가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 기병이니 정면으로 맞받아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검기의 막으로 몸을 보호한 운호가 뇌정추를 튕겨내고 뒤쪽으로 물러서자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 풍멸대가 강창을 찔러왔다.
뇌정추를 피하느라 후방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진 사이 펼쳐진 공격이다.
운호의 몸이 팽이처럼 돌며 이 장이나 우측으로 이동했다.
강창의 공격 역시 한 명이 아니라 서른이 하나가 되어 펼친 공격이기에 마주치기에는 부담이 따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탄궁이 날아왔다.
탄궁은 활이 아니라 강철로 특수 제조된 탄환을 사용했고, 근접 거리에서도 사용이 가능한 치명적인 무기였다.
피잉, 핑!
순식간에 발사된 탄궁의 위력에 귀가 따가울 정도의 섬뜩한 소음이 생겼다.
비화로 온몸을 보호한 운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뒤쪽으로 돌아갔다.
본능적으로 탄궁에 의해 후방의 방어가 약화되었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독전대는 강철방패로 전면을 보호한 채 운호의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즉시 쇄겸도를 내밀며 공격에 대비했다.
사문두저진의 원리는 이토록 오묘했다.
탄궁으로 인한 아군 피해를 막기 위해 강철방패를 반대쪽에 배치했고, 적의 반격까지 감안해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다.
더 괴로운 것은 좌측에서 뇌정추가 또다시 날아왔다는 것이다.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연환 공격에 운호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방어에 치중했다.
사문두저진이 변화를 일으킨 것은, 일각이 지나 진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파악한 운호가 급작스럽게 풍멸대 쪽으로 칠검을 터뜨릴 때였다.
탄궁과 뇌정추가 동시에 운호를 향해 쏘아졌다.
지금까지 돌아가며 공격하던 방식을 변화시켜 두 면이 하나가 되어 압박을 가해왔다.
파박, 파박, 파바박!
반격을 하려던 운호의 신형이 제자리로 돌아오며 정신없이 회전했다.
동시다발적인 공격은 두 배의 내력을 소모하게 만들 만큼 강력해서 신형이 휘청거렸다.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강창과 쇄겸도가 연이어 공격해 왔다.
그야말로 쉴 틈 없는 공격이다.
단 한 번의 반격도 못해보고 일방적인 공격을 반 시진 넘게 당하자 서서히 호흡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 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싸운다면 목숨을 내어줘야 될지도 몰랐다.
“헉헉!”
무리를 해서라도 일단 진을 깨야 했다.
방어에 치중하며 진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했다.
이제 진은 면의 공격에서 선의 공격으로 변해 있었다.
즉, 원거리 공격의 조합에서 장단 거리 조합으로 변했다는 뜻이다.
사문두저진은 운호의 방어와 움직임에 따라 면과 선의 공격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기회를 노렸다.
탄궁과 뇌정추의 공격이 지나고 쇄겸도와 강창이 공격을 시작하려는 순간, 가빠오는 숨결을 조절한 운호의 입에서 사자후가 터지는 것과 동시에 검기의 분산이 일어났다.
검기는 분산에서 그치지 않고 회전하기 시작했는데, 기다리던 것처럼 빛살같이 빠르게 풍멸대를 향해 폭사되어 나갔다.
콰앙!
그토록 견고했던 강창이 부러지며 중앙 진이 휘청거렸다.
가끔 가다 반격을 해도 끄떡없던 진영이 회풍의 강력함을 견디지 못하고 흔들렸다.
운호의 눈이 번질거렸다.
이 기회를 잡지 못하면 자신은 여기서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전력을 다해 다시 회풍을 펼치며 휘청거리는 풍멸대를 향해 맹렬히 진격해 나갔다.
콰앙, 쾅!
운호의 몸이 바람처럼 사문두저진을 벗어난 것은 세 번까지 버티던 풍멸대의 진영이 결국 폭죽이 터지듯 무너져 내렸을 때다.
진에서 벗어난 운호는 급속 추격해 온 수룡대를 반으로 가르며 좌측으로 움직였다.
