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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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26화
도절 상후의 명이 떨어지자 뒤에 시립해 있던 혈룡 중 하나의 손에서 조명탄이 솟아올랐다.
그것을 신호로 환각의 담장을 넘어 비룡단의 무인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의 손에는 뭉툭한 기형 병기가 들려 있었다.
“폭멸궁이다. 제자들은 오성진을 가동하라!”
적들의 손에 들린 병기를 확인하자 운학이 고함을 질렀다.
폭멸궁.
단거리에서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는 변형 화살이다.
당문에서 십 년 전 집단 전용으로 개발한 암기인데 연속 발사가 가능하고 위력이 커서 다수가 한꺼번에 공격하면 엄청난 손실을 입힐 수 있는 무기였다.
하지만 몰랐으면 모를까, 적들의 손에 들린 것이 폭멸궁이란 것을 안 이상 당할 가능성은 적다.
여기에 있는 점창 무인들은 명자배라 해도 당장 강호에 나가면 일류를 상회할 정도로 강한 사람이다.
거기다 다섯으로 구성된 오행진에는 절정으로 들어선 운자배 무인이 둘씩 섞여 있었기 때문에 폭멸궁 따위에 당하지는 않을 터였다.
분광과 회풍에 들어선 무인의 숫자는 모두 합쳐 스물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창 무인들의 무력 수준은 그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상태였다.
그 이유는 분광과 회풍을 익힌 무인들이 직접 후예의 육성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상승 검로에 들어섰다는 것은 검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훨씬 깊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득의.
검의 길을 안다면 가르침이 달라지고 배우는 자들의 속도와 질을 훨씬 효율적으로 끌어 올릴 수 있다.
그랬기에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최고 배분인 청자배 무인들과 점창십삼검이 밤을 낮 삼아 후예들을 가르침으로써 점창 무인들은 태산과 창천의 수많은 둔덕을 노닐 수 있었다.
이것이 명문의 힘이다.
추가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비룡단은 환각으로 떨어져 내리며 폭멸궁을 연속으로 발사했다.
피익, 피잉!
수많은 단살의 연사.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쏟아진 화살이 점창 무인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선두에 선 운학이 먼저 사일검의 방어 절초인 비화(飛花)를 가동시키자 오행진을 구성한 점창 무인들 역시 동시에 비화를 펼쳐냈다.
아름다운 군무.
오행진 속에서 펼쳐진 비화는 꽃들이 허공을 향해 한꺼번에 터져 나가듯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강력하던 폭멸궁이 그들의 춤사위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마치 우산에 튕겨 나가는 빗방울처럼.
단 하나의 화살조차 점창 무인의 옷자락을 건드리지 못했고, 오히려 튕겨진 화살들이 비룡단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비룡단 역시 가볍게 화살을 떨어뜨리며 환각 안으로 들어섰다.
손에 들었던 폭멸궁을 어느새 등 뒤로 돌린 채 점창 무인들을 포위하며 검을 꺼내 들고 있었다.
그냥 온 것처럼 보였으나 철저히 계획을 세운 것이 분명했다.
마룡대를 비롯한 삼대는 점창의 수뇌부를 무시하고 오행진을 펼치고 있는 점창 무인들을 공격했다.
동시에 쌍로가 운풍을 향해 튕겨지듯 움직였고, 금륜오군이 운학을 둘러싸며 금륜을 꺼내 들었다.
청무자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장내를 둘러보다가 천천히 도절 상후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봐, 도절. 누가 이길 것 같으냐?”
“죽을 놈이 별걸 다 묻는구나.”
청무자의 질문에 상후가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풀썩 웃었다.
피와 검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물어올 내용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청무자는 상후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점창은 참 오랜 세월을 기다려 왔다. 가슴속에 한을 쌓은 채 참으면서 사는 건 참 힘든 일이었어.”
“원래 도인은 그렇게 사는 거 아니냐? 무위자연 속에서 아주 우아하게. 속이 뒤집어져도 참으면서 말이지.”
“도인에 대해서 잘 아는 모양이구나?”
“잘 알지. 신선이 되겠다고 설치는 놈들이잖아.”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이런 고생을 해. 곱게 산에서 죽으면 사람들이 신선이 됐다고 생각해 줬을지도 모를 텐데.”
“그랬을까?”
