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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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42화
엽문(葉門).
십오 년 전 전왕에 의해 칠절문에 영입된 이래로 줄곧 황룡단을 맡고 있는 무인이다.
그의 독문 무공인 벽사검법(劈邪劍法)은 연원을 알 수 없었는데, 그 원인은 엽문이 철저하게 함구했기 때문이다.
연원을 알 수 없다 해서 벽사검법의 위력이 약하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어떤 검법보다 강맹하고 수많은 변초가 담겨 있었다.
더군다나 엽문의 몸에 장착된 벽사검법은 그의 자웅검(雌雄劍)으로 펼쳐질 때 환상이 되어 화려하게 피어난다.
칠십여 번의 대소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엽문은 칠절문을 대표하는 절정검객 중의 하나였다.
운호는 엽문이 검을 들어 자신을 겨냥하자 내려뜨렸던 흑룡검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적정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단숨에 결판을 내고 포위망을 뚫어내야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있다.
다수에 의해 포위된 상태에서는 효율적인 전투를 할 수 없으니 엽문을 단숨에 뿌리치고 좌측에 위치한 전각을 뛰어넘어 포위망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눈으로 보지는 않았다.
눈을 돌리는 순간 적이 자신의 생각을 읽고 미리 차단할 가능성이 있었다. 운호는 검에 내력을 주입한 채 오직 엽문의 눈을 노려봤다.
생각과 행동이 하나가 되어야 이 전투를 제대로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무섭게 다가오는 엽문의 기세.
그 압박감이 그동안 상대한 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애초부터 일대일로 결판낼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 먼저 움직이며 검을 날렸다.
부지불식간에 피어오른 새파란 세 갈래의 검기가 엽문을 향해 빛살처럼 날아갔다.
내력을 끌어 올려 기습적으로 날린 월파는 순식간에 엽문의 머리와 가슴을 노렸다.
콰앙!
엽문의 검과 충돌하자 폭발음이 생겼다.
죽이기 위해 한 공격이 아니기에 운호는 엽문이 반격하자마자 그 탄력을 이용해 미리 봐둔 전각으로 날아올랐다.
가로막은 풍멸대가 저지하기 위해 공격해 왔으나 운호의 검은 순식간에 셋을 베고 담장을 뛰어넘었다.
도망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보다 유리한 상황에서 싸우기 위함이다.
최대한 많은 적을 베어 풍운대가 사천의 한복판에서 당당히 싸우고 있음을 세상에 알릴 생각이었다.
운호는 담장을 뛰어넘자마자 전각 외곽으로 빠져나가며 좌측에서 다가오는 수룡대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펼쳐진 십이검이 공간을 자르며 수룡대의 몸에 터졌다.
태산의 연환.
포위망을 벗어나 수세에서 공격 위치로 변한 운호의 막강한 검은 적진의 중앙에 서 있는 두 명의 무인을 순식간에 베어버리고 좌측에서 돌진해 오는 세 명의 적객마저 쓸어냈다.
내력을 풀어낸 운호의 검은 가히 벼락이나 다름없었다.
막고자 해서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단 한 번의 공격을 펼친 후 극에 달한 유운신법으로 위치를 바꿔 버렸다. 황룡단은 효율적인 공격을 하지 못하고 운호의 뒤를 쫓느라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었다.
운호는 포위망이 구축될 때부터 눈에 보이던 절정고수들을 철저히 피했다.
부단주인 석송과 대주들이 다가오면 즉시 방향을 틀어 그들로부터 멀어졌다.
두려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 효율적인 파괴가 목적이었다.
수뇌부를 피한다면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적을 쓰러뜨릴 수 있고 위험마저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자 싸움은 운호의 예상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
불과 일 다경도 지나지 않아 황룡대가 대별로 진형을 갖추며 압박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혼란을 제어하는 황룡단의 명령 체계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투 상황에서도 칼날처럼 일사불란했다.
운호는 칠검을 날린 후 주변을 살폈다.
벌써 적들은 자신을 잡기 위해 원거리에서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서 버티면 결국 포위망에 갇힐 수밖에 없다는 걸 확인한 운호의 신형이 전각으로 뛰어올랐다.
적들의 의도대로 따라주진 않는다.
지금까지는 포위망이 풀렸기에 싸웠을 뿐, 또다시 숫자를 이용해 압박을 가해온다면 그 속에 갇혀줄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는 전각의 반대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엽문은 단 일 수에 이 보나 밀려난 자신의 다리를 확인하며 두 눈을 부릅떴다.