몸 상태로 봤을 땐 일단 벗어날 필요성이 있었으나 그대로 가기엔 당한 것이 너무나 억울했다.
엽문과의 싸움에서 얻은 상처는 피륙이 터진 것에 불과했으나 사문두저진에 갇히면서 당한 상처는 제법 커서 지금도 피가 새어 나오는 중이다.
운호는 수룡대를 가른 기세 그대로 곧장 독전대의 전방을 쳤다.
검기의 물결이 사방으로 날아가 강철방패를 조각냈고, 뒤이어 그 주인의 몸까지 쓸어버렸다.
수룡대와 독전대를 치고 나자 어느새 진형을 갖춘 풍마대가 탄궁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운호는 그들을 무시하고 우측에서 돌아 나오는 풍멸대를 향해 십이검을 터뜨렸다.
어차피 이런 난전에서는 탄궁을 쓰지 못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허공을 가득 메운 분산된 검기의 물결이 강창을 부수며 진격해 나갔다.
피가 튀었다.
적에게서 나온 피가 검에 묻어 방울방울 떨어졌고, 자신에게서 흐른 피는 땅을 적시고 있었다.
엽문은 즐거운 마음으로 사문두저진에 갇힌 운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확실히 대단한 놈이라는 걸 새삼 절감했다.
놈과의 대결은 유흥으로 시작했다가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지경까지 갔다.
처음에는 밀리던 놈의 검이 시간이 갈수록 강해져, 결국 벽사검법의 후반 육식까지 꺼내 들어야 했다.
문제는 그것으로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놈의 검은 점차 벽력으로 변해 자신을 짓눌러 왔다.
삼두홍을 펼치고 싶다는 욕망을 간신히 참고 뒤로 물러난 것은 놈의 눈을 확인하고 난 후였다.
깊게 가라앉은 눈.
일각이 달랐고, 삼각이 지나자 변했으며, 반 시진이 지나자 달관한 자의 눈으로 가라앉았다.
그런 눈의 원천은 자신감이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마지막 초식을 숨기고 있던 것처럼 놈에게도 비장의 절초가 있지 않다면 저런 눈을 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점창에 밀검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무정현에 파견 나가 있던 도절 상후가 청무자에게 당한 것이 그 밀검이라고 알려져 있었기에 미련 없이 물러났다.
어차피 사문두저진에 갇힌 이상 놈은 죽게 되어 있으니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
사문두저진은 이백 년 전 진법의 대가로 알려진 천기자가 남긴 것이었다.
말년에 진법을 완성한 천기자는 죽으면서 유서에 이렇게 썼다고 전해진다.
완벽하게 펼쳐진 사문두저진은 무적이다.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 해도 다수의 힘은 이기지 못하는 법. 더군다나 수진에 병진을 합했으니 혼자의 힘으로 사문두저진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엽문은 천기자의 유서 내용을 전해 듣고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룡단이 진법을 익히며 스스로 사문두저진에 갇혀본 결과, 천기자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진법의 위력은 진정 대단해서 암담함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물론 황룡단의 수장인 자신은 그 파훼법을 잘 알고 있었다.
아주 단순하면서 간단한 방법.
바로 한 면을 구성하고 있는 전력을 꺾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쉬울 수 있단 말인가.
한 면의 전력을 극복한다는 것은 서른 명의 내력을 극복한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그런 무력이 있다 해도 나머지 병력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단숨에 격파해야 사문두저진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공허한 이야기나 다름없다.
당연히 자신의 무력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였고, 자신을 감복시킨 전왕이라 해도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그 불가능은 거짓말처럼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다.
보고도 믿지 못할 사실.
괴력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문두저진을 깨버린 운호의 검은 막강 그 자체였다.
검기의 회오리라니.
정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점창에 밀검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저런 위력을 가졌다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무려 사십여 명의 사상자를 만들어놓고 유유히 사라져 가는 운호를 보며 엽문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믿지 못할 무력에 대한 충격.
그 충격이 전신을 관통해서 엽문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