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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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31화
운호는 낮게 끊어서 말을 마친 후 검을 꺼내 들었다.
흑룡검(黑龍劍).
사부이신 청곡자가 천하를 질주하며 점창의 혼을 강호에 알릴 때 쓰던 명검이다.
예기치 못한 사태였으나 운호는 침착하게 자신을 둘러싼 유령이대 십이 명의 적객을 비스듬히 일별하고 유운검법의 기수식을 잡았다.
사일검법을 꺼내지 않은 이유는 내공의 흐름이 원활치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에 흐르는 내공을 고스란히 검에 담을 수 있다면 당연히 사일검으로 상대하겠지만 삼성의 내력이 담긴 내공이라면 오히려 유운검이 훨씬 효율적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실전 경험이다.
유운검법은 거의 오 년 동안 매일같이 청문 사숙에게 얻어터지며 배웠기 때문에 사일에 비해 실전 경험이 많았다.
그의 유운을 보고 청문 사숙은 발군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면서 위기에 처했을 때 충분히 몸을 보호할 수 있을 거라 했다.
그럼에도 저들과 끝장을 볼 생각을 가지진 않았다.
정확한 판단과 결단력만이 목숨을 구할 수 있다.
기세가 칼날처럼 배어나오는 유령대주조차 감당이 쉽지 않은데 열하나의 적객이 포위까지 하고 있으니 여기서 승부를 본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주변의 지형을 순식간에 훑어내고 후퇴로를 살폈다.
적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기도 쉽지 않아 보였지만 탈출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목숨을 잃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헛된 죽음은 원하지 않는다.
유령대주 정철의 지시에 다섯 명의 사내가 앞으로 나서는 것이 보였다.
다행이다.
정철이 자신을 무시하지 않고 일거에 공격을 명했다면 더욱 힘든 상황에 몰렸을 것이다.
슬며시 이가 악물려졌다.
강호에 나와 처음으로 검을 쥔 손가락은 과도하게 힘이 들어가 손목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완성된 무력을 지녔다면 긴장하지 않을 테지만 내공의 제약은 그를 극도의 긴장 상태로 몰아갔다.
내공을 끌어 올리자 몸에서 찌릿찌릿한 기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공의 조절이 안 된다는 뜻이다.
삼성이 넘어가면 뼈를 깎아내는 고통이 생긴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위기를 느낀 몸에서 제어되지 않은 내공이 불쑥불쑥 일어나 송곳처럼 전신을 찔러왔다.
깊은 호흡.
적들을 살피며 호흡을 끌어당겨 내공을 가라앉히고 몸을 관조해 나갔다.
내공이 조절되지 못하면 여기서 죽는다.
다섯 명의 사내가 공격해 들어온 것은 다행스럽게도 진기가 혈들을 타고 제어되기 시작할 때였다.
쐐액!
단숨에 끝을 보겠다는 공격.
그들 역시 유령대주의 판단처럼 운호를 경시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공격은 운호의 상, 중, 하를 완벽하게 분리, 제어하며 치명적인 사혈을 노렸다.
운호의 검이 유유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검이 몸에 거의 닿기 직전이었다.
유운이란 흐르는 구름을 뜻한다.
유로 강을 제압하는 상승 검리가 검법 전반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바로 유운의 특징이다.
그처럼 운호의 움직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엄청난 빠르기로 공격해 오는 적객들의 공격을 일일이 비껴서 흘려냈다.
중속의 묘리.
정철은 수하들의 공격을 절묘하게 막아내는 운호의 움직임을 보며 슬며시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의 눈에는 운호의 움직임이 상세하게 보이는데 수하들은 운호를 제압하지 못하고 벌써 삼십여 초를 헛되이 보내는 중이다.
그래서 더욱 이상했다.
지금 공격하고 있는 중일조의 합격은 명성이 자자한 고수들조차 쩔쩔맬 정도로 강력한 것인데 일각이 지나도록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운호의 움직임이었다.
처음 몇 초식은 일방적으로 몰리더니 시간이 갈수록 불쑥불쑥 반격까지 감행하고 있다.
‘이런, 쯧쯧.’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
놈의 검에는 내기가 깃들어 있고 간혹 검형이 나타나며 수하들의 결정적인 공격을 차단했다.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영악하게도 내력을 숨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놈이 가진 내력은 일천한 수준에 불과했다.
수하들의 공격에서 버틸 수 있는 것은 내력 때문이 아니라 놈이 펼치고 있는 신묘한 검법 때문이었다.
바람처럼 휘돌고 구름처럼 움직인다.
저것은 점창의 기본 검법인 유운검법이 틀림없는데, 유운검법에 저런 위력이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호오, 제법이네? 그런데 저건 무슨 검법이지?”
커다란 나무숲에 몸을 숨기고 있던 당운영은 운호가 펼치는 검법을 보면서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싸움을 대등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오직 검법이 지닌 위력 때문이었다.
현묘함이 저절로 나오는 초식의 구사.
초식과 초식의 연결이 절정을 넘어선 자신조차 알아채지 못할 만큼 정교해서, 연환되고 있다는 것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내력이 부족한 상태임에도 일류무인들의 합공을 받으며 견딘다는 것은 검법에 대한 이해와 연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수련해야 저 정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진정 감탄이 저절로 나와 그녀는 한동안 운호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다. 아름다움이란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린다.
검을 들고 초식을 구사하는 운호를 보며 그녀는 너무나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움찔!
관전하던 짝귀 사내가 성질을 못 참고 암습을 가하는 것이 보였다.
짝귀 정도의 고수가 펼친 암습은 교전 상태에 있는 운호에게 치명적인 일격이 될 수밖에 없다.
