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3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3화
아무것도 장식되어 있지 않는 방.
작은 다탁과 조그만 머릿장 두 개, 책장이 덩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정결함과 고풍스러움이 느껴지는 것은 앉아 있는 사람들의 청명함이 남달랐기 때문이며, 적은 가구들이지만 균형을 맞춰 교묘하게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다탁에는 두 개의 찻잔이 놓여 있었는데, 방금 달였는지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는 중이었다.
“사형. 그 아이, 많이 변했더군요.”
“그렇게 보였소?”
“새삼 사형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오 년 만에 풍운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만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직 많이 모자랍니다. 내가 그 아이에게 가르친 것은 유운검법과 유운신법뿐이오.”
“설마요?”
“사실이오. 내가 수련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 다른 것은 가르치지 못했소. 대신 그 아이의 유운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대단하오.”
“대체 어느 정도이기에요?”
“내공을 쓰지 않으면 그 아이의 유운을 깨지 못할 정도요.”
“허어!”
점창의 장문인인 청현자는 청문자의 말을 듣고 탄식을 터뜨렸다.
농담할 사람도 아니고 농담할 사안도 아니다.
그렇다면 사실이라는 건데 청현자는 정녕 믿기지 않아 찻잔을 든 채 오랫동안 놓지 못했다.
운호가 유운검법을 수련한 기간은 오 년에 불과했다.
아무리 그 기간 동안 유운검법만 수련했다 하더라도 청문자가 운호의 검을 꺾지 못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청문자가 누구인가.
현 점창의 최고수이며, 전입미답의 경지로 미뤄둔 분광과 회풍을 스스로의 검에 담은 절대고수다.
그럼에도 대뜸 부정하지 못한 것은 사형의 얼굴이 너무 태연했기 때문이었다. 재차 묻기 어려울 만큼의 확신도 같이 담겨 있었다.
“유운검만 가지고는 힘들 텐데요?”
“그 정도면 충분하오.”
“그럴까요?”
“운호의 유운검은 사일검에 필요한 기초 검리가 완벽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오.”
“음, 사형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청곡 사형께서는 나에게 사일검을 가르치시며 늘 말씀하셨소. 운호가 태양을 벨 수 있도록 도와주라 하더이다. 나는 그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오.”
“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분광과 회풍을 찾음으로써 점창의 날개가 펴졌지만 다른 무맥들을 압도하기 위해서는 파천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운호의 무재가 갈수록 예기치 못할 정도로 변하고 있소. 어쩌면 우리는 장차 파천검을 볼지도 모르오.”
“그리 되면 무얼 못하리까. 소제도 학수고대하는 일이지요. 그럼 이제 어쩌실 생각이신지오?”
“삼 일 후부터 풍운대에게 분광과 회풍을 가르칠 생각입니다.”
“괜찮을까요. 다른 아이들은 괜찮겠지만 운호는 아직 사일검에 입문조차 하지 못했잖습니까?’
“옳은 지적이오. 그래서 운호는 검리부터 가르칠 생각입니다.”
“그 아이의 집념이 대단하니 기대가 됩니다. 그나저나 사형께서 또 고생하셔야겠군요.”
“무슨 그런 말씀을…….”
“사실입니다. 운호도 운호지만 풍운대에 분광과 회풍을 가르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테니까요. 다른 건 몰라도 분광과 회풍은 다른 장로들이 가르칠 수 없으니 사형의 고생이 클 겝니다.”
“어차피 각오하고 있었소. 점창의 미래가 그 아이들 손에 달렸으니 어찌 소홀할 수 있겠소.”
“그렇다면 운호만이라도 청호 사숙에게 맡기시는 게 어떨까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운호의 무재가 무섭습니다. 제가 직접 사일검을 가르치는 게 좋겠습니다.”
“너무 힘드실 테니 드리는 말씀이지요.”
“사일검은 유운이나 삼절검과는 다르게 깨달음이 선행되어야 위력을 발휘하는 검법입니다. 청곡 사형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분광과 회풍을 익히는 데 오 년이나 걸린 것은 그만큼 사일검이 지닌 무리가 깊고 넓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아이들을 가르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어차피 풍운대의 어깨에 점창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고맙겠소. 그나저나 문이 꽤나 시끄럽던데요. 청운, 청면 사형도 보이지 않고요?”
“그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칠절문의 분타가 운남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사형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움직였습니다.”
“칠절문이 감히!”
“그들은 여전히 점창을 우습게보는 모양입니다.”
“누가 들어왔소?”
“철마수라 하더이다. 삼십여 명의 선풍단을 대동했다고 들었소.”
“우리는요?”
“청운 사형과 청면 사형을 비롯해서 십이검 중 셋과 이대제자 다섯이 갔습니다.”
“더 왔으면 위험하오!”
“그렇겠지요. 그래서 신신당부했습니다. 상황을 보고 적절히 대응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청문자가 검미를 치켜들며 눈을 부릅뜨자 청현자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리쉬었다.
