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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23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9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풍운사일 23화

운여와 운상은 다른 사형들보다 먼저 도착해 운호를 찾았다.

같은 나이에 같은 항렬.

친구로 맺어져 오랫동안 살아왔으니 그 누구보다 운호의 처지에 애태운 사람들이다.

벌써 그들의 나이 스물셋.

코 흘리던 아홉 살에 만났으니 벌써 십사 년이나 지났다.

줄곧 살을 맞대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으나 그 오랜 기간 만들어낸 정이 어찌 얕겠는가.

운호가 풍운대를 떠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무력의 격차가 생각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사숙도 사형들도 운호가 풍운대에서 이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러한 사실을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것은 미친 듯 열망하는 운호의 집념이 그들의 가슴에 깊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종 운호.

내력이 없는 몸을 가지고 미친놈처럼 수련하는 그의 모습은 진정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가끔 가다 드러나는 그의 절망을 슬그머니 못 본 체 고개를 돌려야 했다.

언제나 밝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운호였으나 숲 속 깊은 곳에서 억눌린 울음을 지을 때마다 운여와 운상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곤 했다.

위로해 준다고 해서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진심으로 운호의 고통을 나누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절대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더욱 안타까워 운호의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수련에 바빠도 혹시나 운호가 외로워할까 봐 그들은 번갈아가며 운호의 곁을 지키곤 했다.

아쉬운 이별의 시간.

오늘이 지나면 보지 못할 테니 일찍 수련을 접고 먼저 숙소로 돌아왔다.

다른 사람한테 방해받지 않고 친구들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숙소에 도착한 후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실의에 빠져 있을 거라 생각한 운호는 숙소를 온통 들쑤셔 놓은 채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온 것도 모를 만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뭐하냐?”

“보면 몰라? 짐 싸고 있잖아.”

“그러니까, 그걸 네가 왜 하냐고?”

“내일 출전이니까 정리해야지.”

“그만둬. 우리가 할게.”

“거의 끝났다. 수련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저기서 쉬고 있어.”

“내가 한다니까!”

운호가 웃는 얼굴로 대답하자 운상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런 게 싫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슬프면 슬프다고 해주길 바라는데 운호 이놈은 항상 이런 식이다.

그렇기에 괜히 화가 났다.

지금도 운호는 슬픔을 견뎌내기 위해서 일부러 몸을 바쁘게 만들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면서 바보처럼 웃는다.

빗자루를 뺏어 든 채 운상이 휘적휘적 널브러진 옷가지며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운호가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화를 내는 이유를 알면서도 갑작스럽게 소리를 치며 성질을 내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슬그머니 다른 일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벌여놓은 것이 많기 때문에 운상한테 맡겨놓고 쉴 처지가 안 된다.

그때, 운여가 다가오며 슬며시 운호의 등을 툭 쳤다.

“짐 쌌냐?”

“응? 응.”

“어디로 가라는 말씀은 없었고?”

“아직. 나중에 말씀해 주시겠지.”

운호는 대답하면서 울적한 표정을 짓는 운여를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운여는 마음이 여려 저런 표정을 자주 짓는다.

그래서 그를 대할 때마다 운호는 더욱 활짝 웃었다.

“사형들은?”

“우리만 먼저 왔다. 우리끼리 오붓이 이야기라도 하려고.”

“사내놈들끼리 무슨 재밌는 얘깃거리가 있다고. 괜한 짓을 하고 있어.”

“이놈아, 넌 왜 그리 야박하냐?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분위기 좀 잡으면 어때!”

“분위기는 무슨. 비가 올라나, 날씨도 우중충하구만.”

“하긴 그것도 어렵겠다. 이렇게 홀랑 뒤집어놨으니 정리하기도 바쁘겠어. 많이도 뒤집어놨다. 사형들 오기 전까지 정리가 될지 모르겠네.”

“오 년 세간이 오죽하겠어. 저쪽에 있는 건 버릴 거니까 건드리지 마. 그리고 이쪽은 개인 용품을 정리해 놓은 거니 니들 짐부터 싸. 야, 운상아. 성질 그만 부리고 이리 와서 짐 싸라니까.”

