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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14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19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풍운사일 14화

“으, 이놈들을!”

철저하게 파괴된 전각 사이를 누비던 청면자의 입에서 길고 낮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칠십에 달하는 시신.

흘러내린 피가 빗물과 섞여 붉게 물들었고, 팔다리가 잘린 시신들이 여기저기 뒹굴어 숭의문은 마치 지옥을 보는 것처럼 변해 있었다.

무인들은 모두 죽어 있었고, 식구로 보이는 아낙네와 어린아이들의 오열만이 마당에 가득했다.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부상당해 반항하지 못하는 자들은 웬만하면 죽이지 않을 텐데 흉수들은 확인 사살까지 했다. 그 잔인함에 청운자를 포함한 점창 무인들의 어깨가 심하게 흔들렸다.

운남이 어찌 점창의 땅이랴.

그럼에도 운남을 점창의 땅이라 표현하는 것은 그만큼 점창의 영향력이 크다는 걸 의미했다.

세 개의 표국을 운영하는 국주들이 점창의 속가였고, 억울한 눈으로 죽어 있는 숭의문주 천수검 정각 역시 점창 사람이었다.

숭의문은 무정현을 대표하는 다섯 개 문파 중 하나였으나 불과 하루 만에 철저하게 파괴되어 세상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천수검은 심지가 곧고 넓어 본산의 제자들에게까지 신망받는 무인이었고, 점창십삼검 중 이 자리에 있는 운청과는 연배가 비슷해서 격의 없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 사람이 한쪽 팔과 다리가 잘린 채 눈을 감지 못하고 죽어 있으니 운청은 넋을 잃은 채 주저앉아 그의 시신을 놓지 못했다.

천수검의 남은 손은 아직 검을 부여잡고 있었는데 얼마나 굳게 잡았는지 검을 빼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제자들이 천수검의 시신을 수습하는 걸 지켜보던 청면자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그의 눈은 평소와는 다르게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사형, 어쩌시겠소?”

“뭘 말인가?”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소!”

“누구한테 복수를 해? 먼저 흉수를 밝혀내야 복수고 뭐고 할 게 아닌가?”

“상처를 보시오. 하나같이 도에 당한 것뿐이오. 이래도 모르시겠소?”

“추측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니야.”

“그래서요? 그럼 사형은 놈들의 뒤나 캐며 시간을 보내자는 게요?”

“이보게, 청면. 아이들이 보네. 말조심해!”

“끙!”

청면자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커다랗게 헛기침을 해댔다.

무정현에서 숭의문을 하루 만에 이 정도로 완벽하게 세상에서 지울 수 있는 세력은 사천에서 넘어온 칠절문이 유일했다.

그런데도 청운자가 신중한 모습을 보이자 성격이 급한 청면자는 반쯤 옆으로 돌아서 더운 콧김을 불어내며 주먹을 틀어쥐었다.

그냥 내버려 두면 단신으로 칠절문을 향해 달려갈 정도로 그는 분노에 차 있었다.

“사제, 장문인의 부탁을 벌써 잊었는가?”

“난 점창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왔을 뿐이오.”

“설마 나를 겁쟁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소. 험험, 천하의 염라검을 누가 겁쟁이라 생각한다고…….”

청면자가 인상을 슬쩍 풀며 청운자의 눈치를 봤다.

어느 샌가 청운자의 얼굴은 귀기가 서린 것처럼 굳어 있었다. 자칫 잘못 입을 열었다가는 젊을 적 점창을 몇 번이고 들었다 놓았던 청운자의 개차반 성격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그랬기에 그는 사형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굳게 닫았다.

이럴 때는 그저 하자는 대로 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청운자는 평소에는 조용하게 지내지만 한번 성격이 터져 나오면 그 행동에 주저함을 두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운학!”

“예, 사숙.”

“놈들을 철저하게 감시해라. 다른 놈들이 넘어왔는지 확인해 보도록. 삼 일을 주겠다.”

“알겠습니다.”

“운명!”

“예, 사숙.”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를 수색하라. 놈들이 한 짓이라는 증거만 찾는다면 일이 쉬워질 테니 힘들더라도 해봐.”

“그리하겠습니다.”