청문자의 불같은 노여움은 너무나 당연했고, 자신 역시 그 못지않게 화가 난 상태였다.
삼십팔무맥 중의 하나인 칠절문은 사천 서쪽을 장악하며 삼십 년부터 뿌리를 내린 문파로서, 수장인 전왕 혁기명을 필두로 삼무절과 오극수, 십오천강 등 절정의 고수가 기라성처럼 포진되어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오대 전투부대를 보유한 칠절문은 단 십이 년 만에 사천 남부의 무림 세력을 완전히 병탄시켜 천하무림이 그들을 사천의 패자로 인식하게 만들어놓았다.
그런 칠절문이 사천을 넘어 운남으로 들어온 것은 더 이상 사천에서 세력 확장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문이 그들의 영역을 제한하며 사천의 구룡(九龍)과 감락(甘洛)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이상 움직일 틈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독과 암기의 종가인 당문은 아무리 강력한 무력을 지닌 칠절문이라 하더라도 껄끄러운 상대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당문의 뒤를 받치는 아미와 청성의 존재는 그들로 하여금 사천에서의 영역 싸움을 피하게 만드는 강력한 변수였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것이 바로 운남이었다.
선택.
팽창될 대로 팽창된 무력이 있는 이상 세력의 확장은 필수적이었고, 칠절문이 선택한 것은 점창이었다.
백 년 전 천왕성과의 결전 이후 쇄락을 거듭해 온 점창의 전력은 당문보다 한참 떨어진다고 평가되는 중이다.
본산 제자는 백오십에 불과했고, 속가까지 모두 합친다 해도 삼백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무림백대고수에 포함되는 고수는 오직 청문자뿐이었으니 무림의 평가가 잘못되었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점창은 분노했으나 칠절문의 행동에 경고만 주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못했다.
칠절문의 세력이 워낙 막강했고, 충돌을 불러일으킬 만큼 눈에 보이는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칠절문의 운남 출현은 점점 빈번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뇌부가 얼굴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암암리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운남에 정착시키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럼에도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움직이지 못했다.
운남에 들어왔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검을 꺼내 들기에는 상대가 너무 강력했고 결과 또한 예측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칠절문이 점창의 비겁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공공연하게 운남 쪽으로 분타를 이동시켜 온 이상, 점창은 분연히 검을 빼 들 수밖에 없었다.
운남은 점창의 땅.
그동안은 행동으로 움직이지 않았기에 지켜만 보았으나 이제는 그리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분광과 회풍이 점창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 이상 다시는 점창을 우습게보지 못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피를 보자고 한다면 그리해야겠지요. 점창은 역사 속에서 피를 두려워한 적이 없소.”
“잘 알고 있습니다, 사형. 저는 장문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결정을 할 것입니다.”
“그러리라 믿고 있습니다.”
청현자의 말에 청문자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점창을 이끄는 쌍두마차.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무언의 신뢰 속에서 앞으로 발생할 일들에 대한 각오를 새겼다.
무인들의 세계 강호.
태풍의 눈처럼 잔잔하던 강호에 피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소제 운호가 사형을 뵙습니다.”
“네가 운호라고?”
“운호가 맞습니다. 그런데 사형은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푸하하, 나야 항상 잘생긴 얼굴 그대로지. 그런데 어쩐 일이냐? 너는 청문 사숙과 운문에 있다고 들었는데.”
운극이 놀란 얼굴을 지우지 못하고 운호가 온 이유를 물었다.
그는 아직까지 운호의 변화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릴 적 비쩍 마른 생선을 연상시킬 만큼 가냘프던 운호가 육 척의 키에 바위를 보는 것처럼 단단한 체격으로 돌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변한 것은 운호만이 아니었다.
첫눈에 알아볼 만큼 예전 모습이 그대로라는 것만 뺀다면 운극 역시 이미 당당한 사내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선 운여와 운상 역시 운호보다 체격이 조금 작을 뿐 예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그들 역시 운극의 질문에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운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궁금해서 못 참을 정도로 안달이 난 상태였다.
“오늘부터 여기서 함께 기거하라는 명이셨습니다. 앞으로는 소제도 풍운대와 함께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청문 사숙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음,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 운호, 어디까지 배웠는지 물어봐도 될까?”
“뭘 말입니까?”
“무공 말이다. 청문 사숙께서 어디까지 가르쳐 주셨지?”
“유운검법과 유운신법입니다.”
“그게 다냐?”
“예.”
공손하게 대답하는 운호를 바라보며 운극의 머리가 더욱 외로 꼬아졌다.
정말 이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네가 그동안 우리와 함께하지 못한 이유를 아는지 모르겠군.”
“압니다. 소제가 부족해서 같이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너와 나이가 같은 운상과 운여마저도 익히지 않은 사문의 절기가 없다. 물론 그 수준은 각자 차이가 나지만 대사형을 비롯해 넷째 사형까지는 이미 절정의 경지에 육박한 상태고 나머지도 곧 그 경지에 도달할 거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압니다.”
