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21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1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21화
얼마나 정신을 잃었을까.
간신히 눈을 뜬 운호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두 번 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을 차렸어도 몸을 살피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을 겪었지만 이렇듯 정신을 차리고 나면 멀쩡해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양 떼처럼 생긴 뭉게구름이 파란색 물감으로 칠해진 것 같은 창공을 배경 삼아 아름답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정경.
끝없이 펼쳐진 하늘로 날아갈 수 있다면.
하늘은 이처럼 아름다운데 왜 나의 인생은 이렇게 아프고 힘들어야 할까.
알지 못할 설움에 눈물이 스르륵 흘러나왔다.
사부이신 청곡자가 생각났고, 자신을 연민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사형제와 청문 사숙이 떠올랐다.
사부님은 여전히 인자한 웃음을 띤 채 다가왔다.
보고 싶다.
다시 한 번 그 따스한 손길을 느낄 수만 있다면 어떠한 대가라도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사형제들.
풍운대를 이끄는 운곡 사형은 늘 자신을 챙겨주며 배려해 주었고, 질책만 하던 운몽 사형마저 어느 순간부터인지 안타까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인 운상과 운여는 늘 가까이서 아픔을 같이하려 했으나 자신의 아픔은 대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 년의 세월은 운호에게 목숨을 줄 만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청문 사숙이다.
벌써 십 년.
십 년의 세월을 같이 보내며 청문 사숙이 어떠한 사람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었다.
사숙은 사부님에 이어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유운검과 사일검을 가르치면서 얼마나 기뻐하던 사숙이던가.
그런 분이 지금에 와서는 자신을 한 번도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왜 그런지 알기에 더욱 슬프다.
내공을 갖지 못한 무인은 무인일 수 없고, 자신은 곧 풍운대에서 제외될 것이 확실하기에 이별을 준비하는 것이 분명했다.
서운하지는 않으나 아쉽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던 사형제와 청문 사숙을 떠난다는 사실이 아쉬워 참으로 오랜만에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점창에 있으니 오다가다 만날 수도 있겠으나 같이 살결을 맞대고 지낸 세월과 어찌 같을까.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태양이 서쪽 하늘로 지고 있었다.
오늘은 자신이 저녁을 차려야 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급하게 발길을 돌리던 운호가 걸음을 멈추며 자신의 온몸을 급하게 쓰다듬었다.
놀라운 사실, 고통이 안개처럼 숨어버렸다.
늘 조심하면서 내력이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했어도 찔끔찔끔 흘러나온 내력은 마치 숨어 있다가 수시로 바늘로 찌른 것과 같은 고통을 주었는데 그러한 현상이 사라져 버렸다.
오직 그만이 느낄 수 변화.
발길을 멈춘 운호는 쓰다듬는 것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뇌호혈까지 진격한 내력은 그야말로 망망대해를 휩쓰는 거대한 파도와 같이 거침이 없었다.
풍부에서 휘돌았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내력의 흐름이다.
그렇다면 몸의 변화도 그것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갑자기 희망이 샘솟듯 솟아났다.
통천에 도달한 내력이 몸의 고통을 없앤 것이라면 내력을 운용해도 고통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에 운호는 천천히 내력을 풀며 몸의 변화를 살폈다.
아주 천천히.
단전에서 풀어진 내력을 전신으로 흩뿌리며 몸을 관조해 나갔다.
진기가 흘러도 고통이 없다.
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기뻐 운호는 진기의 강도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운호는 끌어 올리던 내력을 불에 덴 것처럼 급하게 회수하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헉!”
불과 삼성이었다.
풀어낸 내력이 삼성에 이르자 불개미가 뜯어먹는 것보다 훨씬 강한 고통이 온몸을 통째로 잡아먹었다.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의 강력한 고통이다.
심법을 수련할 때도 이 정도의 고통은 아니었다.
허리가 저절로 숙여졌고, 이마의 힘줄이 벌겋게 솟아나 한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를 악문 채 숨을 조금씩 몰아쉬자 서서히 고통이 가라앉기 시작했지만 다시 겪고 싶지 않을 만큼 지독했다.
참으로 가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나를 주면 하나를 가져가는 것이 하늘의 법칙이란 말인가.
삼성의 내력 운용을 허락하더니 그 수준을 넘어가자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내력을 움직일 수 있다는 기쁨은 잠시에 지나지 않았고, 허탈함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운명아!
너는 어찌 남들에게는 그렇게 관대하고 온후하면서 나한테는 이리 야박하게 군단 말이냐.