“운청은 놈들의 행적을 쫓는다. 비가 와서 쉽지 않겠지만 최대한 추적하도록!”

청면자가 단 한순간에 고개를 팍 수그리고 옆으로 슬그머니 빠져버리자 청운자의 입에서 미리 생각이나 한 것처럼 명쾌하게 지시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제자들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천천히 돌아섰다. 청면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이봐, 사제.”

“말씀하시오.”

“우리 애들은 아직 젊어. 우리처럼 늙지 않았단 말일세. 나는 저들을 지키고 싶네. 무슨 뜻인지 알겠지?”

“왜 모르겠소.”

“운자배 애들이나 그 밑의 명자배 애들은 우리하고 달라서 죽는 걸 무서워하지 않는단 말이야. 우리 때보다 간이 훨씬 커진 것 같아.”

“그래서요?”

“신중할 필요성이 있다는 걸세.”

“소제는 아까부터 아무 말 안 하고 있소.”

“이해해 주니 고맙구먼. 그래서 말인데, 나는 내일 칠절문으로 갈 생각일세. 가서 놈들의 얼굴을 봐야겠어.”

“혼자서 말이오?”

“왜 나 혼자 가, 자네는 뭐 하고?”

“그럼 둘이 가자고요?”

“둘이면 되지 않겠어. 놈들 상판 보러 가는데 애들 다 데리고 갈 필요는 없잖아. 어떤 놈들이기에 이토록 잔인한지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

시퍼렇게 빛나는 청운자의 시선이 한쪽에 쌓인 시신 쪽에서 멈춰 섰다.

그는 청면자처럼 대놓고 분노를 표출하지는 않았으나 행동 하나하나에서 섬뜩함이 절절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정현의 중심부에 있는 청죽로는 객잔과 기루가 백 보마다 하나씩 나타날 정도로 많았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각종 상점이 늘어서 있어 수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곳이었다.

그 청죽로에 흑색 도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청운자와 청면자가 나타난 것은 어둠이 천천히 밀려들기 시작한 술시 무렵이었다.

그들은 여유 있는 걸음으로 천천히 걸으며 상점과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어 유람 나온 노인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사형, 어차피 갈 거면서 왜 애들을 고생시키셨소?”

“싸우러 가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정말이요?”

“가급적 그럴 생각이야.”

“어련하시겠소.”

청운자가 말꼬리를 흐리자 청면자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렸다.

세상일이 어디 생각대로 된단 말인가.

어디 잘 아는 지인 집에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숭의문을 피로 적신 자들을 만나는 자리에 어찌 웃음만 있겠는가.

더군다나 칠절문에서 파견한 철마수란 자는 그 성격이 냉정하고 집요해 상대하기 어려운 것으로 유명했다.

십에 팔구는 검을 뽑아야 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청면자는 좌우를 살피며 청운자의 발걸음에 맞춰 걸음을 옮겨나갈 뿐, 가지 말자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가야 한다면 말없이 따르는 것이 훨씬 현명한 행동이었다.

다섯 명의 낮선 사내가 따라붙은 것은 반 식경 전부터였다.

안정된 보폭.

정체를 숨기지도 않은 채 따르는 흑의의 사내들은 흑립으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칼 같은 기세를 뿜어내며 주변의 더운 공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공격에 대한 의지는 보이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들을 따르기만 했다.

청운자가 먼저 걸음을 멈춘 것은 화려한 청죽로가 거의 끝나가는 곳에 위치한 장원 앞에서였다.

조용히 서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이곳이 목적지란 뜻인데 청운자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뒤를 따르던 사내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을 포위하듯 다가왔을 때에야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다 왔잖아. 문 열어!”

 

장원 안으로 들어서자 십여 명의 사내가 좌우로 늘어서서 그들을 맞아들였다. 그 중앙에 있는 철마수가 청운자의 걸음에 맞추어 마주 걸어 나왔다.

그의 머리 양쪽을 가르며 흐르는 흰머리가 횃불에 반사되면서 묘한 기운을 뿜어냈다. 붉은 입술이 열리자 그 기운이 한층 강해졌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운, 바로 살기다.

“오호, 점창의 장로들께서 여긴 웬일이시오? 나이가 들어 움직이기도 힘드셨을 텐데.”

