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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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25화
풍현(風縣).
사천과 운남을 잇는 요충 도시로서 인구 삼만을 헤아릴 정도로 커다란 도시다.
운남의 특산물을 실어 나르는 상인들이 북적이고, 사천의 음식과 문화를 운남으로 전하는 식객과 묵객으로 붐비는 도시가 바로 풍현이다.
풍운대는 풍현에 도착하자 운호와 운상을 떼어놓고 곧장 사천으로 진입했다.
새벽에 출발해 해가 지는 시간에 도착했으니 한나절을 꼬박 달려 온 것이었지만 운곡은 쉴 틈도 없이 풍운대를 이끌고 급히 길을 나섰다.
지체해선 안 되는 중요한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점창이 오 년 동안 봉문에 가까울 정도로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내지 않았다 해도 정보마저 문을 닫아 걸은 것은 아니었다.
무정현은 점창의 땅이었으니 아무리 은밀하게 들어왔다 해도 점창의 눈을 속일 수 없다는 걸 비룡단주는 알지 못했다.
거기에 덧붙여 점창은 운남에 있는 속가들을 총동원해 칠절문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전면전을 시작하면서 사천으로 수많은 세작을 파견해 병력의 이동을 철저히 파악하고 있었다. 쌍로와 오군이 철령산을 넘어 급속히 남하하고 있다는 정보는 그들이 학경을 넘어설 때 접수되었다.
정보는 입수했으되 조치를 취할 수는 없었다.
철령산은 무정현과 근접해 있으니 현재 점창에서 그들을 막을 병력은 전무했다.
대처 방안은 오직 하나.
청무자가 이끄는 병력이 그들을 포함해 비룡단 전원을 상대하는 길뿐이다.
그랬기에 운곡은 무서운 속도로 사천으로 진입했다.
쌍로와 오군뿐이라면 모를까, 더 많은 병력이 넘어온다면 청무자가 이끄는 부대는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풍운대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했다.
더 이상의 지원군이 운남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사천을 헤집어놓아야 주력 부대의 싸움이 편해질 수 있었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한 번만 더해, 그 소리. 사내놈이 계집애처럼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너, 우리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그래?”
“알지, 중요하단 거. 하지만 네가 사천에 못 간 건 순전히 나 때문이잖아. 여기 일이 중요해도 사천만 하겠어.”
운호가 여전히 미안한 표정을 짓자 운상이 입맛을 다셨다.
아직까지 운상은 운호의 출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와 함께하는 것은 미치고 펄쩍 뛸 정도로 기쁜 일이었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풍현의 일이 중요하다며 운호를 안심시켰으나 어찌 사천으로 가고 싶지 않을까.
분명 피가 튀는 혈전의 연속이 될 터였으니 사형들과 함께 미친 듯 검을 휘두르며 점창의 혼을 불사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마음을 숨기고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방금 전에 무정, 영인, 학경에 있던 칠절문 지부가 종적을 감췄다는 정보가 입수됐어. 놈들이 우리 움직임을 꿰뚫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 계획을 눈치채고 뒤로 빠진 거라면 풍운대가 위험해져.”
“나도 그게 걱정이다. 그래서 말인데, 운호야.”
“말해.”
“아무래도 조인 쪽으로 자리를 옮겨야 될 것 같아.”
“놈들을 찾겠다는 뜻이냐?”
“맞아.”
“풍현은 어떡하고. 속가들의 정보가 이곳 풍현으로 들어오잖아.”
“그러니까 너는 여기 있어야지.”
“너만 가겠다고?”
“하루면 충분할 거야. 그때까지만 맡고 있어.”
“만약 그자들이 사천으로 후퇴한다면 너도 사천으로 넘어가야 될 텐데?”
“그건…….”
“하루가 아니라 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좋아. 여긴 내가 맡을 테니 넌 조인으로 가라. 사형들의 안전이 최우선이니 잘해.”
“괜찮을까?”
“내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다.”
운호가 결정짓듯 단호하게 말하자 운상의 고민이 슬며시 걷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걱정은 가시지 않은 얼굴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사형이 자신을 운호에게 붙여놓은 것은 그의 안전이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내공이 없는 운호가 적에게 노출된다면 커다란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상상하기조차 싫은 내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인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도 없다. 현재 상황으로 봤을 때 풍운대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
조인으로의 출발은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이 될 것이 분명했다.
“사숙, 그자들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속가에서 백방으로 뒤지고 있는데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찾을 필요 없다.”
“무슨 말씀이신지?”