정말 지겹도록 원망스럽다.
상청궁.
누가 부르지도 않았지만 상청궁을 향해 장로들과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되어 있는 운풍이 찾아들었다.
그들을 장문인인 청현자가 굳은 얼굴로 맞아들였다.
이틀 전에 칠절문과의 싸움에서 죽어간 청운자와 제자들의 제를 올렸으니 오 년째가 되는 날이다.
복수에 대한 다짐의 맹세.
지금 상청궁에 들어선 사람들의 눈에 가득 찬 의지는 바로 그것이었다.
“어서들 오세요.”
“장문인, 날이 참 따사롭고 좋구려.”
“그렇군요.”
온 목적을 뒤로하고 청허자가 딴소리를 하자 둘러싼 장로들이 헛기침을 했다. 대신 청현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이젠 서 있을 힘도 없어 큰일이오. 점점 기력이 떨어지니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오.”
“사형, 어찌 그런 말씀을…….”
오 년 새 더욱 늙어버린 청허자의 말을 청현자가 어두운 표정으로 받았다.
청허자의 나이 팔십삼 세.
아무리 무공으로 단련되었다고는 하나 세월은 이겨내지 못한다.
훨씬 노쇠해졌고 허리도 굽었으니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늙었음에도 그의 눈은 매섭게 청현자를 향했다.
“사실은 사실일 뿐이지요. 이 정도면 많이 살았으니 여한도 없소. 한데, 장문인.”
“예, 사형.”
“이젠 약속을 지키셔야지요?”
청허자의 말에 장문인인 청현자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은 슬쩍 굳어 있었는데 많은 사람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음이다.
“저 역시 잊지 않고 있습니다. 칠절문이 일 년 전부터 무정현에 들어와 설치는 것을 보면서도 내버려 둔 건 오늘을 위해서였습니다.”
“다행이구려. 그렇다면 언제 가오?”
“지금부터 준비해서 산을 내려가는 것은 칠 일 후로 할 생각입니다.”
“늙으면 조바심만 는다고 하던데 그게 꼭 나한테 해당되는 말이구려. 장문인께서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계신 줄도 모르고 괜히 혼자 애만 태웠소.”
“허허, 어찌 사형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겠습니까.”
“그럴 테지요. 장문인께서는 언제나 본도의 심장 속에 들어와 계셨으니. 끌끌!”
굽은 허리를 좌우로 흔들며 청허자가 기꺼운 웃음소리를 내자 청현자가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고개를 돌렸다.
“흠, 운풍.”
“예, 장문인.”
“준비는 네가 맡아서 하도록 하거라. 사문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다. 점창의 운명이 이 일전에 달렸으니 너는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묵직한 대답.
운풍은 허리를 숙여 대답한 후 다시 입을 굳게 닫았다.
점창의 대사형 운풍.
점창십삼검의 수장이자 분광을 완벽하게 익혔고, 회풍이 벌써 오성을 넘어 용화곡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성격은 진중하고 마음은 넓어 사형제를 품에 안으니 차기 장문인으로 손색이 없었다.
운풍이 입을 닫자 청허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장문인, 나를 비롯해서 장로 몇은 남아야 하지 않겠소. 본산을 지켜야 할 테니 말이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내 생각에는 나와 청면, 그리고 청우가 남았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주신다면야 안심이 될 것입니다.”
청허자는 시선으로 말한 사람들을 보다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앉아 있는 청우자를 확인하고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은 허리가 반쯤 접힐 만큼 노쇠했고 청면자는 오 년 전 당한 상처를 회복하지 못했으나 청우자는 현 점창을 상징하는 무인 중의 하나이다.
분광을 완벽하게 넘어서 회풍이 육성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당장 무림에 나가도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데 본산에 남으라고 하니 얼굴이 일그러지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토를 달지 않았다.
누군가 남아 점창을 지켜야 한다면 아무리 살펴도 자신이 최적이었기 때문이다.
청허자가 그런 청우자에게 고맙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지은 후 장문인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청우 사제가 그리하겠다고 하는구려. 그럼 장로들은 되었고, 십삼검은 어쩌시려오?”
“다섯을 남길 생각입니다.”
“다섯이라…….”
“사형들께서 각고의 노력을 해주신 덕에 우리 점창은 창천을 넘어 파천을 얻은 무인이 스물이나 됩니다. 다섯이 남는다 해도 칠절문과 충분히 해볼 만합니다.”
“내 생각도 그렇소.”
