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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22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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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풍운사일 22화

깊고 깊은 눈.

예전에도 청문자의 눈을 볼 때면 깊은 수렁에 빠진 것처럼 눈을 돌릴 수 없었는데, 지금 풍운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너무나 깊고 진해 호흡마저 멈추도록 만들 정도였다.

그의 이야기는 그런 눈으로 시작되었다.

“점창은 이맘때면 언제나 홍단이 핀다. 홍단이 활짝 필 때면 온 산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붉게 변하지. 보아라, 운곡. 그렇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청문자가 붉게 변해 버린 산을 바라본 채 묻자 운곡이 감정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청문자가 바라보는 적화봉은 말 그대로 온 산을 불태우는 단풍으로 가득 차 있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언뜻 석양처럼 보일 지경이다.

천천히 몸을 돌린 청문자의 눈은 어느새 고요함에서 강렬함으로 변해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시선이고, 그 시선은 지금 온 산을 불태우고 있는 홍단과 비슷했다.

“점창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나는 선조들이 쌓아올린 명예를 시궁창에 처박은 죄인 중의 죄인이다. 목숨이 아까워 검을 빼 들지 못했고, 무력이 부족해 분노를 목구멍 속으로 삼킨 채 눈물만 흘렸지. 그 세월이 무려 오십 년이 넘었으니 참으로 길고 긴 시간 동안 나는 무인으로서의 명예를 더럽히며 이곳 점창산에서 배고픈 토끼처럼 코를 박고 살아왔다.”

그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감정의 잔상.

가슴속에 품어온 한이 소리가 되어 흘러나오니 그 소리가 온전할까.

그렇게 청문자는 격정적인 음성으로 풍운대를 향해 마음속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무인으로서의 명예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에게는 오직 힘을 잃고 쓰러져 가는 점창을 되살리는 것만이 유일한 신념이었으니, 나 하나의 명예는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다. 무림의 법은 오직 하나, 무력에서 나오는 것.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점창이 천대와 멸시 속에서 살아온 이유는 오직 하나,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칠절문이 무정현에 들어와 점창을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든 것도, 그것을 빌미로 형제라고 떠벌리던 명문 정파들이 오 년 전 우리를 십대문파의 지위에서 밀어낸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하지만 그들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하나씩 되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선두에 너희가 선다. 강호에 점창이 건재하다는 것을, 점창의 도인들은 받은 만큼 반드시 돌려주는 독종임을 천하에 알려라. 청운자께서 죽음으로 세상에 알린 점창의 힘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음을 세상에 각인시킨다. 알겠느냐?”

“예, 사숙!!”

“출발은 칠 일 후다. 그때까지 마지막 수련에 매진하라.”

 

청문자의 방문을 끝으로 사형제는 모두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칠 일 후의 출전.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풍운대.

격동의 회오리가 몰아치는 강호로의 출전은 사형제의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음이 분명했다.

그날 이후로 그들은 숙소에 돌아오지 않았고, 황계의 곳곳에서는 밤이 늦도록 돌풍이 몰아치는 기현상이 수시로 발생했다.

그러나 운호만은 숙소를 지키며 시간이 지나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출전을 알리면서 청문자는 운호의 눈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타는 듯한 시선이 풍운대원들을 하나씩 쏘아보며 그가 지닌 가슴속의 전의를 전달했지만 오직 운호에게만은 그 시선을 나눠주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너무나 잘 알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동안은 사숙의 배려와 사형제들의 정 때문에 같이 생활할 수 있었으나 강호로의 출정이 결정된 이상 운호는 풍운대를 떠나야만 했다.

무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그가 함께한다는 것은 풍운대에 치명적인 약점을 만드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그랬기에 운호는 사형제들이 돌아오지 않는 빈집을 지키며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청문자가 말한 출전일은 내일.

내일이 되면 운호는 사랑하는 사형제를 떠나 점창의 일반 문도가 되어 천존의 품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밖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감은 채 도덕경을 암송하고 있을 때였다.

안 들리던 소리가 들려올 때는 분명 이유가 있는 법.

바람 때문이라면 눈을 뜨지 않았을 것이지만 지금은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저녁이다.

더군다나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그에게 빨리 나오라고 독촉하는 것처럼 급했다. 운호는 좌정을 풀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문고리를 열고 나서자 희뿌연 신형이 지팡이를 두드려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운호를 밖으로 나오게 만든 그 소음이다.

“사숙께서 어쩐 일로…….”

상대를 확인한 운호가 급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자 지팡이를 거두며 청문자가 입을 열었다.

“검을 들라.”