“싫다, 인마!”

“그놈 성질하고는.”

 

셋이서 부지런히 움직여 숙소 정리를 끝마치자 운몽을 선두로 사형들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끔하게 변해 버린 숙소를 확인하고 탄성을 질렀는데, 운극은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내들끼리만 모여 살았고, 더욱이 무공을 수련하느라 거의 매일 밤늦게 돌아왔으니 방을 치우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때문에 숙소는 거의 난장판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청소하자는 소릴 한 적도 없다.

무공을 익히는 것만 해도 부족한 시간을, 청소하는 데 소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무언의 약속으로 청소에 대한 게으름을 용납했다.

하지만 이렇듯 치워놓고 나니 새삼 눈이 다 시원해졌다.

“이놈들아, 미리 치워놓고 살았으면 얼마나 좋아. 떠날 때가 되니 철이 들어?”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저건 왜 안 쌌어?”

“사형들 개인 물품이라서 그냥 모아만 놨습니다. 정리해서 쌀까 하다가 아무래도 직접 하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까칠한 성격이 죽은 건 아니지만 운상의 대답을 들은 운몽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개인 용품은 당사자가 싸야지, 다른 사람이 싸면 대부분 다시 해야 했다.

운몽은 풍운대의 잡일을 도맡아했는데 대사형인 운곡의 팔다리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원래는 운검이 해야 할 일이었으나 무공에 미친 운검은 그런 쪽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금도 운검은 한쪽 침상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중이었다. 수련에서 미진한 점을 생각하며 상상 수련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운몽은 운천과 운극을 향해 입을 열며 자신의 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뭣들 해. 얼른 짐 싸자.”

“대사형께서는 어디 가셨습니까?”

“아까 사숙께서 호출하셔서 갔다. 곧 돌아오실 게다.”

운여의 물음에 운몽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고 자신의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흘끔 운호를 바라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도 지금 눈을 감고 있는 운검도, 그리고 늦게 나타난 사형들도 운호의 얼굴을 한 번씩 훔쳐봤다.

입을 열어 위로를 해준 사람은 없었다.

사내들은 가끔 백 마디 말보다 말없는 침묵이 훨씬 더 가슴속의 감정을 잘 나타내는 법이다.

 

운곡이 나타난 것은 사형제가 모두 자신의 짐을 꾸린 후 여기저기 흩어져서 쉬고 있을 때였다.

그는 들어서며 사제들을 불러 모았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출발은 진시다. 모두 떠날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

“저희는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사형, 청문 사숙께서는 어쩌신답니까?”

“사숙께서는 함께 가시지 않는다.”

“그럼 우리만 갑니까?”

“그렇다.”

운검의 질문에 답하면서 운곡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그의 나이 서른.

적지 않은 나이였으나 이번이 강호 초출이고 더욱이 풍운대 단독으로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압박감은 무척이나 컸다.

강호에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삼십팔무맥 중 하나인 칠절문과 생사를 건 일전을 치르기 위함이니, 풍운대를 이끌어야 하는 운곡은 그간의 여유로움을 보이지 못했다.

그건 다른 풍운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그들을 가르치던 청문 사숙이 함께 움직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니 난감한 생각이 들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운검은 잠깐의 침묵을 깨고 다시 질문했다.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먼저 무정현으로 간다.”

“문의 주력도 그쪽으로 가겠지요?”

“그렇다.”

“그럼 같이 가지 않는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게 뭡니까?”

“우리는 무정현 싸움에 가담하지 않는다. 곧장 무정현으로 가되, 거기서 싸움이 벌어지면 칠절문이 있는 사천으로 들어가 주력을 기다린다.”

“기다리기만 한단 말입니까?”

“그럴 리가 없지. 우린 주력이 오기 전까지 사천을 휘젓는다. 이번 싸움은 운남이 아니라 사천에서 하자는 게 사숙들의 생각이시다.”

“놈들의 주력이 운남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임무군요.”

“그렇다.”

“그렇다면 위험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는 것이다. 우리는 풍운대가 아니냐.”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사천의 기습 작전에 운호와 운상을 뺀다. 운호와 운상은 풍현 근처에서 문의 주력과의 연락을 맡도록.”