“네 얼굴을 보러 왔다.”

“나를 말이오?”

“보고 싶었어. 철마수 얼굴을 보고 싶어 밤잠까지 설쳤다.”

“클클클, 회춘을 하고 싶었다면 잘못 찾아왔구려. 상춘루에 어린 기녀들이 새로 들어왔으니 그곳으로 가보지 그랬소.”

청운자의 대답에 철마수가 가래 끓는 웃음을 터뜨리며 눈을 빛냈다.

그의 대답은 천한 것이었으나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웃음은 입으로만 나왔을 뿐 얼굴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처음과 똑같은 자세로 청운자를 살피며 공기의 파장을 바꾸고 있었다.

품어져 나오는 살기가 피부를 자극할 만큼 점점 강해진 것은 청운자의 얼굴이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청면 사제.”

“말씀하시오.”

“저놈이 칠절문이 자랑한다는 오극수 중 하난가?”

“맞는 것 같구려.”

“왜 철마수라고 불리는 거지?”

“싸울 때 손에 이상한 걸 낀다고 하더이다.”

“안 보이는데?”

“사형 같으면 적에게 자신의 독문 무기를 드러내고 다니겠소?”

“하긴 그렇기도 하겠구먼.”

청운자가 청면자의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청운자는 한 발자국씩 철마수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살기는 점점 강해졌다. 청운자가 철마수의 일 장 앞까지 다가섰을 때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처럼 팽팽해졌다.

청운자가 걸음을 멈춘 것은 그 경계선이었다.

교묘한 위치.

서로 간 양보할 수 있는 마지막 선에서 멈춰 선 청운자가 뒷짐을 진 채 철마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꼭 그래야 했느냐?”

“뭘?”

“숭의문 말이다.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더군.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 한 짓이겠지만 너무 잔인했다.”

“감성적이구려.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시오. 이제 시작일 뿐인데.”

“무인임을 포기한 것이냐?”

“무인이 뭔데? 칼 들고 싸우면서 먹고사는 사람이 무인이지 별거야? 무인은 고고하게 살아야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그동안 무림 선배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처럼 보이던 철마수가, 경계선으로 다가온 청운자에게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청운자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비웃음이었다.

“칠절문이 너 같은 놈 때문에 많이 변했구나.”

“늙은이 단둘이 와서 어쩌자는 거냐. 오늘은 죽이지 않을 테니 꺼져. 다른 놈들과 같이 와라. 그때 죽여주마.”

“곧 강호에 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클클클, 우린 너희처럼 도인이 아니야.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지. 그러니 우리 일을 방해하지 마라. 찌그러져 점창에 처박혀 있으면 멸문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운남을 원하느냐?”

“그러니까 왔지. 우리도 먹고살아야 되잖아?”

“하긴 이제 그냥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 숭의문을 저리 만들었으니 어찌 그냥 돌아갈 수 있겠느냐.”

“우리가 바라는 바야. 될 수 있으면 빨리 점창이 나서줬으면 좋겠어. 난 시간 끄는 건 딱 질색이거든. 한 놈이든 열 놈이든, 아니면 점창 전부든 상관없다.”

청운자의 질책에 철마수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그는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어느 샌가 두 팔을 뒤로 돌린 채였다.

말로는 보내준다고 했지만 당장이라도 처죽일 태세. 단순한 동작이었음에도 살기는 극대화되었고, 곧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때 청운자의 고개가 좌우로 꺾이며 천천히 입이 열렸다.

“세상은 말이야, 참 엿 같은 거 같아. 조용히 지내려고 하면 꼭 저 새끼들처럼 짓밟으려는 놈이 나타난단 말이지. 철마수 넌 우리를 단순히 도인으로 본 모양인데 잘못 본 거야. 점창은 그냥 도나 닦는 문파가 아니거든. 점창은 말이다, 죽으면 죽었지 더러운 꼴은 못 보는 독종들이 살아!”

말을 마친 청운자가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귀기로 덮여 있었는데, 철마수의 도발에 완전히 반응한 모습이었다.

염라검 청운자.

한번 돌아버리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부숴 버리는 청운자의 예전 모습이 나오자 청면자가 한숨을 내리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한심해서 못 견디겠다는 얼굴이다.

