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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29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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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풍운사일 29화

운호가 풍현 중심에서 오 리 정도 벗어난 관제묘로 들어서자 삼십 중반의 사내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해왔다.

사내는 유현이란 인물로 점창속가에 속한 사람이었는데, 어릴 적 오 년 동안 본산에 올라 수련을 했다고 한다.

속가는 본산처럼 돌림자를 쓰면서 배분을 정하지 않았으나 유현은 명자배와 같이 수련했기 때문에 운호를 사숙이라 부르며 공경을 다했다.

이곳 관제묘는 칠절문과의 전투를 결정하면서 점창이 사천과 운남의 경계지에 만들어놓은 다섯 군데의 정보 집결지 중 하나였다.

특히 풍현은 사천과 운남의 직선로에 위치하고 있어 밀지 중 가장 많은 서른두 명의 속가제자가 정보를 수집해서 가져왔는데 그 정보를 총괄하고 분석하는 업무를 유현이 주관하고 있었다.

“사숙, 일찍 나오셨습니다.”

“궁금해서 객잔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무정현에 대해서 들어온 소식이 있습니까?”

“기뻐하십시오. 어제 저녁 청무 사숙조께서 비룡단을 완벽하게 격파하셨답니다.”

밤늦게까지 관제묘를 지켰으나 끝내 소식이 들어오지 않아 잠조차 이루지 못하고 나온 길이다.

그래서 급히 물었는데 유현은 한껏 고무된 모습으로 싸움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워낙 무정현에 있는 적의 전력이 만만치 않아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피해는요?”

“운각 사숙을 비롯해 일곱이 죽고 여덟이 다쳤다고 합니다.”

유현이 말을 끝내지 못하고 흐리자 운호의 얼굴에 기쁨으로 떠올랐던 웃음이 사라졌다.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는 소식은 분명 기쁜 일이었으나 열다섯이 다치거나 죽었다고 하니 새삼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왔다.

운각 사형의 밝게 웃던 모습이 선하게 떠올라 운호는 금방 입을 열지 못했다.

전쟁을 치르면서 어찌 죽음이 곁에 없으랴.

무정현에는 비룡단주를 비롯해 백여 명의 인원이 상주했고, 거기다 쌍로와 오군까지 지원을 위해 합류한 상태였으니 그런 막강한 전력을 상대로 단 열다섯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면 분명 대승임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사형의 죽음과 사질들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청무 사숙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상락으로 이동 중이십니다.”

“상락이라면?”

“그렇습니다. 칠절문의 목을 누르실 생각인 모양입니다.”

칠절문은 본문 외에 세 개의 지단과 서른세 개의 지부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화성에 있고 지단들이 본문을 호위하듯 삼각 형태로 무주, 상락, 추궁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상락은 운남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청무자가 상락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유현의 말대로 칠절문이 숨 쉬기 불편하도록 만들겠다는 의도다.

상락이 조임을 당하면 운남 쪽으로 이동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운남 쪽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최소 삼십 리를 돌아야 된다는 뜻이었다.

자신들의 안방인 사천에서 목 눌림을 당한다는 것은 칠절문 입장에서는 어떡하든 피하고 싶은 일이 분명하다.

즉, 청무자가 상락을 압박하는 순간 커다란 전투가 펼쳐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운호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점창 무인들은 장로회의에서 결정된 이동 경로를 알지 못했다.

그때그때 움직이는 부대의 이동 경로를 확인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김질할 뿐이다.

문파와 문파가 부딪치는 전투에서 핵심 전략은 오직 수뇌부만 아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에 풍운대를 비롯해 부대를 이끌며 전투를 책임지는 운자배 무인들까지 이번 싸움에 대한 상세한 전략을 들은 바 없다.

“청문 사숙은 학경에 계십니까?”

“아직 움직이지 않으셨답니다. 칠절문 지부들의 움직임이 파악되지 않아서…….”

“운상이한테서는 소식이 없었지요?”

“예, 아직.”

“아무래도 운상이는 조인에서 무주 쪽으로 이동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걸?”

“쌍로와 오절이 급히 남하해 무정현에 들어간 것은 칠절문이 우리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무정현의 싸움이 결판났으니 분명 영인과 학경에 있던 칠절문의 지부들은 사천으로 후퇴했을 겁니다.”