부지불식간에 당한 공격이었다 해도 이 보나 밀려나다니 진정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놈은 마치 자신이 밀릴 것을 확신이나 한 것처럼 지체 없이 전각 쪽을 향해 도주했다.
아니다. 도주가 아니라 포위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동이었던 모양이다.
싸우겠다는 말을 듣고 가소롭게 여겼는데 놈은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가로막는 수하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는 중이다.
검기를 장난처럼 빼어 든 운호의 검은 황룡단의 진형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무수한 시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유령이대를 순식간에 처리했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그저 웃었었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터무니없는 정보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보여지는 운호의 무력은 비각삼대주의 보고를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도대체 점창의 저력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새파랗게 젊은 놈이 검기와 검풍을 동시에 쓰고 있으니 눈으로 보고도 믿겨지지 않았다.
황룡단을 맡은 이후 최근 오 년 동안 검을 뽑아본 적이 없다.
웬만한 일은 수하들이 처리했고, 자신은 그 뒤처리나 해주면 되었다.
무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관리자의 삶이었지만 나이가 들자 그런 대로 만족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수하들을 쓰러뜨리는 치열한 운호의 검을 보자 온몸에서 소름이 돋아났다.
어찌 잊고 살았을까. 무인의 삶을.
엽문은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오른손을 한참 내려다보다 빙긋 웃은 후 담장을 차고 날아갔다.
기뻤다.
언젠가부터 가슴에 가득 들어차 있던 공허함이 순식간에 새어 나갔고, 그 대신 투지라는 놈이 스며들어 심장을 힘차게 뛰도록 만들었다.
오늘 이 순간 나는 다시 무인으로 돌아간다.
운호는 뒤에서 날아온 검을 연속으로 튕겨내며 삼 장을 건너 담장 위에 날아 섰다.
유성처럼 떨어진 강력한 공격이기 때문에 신형이 고정되지 않고 흔들렸다.
예상했던 대로 검의 주인은 엽문이었다.
“어딜 가느냐?”
“나 하나를 잡기 위해 새까맣게 몰려들고 있으니 피하는 게 맞는 일 아니겠소?”
“싸운다고 하더니 도망부터 치는구나! 비겁하다!”
“나이를 거꾸로 잡수셨군.”
“뭐라?”
“내가 한 열댓 명은 잡았소. 그래도 남은 자가 백 명은 넘어 보이는데 다수로 핍박하면서 어째서 나를 비겁하다 하오. 참으로 뻔뻔하구려. 따라오시오. 당신 하나라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으니.”
운호는 말을 마치자마자 즉시 신형을 날려 관도를 건넜다.
엽문과 대화를 하는 사이 황룡단 무인들이 진형을 구축한 채 날아왔기 때문이다.
운호가 관도를 넘어가자 엽문이 황룡단을 향해 돌아서며 손을 올렸다.
그러자 대별로 움직이던 무인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팔방을 점유한 채 내려앉았다.
칠절문 칠대무력단체 중 하나라는 황룡단의 움직임은 이처럼 완벽하게 제어되어 엽문의 손발이 된다.
수하들이 모두 움직임을 멈추자 엽문의 눈이 가장 전면에 있는 부단주 석송을 향했다.
“석송!”
“예, 단주님.”
“한 시진 후 송추로 오라. 거기서 놈을 잡는다.”
운호는 관도를 넘어 의빈의 중심지를 벗어났다.
시가지에서 싸우는 것은 양민에게 피해를 줄 수 있었고, 건물들로 인해 쉽게 포위될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법에 자신이 생긴 만큼 움직이면서 적들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자는 오직 한 명뿐이다.
격장지계를 쓰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너무나 쉽게 엽문이 걸려들어 오히려 이상했다.
강호에는 수많은 암수가 난무해 눈에 보이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는다고 했으니, 서라는 엽문의 외침에도 반응하지 않고 앞만 보며 달렸다.
따라오는 기색은 없었으나 황룡단의 나머지 추격 병력과 충분한 거리를 이격시킬 필요가 있었다.
운호는 그로부터 일각을 더 달려 의빈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능선에서 멈췄다..
사방이 훤하게 보이는 지형.
언제든지 적의 접근을 확인할 수 있는 곳에 걸음을 멈춘 운호는 뒤따라 내린 엽문과 삼 장을 이격하고 마주 섰다.
“진짜 오셨구려. 두렵지 않소?”
“푸하하! 갈수록 재밌는 놈이로다.”
“단체로 다니던 사람은 혼자 떨어지면 두려움을 느끼는 법인데 당신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오?”
“내 평생 두려움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다. 더군다나 곧 죽을 너에게 왜 두려움을 갖겠느냐?”