“곧 그들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야. 쌍로와 오군이란 자들이 합세했다고 하니 우린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난 놈들이 가만있겠어?”
불같은 성격을 가진 청무자였으나 부대를 이끌고 강호로 나오자 정말 정풍검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매사에 침착했다.
그는 점심 무렵 비룡단이 사라졌다는 운풍의 보고를 받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참을 생각하더니 제자들을 환각으로 이동시켰다.
환각은 청소하던 노인마저 사라져 완벽하게 텅 빈 상태였다.
운풍을 시켜 제자들을 분산 배치시킨 뒤, 그는 대청에 느긋하게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운풍, 운학과 함께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비룡단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들의 정보망이 점창의 움직임을 사전에 알아챘다는 뜻이다.
당연히 노출될 거라 판단했기에 급속 북상했지만 비룡단은 몸을 숨겼다.
유리한 싸움을 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하지만 놈들은 다시 온다.
산에서 내려온 점창 전력이 세 개로 나뉘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 놈들은 전면전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칠절문은 그만큼 호전적이고 강한 전력을 가진 집단이었다.
“술 안 주냐?”
“이런 젠장. 산에 무슨 술이 있어?”
“그래도 먼 길 달려왔는데 뭐라도 줘야지. 난 그 뭔가가 술이었으면 해.”
완벽하게 머리가 흰 노인이 도절 상후를 보며 뻔뻔스럽게 생떼를 썼다.
하지만 상후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 대신 반가움이 가득했다.
전막.
도절 앞에 앉아 있는 두 노인을 합쳐 강호인들은 홍염쌍로라 불렀는데, 흰머리를 한 노인이 엽문이고 키 작은 노인이 환사다.
그들의 독문 무공은 홍염장.
독특한 내공에서 발현되는 홍염장은 격중되는 즉시 내공을 상실케 만드는 위력이 있어 상대하기 까다로운 난공이었다.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합격하는 비술은 상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막강해 전왕이 십오 년 전 직접 초빙했다고 알려진 인물들이다.
오랜 세월 친구처럼 지내온 사이이기 때문에 엽문의 생떼에도 상후는 가릉거리며 즐거운 웃음을 지었다.
“잘들 지냈어?”
“그럼 잘 지냈지. 공짜 밥 얻어먹으려니 마음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렇기도 했을 거야. 우리 문주님이 그런 것엔 눈치를 주거든.”
“내 말이 그 말이다.”
“하여간 오랜만에 밥값 좀 해.”
“청무자라고?”
“점창십삼검 중 운풍과 운학이 같이 왔다더군.”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구먼. 청무자라면 오래전부터 동네북이 된 놈 아니냐.”
“이십 년 전 얘기잖아.”
“안 되는 놈은 안 돼. 개나 소가 사람 되는 거 봤어?”
“청무자가 들으면 거품을 물겠구만. 그래도 오랜만에 하는 싸움이니 몸들 조심해. 괜히 허벅지 베었다고 금창약 발라달라 떼쓰지 말고.”
“클클클, 삭신이 녹슬어서 잘 움직여질지 모르겠지만 뭐 어쩌겠어. 밥값 하라고 등 떠미니 움직여야지. 언제 할 건데?”
“한 시진 후에.”
“거참, 지금 막 도착했구만. 알았으니까 술이나 내와.”
“술 없다니까.”
“까불지 마. 도절이 술을 안 가지고 다니면 죽을 때가 된 거야. 좋은 말로 할 때 안 내놓으면 다 뒤집어놓는다?”
“알았다, 알았어. 딱 한 병만이야!”
환사가 정말로 뒤질 기세를 하며 벌떡 일어나자 여전히 웃는 얼굴의 상후가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그리고는 한쪽 구석에서 주섬주섬 술병을 꺼내 들었는데 한동안 뒤적거린 그의 손에는 육포도 따라 나왔다.
“빈집에 소가 들어왔군.”
“그렇군요. 아주 재밌는 비유십니다.”
환각을 지켜보던 비룡단주 상후가 입을 열자 옆을 지키던 마룡대주 갈천이 빙긋 웃었다.
그는 환각에서 운풍과 마주했던 노인인데 허리를 펴고 긴 수염을 떼자 그때보다 스무 살은 젊게 보였다.
그 옆으로 좌측에는 쌍로가, 우측에는 검은 죽립을 쓴 다섯 사내가 칙칙한 어둠을 뿜어내며 서 있었다. 나머지 전투부대의 대주들은 보이지 않았다.