“나라면 그렇게 생각해 줄 거야. 그러니까 너희는 나오는 게 아니었어. 도인이란 자들이 재산이나 권력을 탐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거 아니냐. 그래도 무인이라고 꼴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인데, 힘없는 놈들이 자존심은 무슨. 어쨌든 나온 이상 그냥 보내줄 수도 없게 되었다. 다음 생에는 괜찮은 곳에서 태어나도록. 잘 가거라.”
“그놈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넌 어째서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누가 그러더라. 너는 사람이 아니라 똥개라고. 강호에 나와서 매번 개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쳤으니.”
“맞아. 그런 적이 있었지.”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지금은 옛날처럼 도망치지도 못한다.”
“네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나는 개는 개였으되 똥개가 아니라 미친개였거든.”
“똥개든 미친개든 상관없다.”
“크크크, 도절, 아마 엄청난 상관이 있다는 걸 곧 알게 될 거다. 그리고 무림이 청무자란 미친개에 의해서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지켜보거라. 내가, 이 정풍검이 다시 강호에 나온 기념으로 네 목숨만은 살려주마.”
“미친놈. 뭐해? 죽여!”
혈룡들이 다가서며 검을 뽑아 들자 청무자는 그들의 포위망에 스스로 갇혔다.
상후는 혈룡이 청무자를 포위하는 순간 이마를 찌푸린 채 슬그머니 뒤로 물어났다.
뭔가 이상하다.
개인이 다수를 상대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포위되지 않은 채 최소한의 인원과 상대하는 것이다.
누가 일부러 설명하지 않아도 칼밥을 먹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 대 다수의 싸움은 속도전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청무자는 오히려 느긋하게 포위망 안으로 들어왔다.
이런 경우는 두 가지뿐이다.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단시간에 승부를 봐야 할 때와, 막강한 무력으로 포위망을 부술 자신이 있을 때.
청무자는 어떤 경우인가?
전투가 막 시작된 지금 청무자는 시간에 쫓길 이유도, 위험을 무릅쓴 채 단숨에 승부를 볼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무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인데 예전의 청무자를 떠올린다면 절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다.
상후는 눈살을 찡그리며 청무자를 노려봤다.
혈룡은 대주들과 비슷한 무력을 지닌 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이 수련한 사멸진은 자신이라 해도 감당이 어려울 정도로 막강하다.
그런데도 청무자는 태연하게 혈룡들 사이에 서 있다.
경륜(徑輪).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경륜이 깊어진다.
경륜이란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행할 때 합리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말한다.
무림에서 인생을 살아온 상후의 눈은 다른 사람의 경륜보다 훨씬 깊었다.
정확한 판단은 목숨을 거는 전장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랬기에 상후는 매서운 눈으로 전장을 관찰했다.
싸움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전장은 자신의 예측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무령대를 비롯한 삼대의 공격은 점창 무인들의 연환오행진에 막혀 꼼짝하지 못했고, 쌍로와 금륜오군의 공격 역시 생각만큼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운풍과 운학의 무력은 쌍로와 오군이 금방 어쩌지 못할 정도로 강력했는데, 가끔 가다 쌍로와 오군의 신형이 휘청거리며 물러나는 것도 보였다.
대등한 싸움.
쌍로와 오군과 맞상대할 정도면 자신의 무력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점창의 무력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아무리 운풍과 운학이 점창십삼검에 속하는 강자들이라고는 하나 쌍로와 오군을 상대로 저리 팽팽하게 싸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각이 생각을 물고 꼬리처럼 늘어져 금방 판단이 내려지지 않았다.
이마의 주름이 더욱 깊어지고 눈은 가늘어졌다.
그때 청무자가 검을 뽑는 것이 보였기에 상후는 생각을 멈추고 전장으로 눈을 고정시켰다.
청무자는 혈룡들의 공격이 시작되자 검을 들고 회전하며 섬전(閃電)을 펼쳤다.
그야말로 번개가 무색할 만큼 강력한 일격.
사일검의 선초 섬전은 제일 먼저 왼쪽 어깨를 노리고 들어온 혈룡을 튕겨내고, 뒤이어 오른쪽 허벅지로 들어온 검을 비틀어낸 후 앞으로 진격했다.
진격하면서 곧장 공중에 뜬 채, 검을 휘두르는 자의 몸통을 향해 풍영(風影)을 쐈다.
바람의 그림자 풍영.
말 그대로 바람처럼 빠르며 그림자처럼 은밀하다.