장문인의 자신감을 청문자가 나서며 수긍했다.
그의 얼굴은 붉은 대춧빛으로 변해 있었는데 점창의 이름으로 당당히 적을 향해 산문을 나서는 이 순간이 무척이나 흥분되는 모양이다.
얼마나 참고 또 참았는가.
점창제일검이면서도 당당히 검을 꺼내지 못한 채 지내온 삼십여 년의 세월이 그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부드럽게 웃음을 띤 청현자가 그런 청문자를 기꺼이 바라보다가 생각난 듯 불쑥 물었다.
“사형, 소제는 풍운대가 걱정됩니다. 전세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게 어떻습니까?”
“무슨 말씀이오?”
“그 아이들은 점창의 비력입니다. 벌써부터 강호에 노출시키는 것이 아쉬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만약에 꺾이기라도 하면 점창은 희망을 잃게 됩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그 아이들은 회풍이 삼성을 넘어섰소. 지금 당장 세상에 나간다 해도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오.”
“장문인이란 자리가 원래 걱정이 많은 자리 아닙니까.”
“장문인의 걱정을 왜 내가 모르겠소. 하지만 풍운대는 이제 세상에 나가야 하오. 무인은 피를 묻히고 흘릴 때에 진정한 검을 얻게 되오. 그 아이들의 회풍은 피를 품은 후에야 절정을 얻을 수 있으니 지금 내려가지 않으면 긴 시간을 돌고 돌아야 할 것이오.”
부지런히 움직여 마련한 저녁을 형제들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웠다.
하루 종일 수련에 매달렸기 때문인지 그들은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네 활개를 폈다.
사형제가 유일하게 잡담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이 시간뿐이었다.
“운호야, 숭늉 없냐?”
“당연히 있지요. 가져오겠습니다.”
운몽이 바닥에 쫙 깔고 엎드린 채 손만 들어 고마움을 표시하자 운호가 씨익 웃으며 부엌으로 나갔다.
말은 운몽이 했지만 숭늉은 전부에게 필요한 후식이기 때문에 운호는 아예 밥솥째 들고 방으로 들어와 일일이 떠주었다.
별도로 고맙다는 표현은 없다.
오 년 동안 식사 당번이 늘 해오던 일이니 그저 주는 대로 마실 뿐이다.
“대형, 소식 들었습니까?”
“무슨 소식?”
“장로회의 말입니다. 어찌 되었다고 하던가요?”
“넌 내가 점쟁이로 보이냐?”
“그거야 당연히… 아니지요.”
“그런데 그런 걸 왜 물어?”
“그래도 대형이 정보가 젤 빠르지 않습니까.”
한쪽에 늘어져 있다가 벌떡 일어나 묻던 운극이 머리를 긁적이며 엉덩이를 뒤로 뺐다.
황계에서 운곡의 수련 장소는 서쪽 끝에 있는 죽암이고, 그 죽암에서는 하루 종일 바위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으니 자신의 질문에 운곡이 대답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물은 것은 운곡의 불가사의한 정보 능력 때문이다.
몰라야 정상인 것도 사형인 운곡은 어떻게 알았는지 가끔 밥 먹을 때 알려주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른다고 도끼눈을 부릅뜨더니 금방 얼굴 표정을 바꾸면서 슬며시 웃음을 머금었다.
“아마 조금 이따가 청문 사숙께서 오실 거다. 내가 알기로는 일주일 후 출진이란다.”
“정말입니까?”
“그럼 내가 농담하겠냐, 니들한테?”
운몽이 그의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났으나 질문은 벽에 붙어 눈을 감고 있는 운검에게서 나왔다.
오 년의 기다림. 정말 긴 오 년의 세월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눈은 운곡의 대답을 들은 후 번쩍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우리도 갈 수 있겠죠?”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청문 사숙께서 분광과 회풍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하산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 자꾸 걸리는구나.”
“대형, 회풍을 완벽하게 익히려면 아마 오 년은 더 걸릴 겁니다. 어떡하든 청문 사숙을 설득해야 됩니다.”
“사숙께서 고지식한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설득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문의 싸움에 우리만 빠진단 말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운곡의 말에 운검의 목소리가 흔들리며 새어 나왔다.
간절한 열망.
그 열망은 운검뿐만 아니라 방에 있는 풍운대 전체의 눈에서 공통으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운곡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문밖에서 청문자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답답했던지 운곡이 숭늉을 단숨에 털어 넣고 있을 때였다.
“전부 나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