죽립을 쓴 사내들은 칠절문의 비밀병기라 불리는 금륜오군이다.
그들은 안휘를 기반으로 활동하다가 남궁세가와의 충돌로 사천까지 넘어온 자였다.
검의 종가, 남궁세가의 추격을 가볍게 뿌리칠 만큼 대단한 무공을 지녔기에 혁기명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을 받아들였다.
남궁세가와의 관계가 다소 불편해지겠지만 그것을 감내할 정도로 금륜오군의 무공을 인정했다.
상후는 한참 동안 환각에서 시선을 떼지 않다가 뒤쪽에 선 사람들을 힐끔 쳐다본 후 고개를 한 바퀴 돌렸다.
그 모습에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마치 제 집 안방처럼 퍼질러 앉아 있구만.”
“죽기 전의 안락함이겠지요.”
“애들은?”
“세 방향에서 대기 중에 있습니다.”
“그럼 시작하지. 가봐.”
“명을 받듭니다.”
상후가 손짓하자 마령대주 갈천이 깊게 허리를 숙인 후 신형을 날렸다.
환하게 밝혀진 환각의 주위로 셀 수 없는 그림자가 포진한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숙, 놈들이 왔습니다.”
“생각보다 조금 늦었군.”
운학이 다가와 보고하자 청무자가 검을 들고 일어섰다.
그는 여전히 한 올의 긴장감도 내비치고 있지 않았는데, 뒤를 따르는 운학과는 완벽하게 상반된 얼굴이었다.
빠르게 걷지 않았는데도 잠깐 만에 정문을 응시하고 있는 운풍이 눈에 들어왔다.
점창 무인들은 다섯 명씩 짝을 지어 방어선을 형성하고 적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시위가 당겨진 활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그들 사이에 흘렀다.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마치 반가운 손님을 기다리기 위해 활짝 열어놓은 것처럼.
재밌는 것은 칠절문의 행동이었다.
마치 점창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그들도 정문으로 덤덤하게 들어섰는데 정말 손님같이 보일 지경이었다.
정문을 통해 청무자의 앞에 선 인원은 모두 열여덟.
비룡단주를 비롯해 혈룡들과 쌍로, 오군.
그들은 태연하게 걸어 들어와 청무자의 삼 장 앞에 멈추어 섰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강렬한 기세였지만 청무자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들을 맞아들였다.
“주객이 전도되어 민망하구먼. 이봐, 도절. 어디 갔다 이제 오나. 손님 든 지가 언젠데.”
“바람 쐬러 갔다 왔다고 하면 믿을 텐가?”
“다른 변명을 대봐. 그건 너무 상투적이잖아?”
“하하, 그런가? 그런데 자네 많이 컸군.”
“뭐가?”
“예전에는 눈도 못 마주치더니 많이 컸어.”
청무자의 여유로움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상후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웃음을 지었다.
완전히 무시하는 행동.
그는 이십 년 전의 일을 회상하며 청무자를 완벽하게 무시했다.
이십 년 전 청무자는 사천의 단양에서 단천도에게 죽을 고비를 맞은 적이 있었다.
가슴과 옆구리에 삼검을 맞고 검을 꺾은 청무자는 눈물을 흘리며 비 맞은 개처럼 불쌍하게 돌아갔다.
단천도는 자신의 수하인 마령대주 갈천과 비슷한 무력 수위를 가진 자였으니 충분히 비웃을 만했다.
하지만 상후의 눈은 말과 다르게 웃고 있지 않았다.
오직 비웃고 있는 것은 그의 말과 얼굴뿐.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은 너무 깊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강호의 노련한 늑대의 격장지계.
그러나 청무자는 전혀 반응하지 않고 재미있다는 듯 고개만 끄떡일 뿐이다.
“그 새끼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눈병이 나서 그랬을 테지. 설마 네가 무서워서 그랬을라고.”
“늙더니 말을 잘하는군.”
“네 부하들은 담장 밖에 있냐? 들어오라 그래. 한꺼번에 끝장 봐야지, 두 번 손질하기 귀찮다. 우리가 시간이 없기도 하고.”
“시간이 왜 없는데?”
“사천엘 가야 하거든. 거기에 전왕인가 지랄인가 하는 놈한테 빚 받을 게 있어서.”
“말만 잘하는 게 아니라 맵기도 하구나. 하지만 거기까지. 죽을 놈이라 봐줬더니 까부는 게 도가 지나쳐. 이제 주둥이질 그만하고 죽도록. 혈룡!”
“예, 단주님!”
“시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