여기까지 오며 나름대로 논리를 세우고 제자들을 먼저 생각하기에 많이 변했다며 감탄했는데 막상 적과 부딪치자 바로 예전 성격이 튀어나왔다.

자신 역시 철마수의 말과 행동에 열이 받은 상태였으나 이렇게 완벽하게 포위된 상태에서 검을 꺼내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굳이 적의 근거지에 들어와서 싸움을 벌이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예상한 대로 지붕과 담장 쪽에서 이십여 명의 흑의사내가 나타나 퇴로를 차단했다. 장원 안에 있던 자들 역시 포위망을 압축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득보다 실이 많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청운자는 검으로 한 번 땅을 슬쩍 튕긴 후 다가오는 적을 견제했다. 그리고 청면자를 향해 뻔뻔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 그를 환장하게 만들었다.

“사제. 난 안 싸우려고 했는데, 저놈들 하는 짓 보니까 안 되겠지?”

 

선룡단.

칠절문이 자랑하는 주력 전투 부대 중의 하나로, 수장은 오극수의 맏이이자 사천십이절에 속하는 금마수 정확.

사천 남부를 장악하면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선봉에 서서 적을 잔인하게 유린한 극강의 전투 부대였다.

그들은 전투 시 금빛 용이 새겨진 황룡기를 전면에 세우는데 그것은 무적을 자랑하는 그들의 자존심이었다.

지금 여기 나타난 자들은 철마수 휘하의 벽사대 소속으로 철마수와 함께 십여 년이 넘도록 한솥밥을 먹은 도객이었다.

절명도라 불리는 강력한 무력과 더불어 숭의문을 처리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뒤를 돌아보지 않는 잔인함까지 보유한 자들이었다.

더군다나 오랜 세월을 같이했기 때문에 합격과 상황 파악에 대한 인지 능력이 뛰어나 강력한 적이라도 이처럼 완벽하게 포위한 경우에는 제 발로 걸어 나가게 만든 적이 없었다.

독 안에 든 쥐.

청운자와 청면자는 벽사대의 입장에서 봤을 때 독 안에 든 쥐와 다름없었다.

벽사대의 공격은 숭의문을 파괴시킬 때처럼 언제나 어깨에 금색 견장을 찬 선위무장 왕파로부터 시작되었다.

왕파는 청운자가 검을 치켜들자 기다렸다는 듯 철마수의 옆을 스쳐 공중으로 도약하며 칠도를 퍼부었다. 얼마나 빠른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쾌도.

단순하게 빠른 것이 아니라 강력한 위력까지 담겨 있어 마치 공중에서 벼락이 치는 듯한 일격이었다.

마당에서 포위하고 있던 자들이 움직인 것은 그의 공격이 청운자의 검에 의해 튕겨져 나갔을 때였다.

중일조 십이 인만의 연수 합격.

지붕과 담장을 차단한 이십여 명의 벽사대는 싸움이 시작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철마수는 그의 독문 무기인 마령수를 끼고 싸움의 흐름을 관장하며 변수에 대비했다.

어차피 저 둘만 왔다면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기에 나머지는 도주로를 차단하면서 지켜만 보았다.

점창의 움직임이 파악된 것은 숭의문을 괴멸시키고 돌아온 직후였다.

그동안의 전례로 봤을 때 전혀 예상할 수 없을 만큼 전격적인 움직임이었기에 본단에서도 어제야 겨우 알아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본단에서는 점창의 응수를 타진하라고만 했지, 싸움을 시작하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성격상 미적거리는 것은 질색이었다. 어차피 운남을 먹겠다고 결심한 거라면 주저할 이유가 없었기에 도착 후 무정현의 상황이 파악되자마자 숭의문을 잔인하게 괴멸시켜 버렸다.

무인은 머리를 쓰게 되는 순간 칼이 녹슬고, 그리 되면 칼을 쓰기가 힘들어진다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점창 무인들이 왔다는 정보를 듣자 소름이 돋아났다.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흥분에 겨운 희열 때문이었다.

한때 천하제일을 자랑했다는 점창의 검.

그런 자들을 상대한다는 생각을 하자 흥에 겨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재밌는 것은 숭의문을 무너뜨리고 단 하루 만에 점창의 장로 둘이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단둘이 왔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본단의 정보에 따르면 점창십삼검 중 셋이 같이 들어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점창십삼검.