“운호도 가는 겁니까?”

“청문 사숙께서 그리 결정하셨다.”

 

호롱불에 비친 노인의 얼굴은 한껏 주름지고 피부의 윤기마저 사라져 죽은 사람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거기에 검버섯까지 군데군데 피어 있고 허리마저 구부러져, 앉아 있음에도 지팡이를 의지해야 할 정도로 노쇠했다. 노인은 바로 청허자였다.

점창 최고 배분 장로로서 오직 사문의 번영을 위해 혼신을 다해온 그는 앞에 앉아 있는 사제들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흘러내리는 눈물.

평생을 꿈꾸며 기다린 순간이었으나 자신은 늙고 병들어 함께하지 못한다.

대업을 앞에 둔 사제들에게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아쉬움에 새어 나오는 눈물을 막지는 않았다.

“청자배 열 명의 형제 중에 겨우 셋이 나서는구나. 장문인이야 그렇다 쳐도 둘은 죽고 셋은 병들었으니 세월이 야속하기만 할 뿐이야.”

“몸은 떨어져도 마음은 한결같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사형의 염려와 의지를 가슴에 명심하고 신중하게 움직일 테니 염려 놓으십시오.”

“청명.”

“예, 사형.”

“위로 다섯이 전부 부재중이니 자네가 책임잘세. 이 일전에 점창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걸 명심해 주게.”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칠절문과 달라서 한 번 삐끗하면 그걸로 끝이야.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단 말일세.”

“그리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무사히 데려오시게. 그들을 잃어버리면 이 싸움은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야. 알고 있지?”

“전쟁에서 부득이한 손실은 어쩔 수 없을 테지요. 하지만 사형의 말씀이 지당하니 제 육신과 아이들의 목숨을 맞바꾸겠습니다.”

“그리해 주게.”

당부하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거기에 담긴 뜻은 강했다.

자신의 죽음으로 제자들을 지키겠다는 청명자나, 그리해 달라고 부탁하는 청허자나 가슴속에 들어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점창의 비상과 번영뿐이었다.

그랬기에 청허자는 섬뜩한 청명자의 대답에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무정현에 들어온 자들은 비룡단이라 하더군. 삼 개 대가 들어와 자리 잡았다고 하니 옛날처럼 간을 보는 중인 것 같아. 계획은 세워졌나?”

“청무 사형이 운풍과 함께 잡는 것으로 계획했습니다.”

“자네와 청명은 차단할 생각인가?”

“차단과 더불어 사천에서 운남까지 이어진 칠절의 고리를 완벽하게 끊어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승부가 쉬워집니다.”

청문자의 얘기는 청무자가 무정현에 들어온 비룡단을 처리할 동안 사천까지 이어진 칠절문의 분타들을 모두 정리하겠다는 뜻이다.

기습.

시간이 생명인 작전이다.

그랬기에 노회한 청허자는 바로 걱정을 나타냈다.

“전왕에게는 머리가 뛰어난 천수가 있지. 우리의 생각을 읽을 텐데 걱정이군.”

“시간 싸움입니다. 누가 더 빨리 움직이느냐에 달렸지요. 그래서 변수를 마련했습니다.”

“변수라?”

“풍운대를 사천에 보낼 생각입니다. 사천을 치면 놈들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 아이들을 사지에 보낸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일세.”

“사형께서 알다시피 우린 가동할 수 있는 전력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안 돼. 다시 고려하도록 해. 그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풍운대는 화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수많은 비바람을 맞고 자라는 잡초가 되어야 진정한 무인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충분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사형, 저를 믿어주시지요.”

“끙!”

담담한 청문자의 대답에 청허자의 입에서 돌 떨어지는 소리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자칫 잘못하면 점창의 미래가 사천에서 한꺼번에 덧없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청문자를 향해 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전장에도 나가지 못하는 뒷방 늙은이의 걱정이 험한 길을 가야 하는 사제들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우려되어 한숨만 흘려냈다.

여유 없는 전쟁.

사문의 비상이 시작되는 전쟁이었으나 점창은 한 올의 여유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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