운호의 말을 주의 깊게 듣던 유현이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무정현의 병력이 전멸했다는 것은 칠절문의 운남 교두보가 망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청명과 청문자의 병력이 접경지대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칠절문 지부 병력의 후퇴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우리 부대는?”

“아마 지금 이 시간 이동을 시작했거나 이동하고 있겠지요. 조금 있으면 소식이 들어올 테니 준비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겠습니다. 사실이 확인되면 다음 밀지인 기축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유현은 대답을 하면서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만큼 침착하다는 뜻이다.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마음이 급해져 자연스러운 부산함이 생겼을 텐데 그는 차분함을 유지했다.

그 차분함이 운호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저는 따로 갈 데가 있으니 사질과는 여기서 헤어져야겠습니다.”

운호가 조용하게 말을 꺼냈다.

어차피 여기에서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은 없었다.

자신을 풍현에 남긴 것은 풍운대와 본대의 연락을 맡으라는 이유였으나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진짜 이유는 자신의 안전 때문이다.

얼마나 부끄러운 이유인가.

사문의 전 무인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중인데 자신은 안전 때문에 후방에 앉아 눈만 끔벅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자신이 없어도 밀지는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이제 사형들을 찾아 떠날 생각이다.

같이 있던 운상마저 풍운대에 합류했음이 분명한 이상 자신도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죽는다는 것은 무인이 되면서 한 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이 못 미더웠으면 산에 남겨놓을 일이지, 뭐하러 하산을 시켰단 말인가.

하산한 이상 죽음을 곁에 두고 싸우고 싶었다.

“그건 안 됩니다. 사숙께서는 저희와 함께 계셔야 합니다. 운상 사숙께서는 저에게 반드시 사숙과 함께 있으라 명을 내리고 떠나셨습니다.”

유현의 반대는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운상이 떠나면서 유현에게 운호의 신변을 간곡히 부탁했기 때문이다.

운호가 내력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운상의 걱정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착하고 예의 바른 사숙이 죽기를 바라지도 않았기에 떠나겠다는 운호의 말에 강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운호의 결심은 단호했다.

“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으니 사형들을 찾으러 갈까 합니다.”

“사숙!”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운상이 사질께 과도한 부담을 준 모양입니다. 제 몸은 스스로 돌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사숙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저는 고개를 들고 살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사질과 저는 해야 할 일이 다릅니다. 저는 운상이 걱정한 만큼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말로 해서는 못 믿으실 것 같으니 직접 눈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워낙 강경한 반대에 운호가 천천히 검을 빼 들고 관제묘의 중간에 섰다.

그런 후 유운검법의 전삼식을 거침없이 펼치기 시작했다.

빠르고 강하다.

더군다나 내력까지 가미된 검에서는 희미한 검기까지 뿜어 나오고 있었는데 얼마나 강력했는지 관제묘가 온통 들썩거릴 지경이다.

운호는 유현을 설득시키기 위해 자신이 가동할 수 있는 내력을 모두 끌어 올렸는데 고통이 슬며시 피어오르는 것도 무시하며 전력을 다했다.

유현은 기가 막혀 입을 벌린 채 한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유운검법을 저토록 완벽하게 펼치는 사람은 본 적이 없고 시퍼렇게 서슬이 맺힌 검을 대하자 오한이 들어 저절로 말문이 막혔다.

운상에게 내력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불쌍함과 동시에 연민을 느꼈다.

나이 어린 사숙.

더군다나 자신의 몸조차 지키지 못할 만큼 약한 무력을 지닌 사숙에게 자신을 해줄 수 있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다.

이런 무력을 가진 사람에게 그동안 연민을 느껴왔다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대단한 유운이었습니다.”

“이제 막지 않으시겠지요?”

“저 같은 사람은 열이 와도 사숙의 검을 막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제가 보호를 하겠다고 설쳤으니 정말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닙니다. 저는 사질이 보여주신 호의가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앞으로의 길이 더욱 험하고 힘들 테니 조심, 또 조심해서 나중에 무사히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 생각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면, 언제 떠나실 생각이신지요?”

“객잔으로 돌아가 정리하는 대로 떠날 생각입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만약 사숙들이나 운자배 사형들이 물어오면 의빈으로 갔다고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유현이 말을 받자 운호가 먼저 정중하게 허리를 접어 인사를 했다.