현재 점창을 상징하는 존재들로서 자신보다 절대 아래라고 볼 수 없는 절정의 무인이다.

만약 그들이 같이 왔다면 이렇게 여유를 부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횃불이 넘실거리는 마당에는 늙어빠진 늙은이 둘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다.

이해하지 못할 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특히 철마수처럼 단호한 결단력을 지닌 자들은 다가온 기회를 본능적으로 잡아채는 감각이 남다르기 때문에 그런 일에 심력을 낭비하지 않는다.

철마수의 비릿한 웃음이 흘러나오는 순간 살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마령수가 장착되며 왕파의 선제공격에 따라 중일조의 포위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팽팽했던 살기가 터지며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로 단둘이 왔는지 모르나 운남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초전에서 점창의 장로를 둘이나 잡는다는 것은 엄청난 전과가 될 터였다.

청운자와 청면자가 점창을 대표하는 무인이라고는 하나 둘만으로 범의 아가리에 들어온 이상 죽음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 벽사대에 포위된 이상 절대 살아남지 못한다

한 손이 열 손을 당하지 못하는 이치.

방진을 기본으로 팔괘진을 형성시킨 벽사대의 합격은 시간이 지나면 늙어빠진 점창 장로들의 기력을 점점 고갈시켜 바닥을 뒹굴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점창의 장로 청운자와 청면자.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점창파의 무인 중에서도 최고 배분에 속하는 절정고수.

왕파의 강력한 칠도를 모두 튕겨낸 청운자의 검이 바람을 따라 휘돌며 도객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청면자가 반대쪽으로 몸을 날리며 십삼검을 뿌렸다.

왜 중일조만 공격에 가담했는지 이해될 만큼 도객들의 공격은 파괴적이었다. 그러나 청운자와 청면자의 검은 그들의 강력함을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무너뜨리며 포위망을 유유히 벗어났다. 그리고 연환 공격의 고리를 철저히 끊어 공격을 멈추게 만들었다.

합격의 기본은 방위의 선점이었으나 청운자와 청면자는 방위를 내주지 않는 노련함을 보이며 도객들을 혼란 속에 빠뜨렸다.

하지만 왕파는 그런 혼란을 즉시 잠재웠고, 도객들의 공격을 또다시 주도해 나갔다.

벽사대의 일원이 된 순간부터 수없이 겪어온 합격의 첨두에는 언제나 왕파가 있었기에 그들은 금방 평정심을 회복했다. 방위와 방위를 교차시키며 두 노인의 허점을 향해 집요하게 칼을 날리기 시작했다.

접전.

거의 반 시진에 달하는 공격과 방어.

그 누구도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분명한 것은 청운자와 청면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진다는 것이다.

소수와 다수의 결과는 항상 이렇다.

아무리 무력이 뛰어난 무인이라 하더라도 단박에 적을 격살시킬 정도의 격차가 없다면 결국 시간에 밀려 내력이 고갈되고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

포위망에 갇힌 고수의 유일한 선택은 도주였으나 청운자와 청면자에게는 그 방법마저 차단되었으니 암담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청운자의 입이 열리는 순간 순식간에 변했다.

“사제, 그만 가지. 애들 기다리겠어.”

“그냥은 못 가오! 몇 놈은 잡아야겠소!”

청운자의 말에 반응한 청면자의 검에서 세 치에 달하는 백색 검기가 주욱 뻗어져 나오며 광포하게 도객들 사이를 헤집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검격.

그에 맞춰 청운자가 호응했다. 허공을 격하고 뛰어올라 오채 색 칠검을 뿜어내자 도객들의 포위망이 균열을 일으키며 깨져 나갔다.

청면자의 검은 이미 유함을 버리고 오직 강력함으로 무장한 채 진격을 거듭했는데, 깨진 포위망 사이로 도객들의 칼을 꺾으며 피를 뿌려댔다.

셋이 무너졌고, 다섯이 부상을 당한 채 물러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믿을 수 없는 신위를 나타내며 포위망을 깨뜨린 청운자와 청면자는 정문을 향해 날아갔는데, 그 모습이 마치 귀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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