“과연 그럴까?”
“이제 아무도 없으니 도망가지 않을 테지. 어디 진짜 네 실력을 보자.”
“얼마든지.”
운호는 도발해 오는 엽문의 말을 맞받은 후 천천히 흑룡검을 진격세로 만들었다.
내력이 정상 가동된 후 지금까지 제대로 된 수련을 해본 적이 없다.
사형들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서곡에서 의빈까지 급히 오느라 검에 내력을 담아내는 수련을 거의 하지 못했다.
유령이대와는 제대로 된 싸움이 되지 않았고, 황룡단 역시 다수와의 싸움이다 보니 적정의 원리를 검에 담아내지 못했다.
기세를 뿜어내는 엽문의 검을 확인한 순간 그가 얼마나 강한 고수인지 알 수 있었다.
살을 파고들 만큼 검기가 피부를 자극해 따끔거리게 만들었음에도 운호는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기세에서 밀린다는 것은 열세에서 싸움을 시작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순간이다.
이 정도의 고수에게 적정의 원리를 시험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기도 하고 지극히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운호는 호보로 나서며 오성의 내력을 담아 섬전을 날렸다.
반격해 오는 기세에 맞춰 내력을 조정하겠다는 생각.
기다렸다는 듯 엽문의 검이 뒤쪽에서 휘돌아 앞으로 튀어나왔다. 운호는 풍영(風影)으로 전환시켜 충돌을 일으켰다.
비틀.
강력한 검격에 검이 밀리며 신형 또한 뒤로 밀려났다.
오성의 내력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참을 만했기에 내력을 더 끌어 올리지 않고 밀린 검을 끌어당겨 곧장 월파로 전환시켰다.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투입되는 내력의 수준에 따라 나타나는 사일검법의 위력 또한 관조해서, 그 한계가 어디인지 찾아내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해서 밀렸지만 운호는 이를 악물고 초식의 운용으로 엽문의 공격을 막아냈다.
균형이 다시 맞춰진 것은 이화접목이 강화되어 있는 창천으로 초식이 전환되면서부터였다.
적의 내력이 담긴 검을 맞받는 것이 아니라 흘리고 빗겨내며 내 것으로 만들어 공격하는 낙영, 비화, 무영이 줄기줄기 쏟아져 나오자 엽문의 검이 주춤거렸다.
그렇다고 해서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그 대등함은 이전보다 훨씬 더한 흉험함으로 다가왔다.
엽문의 검이 변했기 때문이다.
검이 변한 것보다는 내력이 달라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수는 처음부터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엽문 역시 그러한 모양이다.
더군다나 초식이 변했다.
열두 초식 중 전육식만 구사하던 엽문이 벽사검법의 절초들을 줄기줄기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투둑, 투툭.
순식간에 검이 방어선을 뚫고 팔과 옆구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으나 피가 새어 나왔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한 번의 충돌로 다섯 발자국이나 밀려났다.
곧장 내력을 끌어 올려 치고 들어오는 엽문을 향해 마주 뛰어들었다.
내력을 일성 더 끌어 올리자 초식의 위력이 변했다.
같은 초식임에도 충돌의 여파가 달랐고, 적의 검을 빗겨내고 후려치는 게 달랐다.
싸움은 금방 다시 균형을 맞춘 채 춤추듯 돌아갔다.
누구도 우세를 점하지 못한 상황에서 사일검의 태산과 창천이 하나가 되어 벽사검법의 절초들과 충돌했다.
그런 상태에서 한 단계씩 내력을 끌어 올리자 사일검법이 무시무시한 위력을 뿜어냈다.
쾅, 쾅, 쾅!
검과 검이 부딪치면서 폭발음을 냈고, 그 충돌의 여파로 둔덕이 여기저기 파였다.
두 사람은 벌써 십여 군데씩 상처를 입어 피로 목욕한 것처럼 변해 있었다.
거의 반 시진에 달하는 혈투.
땅이 연신 솟구쳤고, 바람이 접근하지 못한 채 휘돌다 덧없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가 봤다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두 사람의 싸움은 공전절후 그 자체였다.
언제까지 지속될 것 같던 싸움은 급히 신형을 삼 장이나 뒤로 튕겨낸 엽문에 의해 끝이 났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함박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좋아. 아주 좋구나. 어린놈이 대단하다.”
“시간이 없으니 이제 끝을 봐야겠소.”
“나도 그럴 생각이다. 너는 여기가 어딘 줄 아느냐?”
“모르오.”
“바로 여기가 송추라는 곳이다. 그리고 네가 죽을 곳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