비록 항렬에서는 위였지만 유현은 그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기에 예의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유현의 허리는 그보다 한참이나 아래로 숙여졌다.

나이가 적은 사숙이 먼저 허리를 접자 유현은 최대한의 공경으로 마주 인사를 했다.

이전에는 형식적인 예의가 반쯤 섞여 있었으나 지금은 진심이 가득 차 있다.

무인의 진정한 존경은 무력에서 나온다.

비록 그것이 동문 사이라 해도 무림의 세계에서는 변할 수 없는 철칙이다.

그랬기에 유현은 떠나는 운호를 존경에 가득 찬 눈으로 지켜보았다.

 

운호는 곧장 객잔으로 돌아와 여장을 꾸렸다.

풀어놓은 짐이 별로 없으니 싸는 것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온 풍운대와 운호는 모두 검은색 무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기습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도복을 입은 채 행보할 수는 없었다.

흑색 무복으로 갈아입은 운호의 모습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미남자로 변해 있었다. 옷이 날개라는 사실은 정말 틀림없는 명언이다.

방에서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그사이에 많은 손님이 들어차 있었다.

워낙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인지 점심때가 된 것조차 알지 못했는데 객잔에 들어찬 사람들을 보자 그때서야 배가 하소연을 해왔다.

의빈까지는 직선로로 이백 리. 지금 배를 채우지 않으면 자칫 저녁까지 요기를 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운호는 바쁜 마음을 뒤로하고 객잔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빈자리가 남아 있지 않아 한쪽에 서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객잔에는 삼십여 명의 사람이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얼굴에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전쟁과 상관없는 사람들.

점창과 칠절문의 싸움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평온한 삶을 계속해서 영위해 나갈 것이다.

천천히 사람들을 관찰하며 움직이던 운호의 눈이 멈춘 곳은 전방에서 좌측으로 삼 푼 정도 비켜난 곳의 탁자였다.

그러나 시선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금방 돌려졌다.

활짝 웃는 여인. 건너편 탁자에 앉아 있는 여인이 눈이 마주치자 봄꽃처럼 활짝 웃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 어때?”

“누구? 저기 검은 옷 입은 사람?”

“응.”

“이야, 정말 잘생겼다.”

“그렇지?”

“어라? 옆에 검도 있잖아. 무인인가 봐.”

당운영의 질문에 그녀의 친구인 황보혜가 연신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운호처럼 잘생긴 사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세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황보혜의 행동을 말린 것은 먼저 운을 뗀 당운영이었다.

“저 사람 고개도 못 들잖아. 그만 봐.”

“킥킥, 무척 순진한 사람인 모양이야.”

“그만하라니까!”

“알았다, 알았어. 억울하지만 내가 양보한다.”

“뭘?”

“저 사람, 네가 먼저 발견했으니까 너한테 기득권을 줄게.”

“참나, 별소리를.”

“싫어? 그럼 내가 해?”

“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

“어라, 얘 봐. 정말 마음에 있는 모양이네?”

당운영의 대답에 황보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시로 째려봤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돌을 던졌더니 펄쩍 뛰어오른다.

당운영.

사천의 반을 주름잡고 있는, 당문의 실세 중 실세인 내원당주 당황의 셋째 딸이 그녀의 신분이다.

막강한 배경에 사천에서 소문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지녀 당가오미(唐家五美)에 꼽히는 여인이었다.

그녀와 황보혜는 부친들이 각별한 친우 관계였다. 어릴 때부터 친했기에 당운영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황보혜였다.

당운영은 착한 마음을 가졌고 성격도 활달해 모든 사람이 좋아했으나 지금까지 남자를 사귀어본 적은 없다.

그랬기에 황보혜는 얼굴마저 붉히는 당운영을 새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본 남자에게 이 정도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관심이 가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운호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미남자였다.

“운영아, 넌 오늘 비상이 걸려서 당가타로 돌아가야 된다며? 웬만하면 나한테 넘기는 게 어때? 난 시간도 많다?”

“웃기지 마.”

“지금까지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더니 왜 그래?”

“호호, 마음에 드는 사내가 없었으니까 그랬지. 그런데 저 사람은 정말 마음에 든다. 기다려 봐.”

황보혜의 질책에 활짝 웃은 당운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람들 틈을 지나 여인의 향기를 뿜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운호를 향해 움직였다.

운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녀는 그렇게 다가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말을 건넸다.

“합석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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