사숙의 명에 어쩔 수 없이 검을 든 운호는 청문자가 자신의 애검을 풀어 손에 든 채 다가오자 입을 떠억 벌렸다.

청문자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압박감이 전신을 옭아매는 듯 다가왔기 때문에 운호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청문자의 검이 우에서 좌로 툭 내려오며 운호의 검을 때렸다.

그때부터 청문자와 운호의 진검 대련이 시작되었다.

진검 대련은 강호상에서도 극히 꺼리는 행위다. 특히 동문 간은 철저하게 금지하는 일이었으나, 청문자는 일언반구 없이 운호를 압박해 들어왔다.

처음에는 유운검으로 시작해 어느새 사일검으로 넘어와 전삼식인 섬전(閃電), 풍영(風影), 월파(月破)가 번개처럼 펼쳐졌고, 중삼식인 낙영(落英), 비화(飛花), 무영(無影)이 현란한 변화 속에서 운호의 몸으로 퍼부어졌다.

하나 운호는 청문자의 강력함과 신묘함이 깃든 사일검을 하나씩 막아내며 무념무상 속에서 마치 춤추듯 황계 곳곳을 너울거렸다.

완벽함이란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듯 운호의 검식은 강유를 번갈아 휘돌며 청문자의 공격을 무산시키고 있었다.

청문자의 검이 변한 것은 그가 펼친 분광과 회풍마저 파쇄하며 운호가 반격했을 때였다.

번쩍!

오직 한 수.

내력이 담긴 섬전이 운호의 검을 때리며 지나갔다.

그 결과는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나타났는데, 운호는 그 일수로 볼썽사납게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청문자는 바닥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운호를 지켜보며 천천히 검을 회수했다.

그의 눈은 대련을 할 때와 천양지차로 변해 있었는데 아쉬움과 분노, 그리고 연민이 교차하고 있었다.

“곧게 자랐으나 연약한 대죽과 같고, 아름다우나 향기가 없는 꽃이로다. 연약하고 향기가 없다면 그 푸르름과 아름다움은 없느니만 못하게 된다. 차라리 곧지 않고 아름답지 않다면 사람들의 손이라도 타지 않을 터. 하물며 내력이 없는 검이 오죽하겠느냐. 보아라. 너의 검은 세상에 나가는 순간 무인들의 노리개로 전락할 뿐이다.”

“송구하옵니다.”

“오늘 내가 온 이유를 아느냐?”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

청문자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운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대로 있으면 눈물이 새어 나올 것만 같은 시선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숙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풍운대의 짐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실 말씀은 미리 짐작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의 유운과 사일은 점창의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 하나 진정한 유운과 사일의 모습은 내공이 발현되었을 때 나타나니 네가 펼친 유운과 사일은 껍데기나 다름없는 것이다.”

“알고 있사옵니다.”

“나는 네 사부가 원망스럽다. 어찌하여 천룡무상심법을 너에게 가르쳐 이런 사단을 만들었단 말이냐. 현천기공을 익혔다면 풍운대의 그 누구도 너의 적수가 되지 못했을 것인데 진정으로 아쉽고 아쉽다.”

“저는 사부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허허.”

“사부님께서 많은 것을 남겨주셨으니 저는 죽을 때까지 감사함으로 사부님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쯧쯧, 가상한 말이긴 하나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 네 처지가 불쌍할 뿐이다. 문으로 내려간다면 너는 네가 가진 특수한 항렬상 혼자 살아가야 한다. 외롭고 힘든 일이 될 터, 네가 원한다면 장문인께 말씀드려 도호를 거두도록 해주마. 어쩔 테냐?”

즉, 산에서 내려갈 수 있도록 파문을 시켜주겠다는 뜻이다.

잘못함이 없음에도 파문을 권유한 것은 운호의 앞날이 파문보다 훨씬 고통스럽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높은 배문의 항렬.

풍운대와 함께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풍운대를 떠나 본산제자와 같이 살아가야 한다면 그 항렬이 운호의 족쇄가 되어 힘든 삶을 만들게 된다.

누가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사숙을 대접해 줄 것이며, 내공조차 없는 운호를 인정해 줄 것인가.

그에게 남는 것은 오직 타인의 무시와 외로움뿐.

그랬기에 청문자는 말없이 머리만 조아리는 운호를 끝까지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점창을 빛내는 무인이 되기를 갈망한 청곡자의 유훈을 잊은 적이 없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그리 되기 위해 피와 눈물로 살아온 운호를 지켜보며 얼마나 가슴 졸였던가.

사부님을 사랑하는 제자.

그 하나만으로도 청문자의 가슴에 깊은 멍울을 남겨놓기 충분했다.