풍영의 잔영이 허공을 가득 채웠다가 희미해져 갈 때 청무자의 신형은 어느새 일 장이나 뒤로 물러나 월파(月破)를 펼치고 있었다.
단 한 번의 동작만으로 세 초식을 연환해 펼친 청무자의 신형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세 명의 혈룡은 몸을 고정시키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균형이 허물어진다는 것은 상처를 입었다는 뜻이다.
그것도 적지 않은 상처를.
예상은 정확했다.
비틀거리던 혈룡들은 제각각 어깨와 옆구리, 허벅지 등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금방 균형을 회복하고 냉막한 표정으로 재차 공격을 감행해 왔다.
고수의 움직임은 이처럼 냉철하다.
당한 자의 움직임이 이럴 지경이니 생생한 자들은 오죽하겠는가.
혈룡들은 사멸진을 형성시킨 채 세 명씩 공격해 왔는데 연환되는 공격의 방위는 일곱이었다.
즉 선두가 전후에서 공격했다면 다음 조는 좌우였고 그다음은 상중하를 노렸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속도였다.
세 명의 공격이 순차적이다가 동시에 이루어졌고, 속도의 차이도 급격하다가 미세했기에 방어가 무척이나 어려운 합격진이었다.
더군다나 셋이 한 몸처럼 움직이니 쏘아진 내력의 기파가 응집되어 고스란히 청무자의 전신을 노렸다.
사일검법의 전삼식을 태산이라고 부른다.
검법의 기조가 육중하면서 빠르고 강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중삼식은 창천이다.
강함 대신 무수한 변화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인데 유로써 강을 제압하는 묘리가 검법 전반에 숨어 있었고, 이화접목의 수법이 가미되어 공격과 방어가 구별이 되지 않을 만큼 심오했다.
혈룡들의 연환 공격이 점점 강해지자 청무자는 거침없이 창천을 꺼내 들었다.
낙영(落英)을 펼쳐 먼저 들어온 세 명의 혈룡을 뿌리친 청무자는 곧장 뒤따르는 혈룡들을 목표로 무영(無影)을 펼쳤다.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검초.
손을 떠난 검이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쏘아져 나갔다.
검이 사라질 수는 없는 일. 그만큼 빠르다는 뜻이다.
무영은 검초의 익힘 정도에 따라 검의 잔상 정도가 다른데, 청무자의 무형은 완벽한 빈 공간을 보여주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방어가 어렵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혈룡들은 단숨에 격살시키겠다는 일념으로 공격에 치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무자의 공격은 더욱 큰 치명상을 남길 수 있었다.
“으윽!”
연이은 비명이 터지며 혈룡 중 셋이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다.
다시 일어나지 못할 정도의 중상.
몸에서 핏줄기가 솟구치고 있었는데, 중요한 혈들이 파손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셋이 쓰러짐에 따라 사멸진의 가동도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
계속 공격할 수도 있었으나 도절이 끼어들며 막았다. 나머지 혈룡들은 도절을 중심으로 좌우에 늘어서서 청무자를 죽일 듯 노려봤다.
그러나 도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탈명도를 꺼내 들었을 뿐이다.
“여어, 청무자. 제법 하는구나.”
“놀라긴, 시작도 안 했다.”
“푸하하!”
청무자의 대답에 상후의 입이 열리며 커다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웃음을 그치지 않은 채 탈명도를 툭툭 두드렸다. 혈룡들이 다쳤음에도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찜찜함이 없어지고 즐거움이 가득 차 있었다.
청무자의 검이 예상한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진 전부라면 자신이 나서는 순간 청무자의 죽음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빠르고 강해졌구나. 하지만 그 정도 가지고는 아직 멀었다.”
“덤비기나 해. 자꾸 주절거리지 말고.”
“이십 년 동안 산속에 숨어서 한 것이 겨우 그거란 말이냐. 참으로 불쌍하구나.”
“칼이나 들어, 이 새끼야. 그러다 칼도 꺼내보지 못하고 죽는 수가 있으니까. 아까 말한 대로 목숨만은 살려주마.”
“도사라는 놈이 주둥이가 더럽구나. 그 입부터 찢어버리겠다.”
“점창에 사는 사람들은 그냥 도사가 아니다.”
“그럼 뭔데?”
상후의 반문에 청무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웃음은 싱그러웠고 자신감으로 넘치고 있었다.
“당한 것은 반드시 갚는 독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