운호가 정철의 일격에 튕겨지듯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당운영의 신형이 공중으로 비상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는 비접이 씌워져 있었다.
유령대주의 일격을 검으로 비켜 막은 운호는 그 힘을 거역하지 않고 곧장 뒤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본능적인 감각이 이번 기회를 잡으라고 명령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쪽에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는 두 적객을 향해 섬전(閃電)을 쏘아냈다.
기회는 단 한 번뿐.
그랬기에 가동이 가능한 모든 내공을 한꺼번에 모아 일격을 가했다.
쐐액!
유운과 다른 강력함.
바로 사일검법 중 섬전만이 가지고 있는 강력함이 두 명의 적객을 향해 번개처럼 쏘아졌다.
부지불식간에 다가온 섬전을 그들은 미처 막아내지 못하고 양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온 적객들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경로와 강력함을 막아내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포위망이 뚫리자 운호는 미리 봐둔 숲을 향해 전력으로 신법을 펼쳤다.
초인적인 힘.
고통이 전신을 괴롭히기 시작했으나 운호는 가동할 수 있는 내공을 모두 끌어 모아 탈출을 시도했다.
“저 새끼, 기다렸던 모양이네. 확실히 영악한 놈이군.”
검으로 막았다지만 정철이 작심하고 펼친 강력한 일격에 운호의 왼쪽 어깨와 허리가 길게 찢어져 피가 뭉클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다렸다는 듯 도주하는 운호를 보며 정철의 왼손이 위로 올라갔다가 떨어져 내렸다.
“추격해. 더 이상 시간 끌지 마라. 영악한 놈이다. 곧장 척살하도록!”
명령이 떨어지자 열한 명의 적객이 동시에 비상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추격하면서 그들은 운호의 신형을 놓친 적이 없었다.
운호가 사람들이 다니는 관도를 미친 듯이 달렸기 때문에 공격하지 않았을 뿐, 만약 무림인들이 주로 다니는 미로를 이용했다면 벌써 척살하고도 남았다.
강호 경험이 전무해 관도를 달린 것이 목숨을 부지시킨 이유가 되었으니 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정철은 적객들이 몸을 날려 운호를 추적하기 시작하자 자신 역시 신법을 펼쳐 나무 사이를 쾌속하게 질주했다.
운호 정도의 신법이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수준이 매우 낮았다.
정철은 가장 늦게 출발했으나 금방 적객들과 신형을 나란히 하며 미친 듯 도주하는 운호를 지그시 노려봤다.
왕독종이라고 우기며 제법 강단을 보이던 놈이 도주하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삐익!
후미에서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자 적객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양쪽에서 협공하겠다는 의지.
도주하는 자를 잡는 데 가장 효율적인 쌍익진이 펼쳐지자 정철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수하들은 별도의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놓친 적이 없다.
이것이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오면서 맞춰진 호흡이다.
수하들이 양쪽으로 완전히 갈라섰을 때 정철은 검을 비스듬히 앞으로 내밀었다.
쌍익진에서는 후미를 맡은 자신이 먼저 공격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공격 대신 신형을 뒤집으며 미친 듯이 팔방으로 검을 쳐내야 했다.
세 개의 빛 무리가 삼태성을 제압하고 날아왔는데, 얼마나 빠른지 육안으로 확인조차 되지 않았다.
채앵!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위력에 세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섰다.
검이 부르르 떨며 휘청거리는 걸 간신히 제어했을 때 양쪽에 두 명씩, 도합 네 명의 수하가 날개 잃은 기러기처럼 균형을 잡지 못하고 땅바닥에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무엇이 공격해 왔는지 알아채지도 못했는데 순식간에 네 명이나 당하자 정철은 수하들을 한쪽으로 모으며 전면의 숲 쪽을 노려봤다.
그사이 운호는 나무 사이로 희끗거리던 신형을 감추며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추적하면 죽일 자신이 있었으나 정철은 움직이지 못했다.
암습한 자의 무력이 자신보다 훨씬 고수라는 걸 단박에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런 고수를 상대로 모험을 한다는 것은 죽여 달라는 것과 진배가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자신을 공격한 것은 암기가 분명했다.
암기라…….
강호의 어떤 암기가 이 정도 위력을 가졌단 말인가.
단 한 번 부딪쳤을 뿐인데 검을 쥔 손아귀에서 은은한 통증이 생겨나고 있다.
바닥에 쓰러진 수하들이 애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리고 있다.
일격에 자신을 포함해 열둘을 공격할 정도의 고수라면 단숨에 목숨을 끊을 수 있었을 텐데 수하들은 전부 팔다리를 붙잡은 채 뒹굴고 있다.
“어떤 고인이시오?”
“사신!”
“장난이 심하군.”
“장난인지 아닌지 움직여 보면 될 거 아니냐?”
“우리는 칠절문 사람들이오. 본문의 행사에 개입하면 추후에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질 거요.”
“칠절문 정도 가지고는 협박이 되지 않는다. 한 번은 경고였을 뿐, 두 번째는 정말 죽이겠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도록.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움직여도 좋다.”
“이유를 알 수 있겠소?”
“…….”
“천하의 당문이 강호의 일에 개입하려면 무슨 이유가 있을 것 아니요?”
“그 입 조심하라. 함부로 당문을 입에 올리면 제 명에 살지 못한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게요? 이 정도의 암기술을 가진 자가 당문밖에 없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겠소?”
“죽고 싶은 모양이군.”
숲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는 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정체를 숨길 때 주로 쓰는 복화술이 분명했다.
숲 속에서 살기가 일어나며 정철 일행을 압박해 들어왔다.
전신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살기다.
정철은 느물거리던 말투를 고치며 급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어쩌면 좋겠소?”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목숨만은 살려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