풍운대를 떠나라는 말을 차마 직접 할 수 없던 청문자는 그대로 떠나려 했다.

침묵 속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운호가 결심한 듯 입을 연 것은 청문자의 발길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다.

“미력하나마 사숙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뭘 말이냐?”

“이것을 봐주십시오.”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문자를 일별한 운호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 일장을 이격했다.

들고 있던 검을 품으로 끌어당겼다가 앞으로 주욱 내밀자 서릿발 같은 검풍이 일어나며 나무를 스치고 돌아왔다.

운호는 그 상태 그대로 사일검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사형제들이 보여주던 화려한 빛 무리는 아니었으나 검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분명 흐릿한 검기였다.

“어허, 어허!”

청문자의 입에서 연신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완벽한 검초에 깃든 내력.

풍운대가 지닌 내력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완벽한 검초에 운호가 지닌 내력이 합쳐지자 무시무시한 사일검이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비록 내력이 모자라 분광과 회풍은 시전하지 못했지만 전삼식과 중삼식을 아우른 운호의 사일검은 단연 발군이었다.

그랬기에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뜨고 있던 청문자는 운호가 검을 내려놓자 즉시 물어왔다.

“더 있느냐?”

“있긴 하오나 없느니만 못하옵니다.”

“무슨 소리냐?”

“더 펼치면 육신이 찢어지는 고통이 생깁니다. 무리를 하게 되면 주화입마에…….”

“어허, 자세하게 말하라!”

답답했는지 청문자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그는 운호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아무런 말도 없이 반 시진이 지나도록 듣기만 했다.

운호를 좌정시킨 채 등에 장심을 올려놓고 내력을 밀어 넣은 것은 이야기가 끝나자마자였다.

하지만 곧 그는 불에 덴 사람처럼 급히 양손을 거둬들여야 했다.

운호의 내공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현천진기를 수련한 점창문인들 중 풍부를 깬 무인은 여럿이었으나 이 정도의 내공을 갖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자신의 내력이 몸으로 침범하려 하자 운호의 내력은 방탄이 가동되어 한 치의 진격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끝장을 보자고 마음먹는다면 모를까, 여유를 둔 침공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자신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내력이 운호의 몸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랬기에 청문자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되지 않는 일.

아무리 천룡무상심법이 천고의 심법이라 해도 불과 십여 년 만에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내력이라니.

더군다나 운호의 말대로라면 본격적인 내공 증진은 오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변화가 발생할지 짐작도 하기 힘들었다.

변수.

운호의 존재는 점창의 또 다른 변수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돌아가신 청곡 사형은 운호가 만천자의 뒤를 이어 태양을 베는 검을 완성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에 불과하다고 치부했으면서도 혹시 하는 바람에 운호를 지켜본 것도 사실이다.

운호의 독심과 천부적인 자질이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기대감을 심어놨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호는 그에게 실망만 주었을 뿐, 어떠한 변화도 보여주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지켜봤으면서도 운호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니 한심해도 너무나 한심해서 헛웃음만 나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르면 몰랐을까, 사실을 안 이상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분광과 회풍의 오의를 완벽하게 깨달았으나 후예사일로 접어들자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진전이 없다.

초식의 흐름과 변화를 몰라서가 아니라 내력이 실리지 않기 때문이다.

초식에 내력이 실리지 않는다는 것은 선조들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나름대로 현천기공을 후예사일과 접목시키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으나 태양을 벤다는 후예사일은 전혀 그 모습을 드러내 주지 않았다.

천룡무상심법만이 후예사일을 완성시킨다는 조사들의 말씀을, 미친 듯한 발버둥 끝에 믿게 되었으니 어리석어도 한참이나 어리석었다.

그랬기에 운호의 존재가 특별하다.

천룡무상심법이 실체가 되어 나타난 이상, 운호는 점창의 미래였다.

운호에게 발생한 제약 조건이 난감했지만 점창이 지닌 모든 힘을 기울인다면 벗어날 방법이 생길지 모른다.

분광과 회풍이 사문에 돌아온 것은 천만다행이었으나 그것은 다른 문파와 겨우 대등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천하제일문파의 위치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분광과 회풍 정도의 비학은 전통의 명문이라면 모두 몇 가지씩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예사일이 점창에 있다면 이야기는 백팔십도 달라진다.

후예사일은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한 무적의 비학이었으니 점창이 후예사일을 품는 순간 천하제일문파의 명예는 자연스레 되돌아오게 된다.

점창의 찬란한 비상.

운호가 후예사일을 익힐 수만 있다면 진정한 점창의 비상이 시작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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