“그래서 물어본 거다. 유운검법만 배웠다면 아직 같이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사형의 말씀이 일리가 있다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청문 사숙께서 생각하시는 게 있겠지요.”
“그렇겠지. 사숙께서 결정한 것이라면 무슨 뜻이 있을 거야. 하여간 잘 왔다. 일단 씻고 옷부터 갈아입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들어보자.”
“그러겠습니다.”
의문을 떨쳐 버리면서 운극이 운호의 어깨를 때렸다.
그 행동에는 반가움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운호는 가벼운 웃음을 입에 담았다.
왼쪽 담장을 넘어 한 사내가 날아온 것은, 운극의 말에 운호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사내는 유운신법을 펼치고 있었는데 예전 운학자가 펼친 것처럼 표홀하기 그지없었다.
“청문 사숙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운몽 사형을 뵙습니다.”
“허리 펴고 대답이나 해. 청문 사숙은?”
담장을 넘어 날아온 운몽이 쉬지 않고 물었다.
그의 나이 스물셋. 여전히 성격이 급하고 거칠었다.
한참 잘 먹고 잘 잘 나이인데도 몸은 대꼬챙이처럼 바짝 말라 무인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것은 그만큼 성격이 퍽퍽하다는 걸 나타내 주고 있었다.
재차 묻자 운호가 급히 입을 열었다.
황계에 왔던 첫날부터 호되게 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숙께서는 장문인과 함께 계십니다. 긴히 나눌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인지 들었어?”
“듣지 못했습니다.”
“답답하군!”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다. 그나저나 이제부터 같이 지낸다고?”
“그렇습니다.”
“운극!”
“예, 삼사형.”
“잘 가르쳐라. 대사형의 심기가 요새 꽤 불편한 것 같으니 눈에 나지 않도록 조심해.”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대사형께서는 어디 가셨습니까?”
“나도 찾고 있는 중이다.”
“그럼 운호는 일단 씻고 쉬라 하겠습니다. 대사형께서 오시면 그때 인사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나는 혈류동에 가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부르고.”
“예, 사형!”
운몽은 운극의 인사를 받지도 않고 신형을 날렸다.
버젓이 있는 정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담장을 넘었는데, 사형제들의 표정을 보니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다.
“휴우…….”
자신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 년 만에 상봉하는 사형제들과의 첫 대면이 그리 나쁘지 않으니 천만다행이었다.
더군다나 옆에 선 운여와 운상은 잔뜩 반가운 얼굴로,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질문을 퍼부을 기세였기 때문에 더더욱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황계.
황계의 정경은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다는 듯 아무런 변함 없이 자신을 맞아주고 있었다.
무정(武定)현.
사천 남부와 운남 북부를 연결하는 도시로서 인구 삼만에 달했고, 기름진 곡창지대와 각종 약초의 생산이 풍부해 윤택한 도시였다.
운남의 성도인 곤명(昆明)과 불과 이백 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물산의 유통 또한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세 개나 되는 표국이 성업하고 다섯 개의 문파가 자리를 잡은 곳이기도 하다.
점창산과의 거리는 오백 리에 달해 신법을 펼쳐 전력으로 달린다 해도 반나절이 꼬박 걸렸다. 운남이면서도 오히려 사천에 있는 칠절문의 본단과 거리상으로 더 가까운 지리적 특성을 지닌 도시였다.
칠절문이 과감하게 무정현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도 유리한 위치에서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는 지리적 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운남의 뜨거움을 적시는 폭우가 대지를 향해 쏟아지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만들었다.
저벅저벅.
어둠을 뚫고 걷는 사내들의 발자국 소리가 쏟아지는 빗소리와 함께 조화를 이루며 소름 끼치는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신법을 펼치지 않은 채 걷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절도가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멈춘 곳은 성벽처럼 담장이 둘러싸인 전각들이 화려한 불빛을 뿜어내는 구릉지였다.
불빛은 아름다운 나비가 유영하는 것처럼 어둠에 싸인 빗속을 뚫고 날아와 그들의 모습을 희미하게 밝혀주었다.
서른 명에 달하는 도.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검은색 피풍의를 착용했고, 흑색 무복과 죽립으로 통일되어 칙칙한 기운을 흘려내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구릉지대에 도착한 후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전각을 지켜보고 있었다.
단순한 침묵이 아니었다.
폭풍이 몰아닥치기 전의 고요라고나 할까.
팽팽한 긴장 속에서 생성된 잔뜩 웅크린 침묵은 전각을 지켜보는 자들의 눈을 점점 시퍼렇게 변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한참 동안의 침묵이 깨지며 음성이 흘러나온 것은 중간에 서 있는 오십 초반의 노인에게서였다.
“놈들은?”
“끝까지 반항할 생각인 모양입니다.”
“천수검이 제법 강단을 부리는구나. 하긴, 쉽게 항복했다면 재미없었을 것이야.”
“어쩌시겠습니까?”
“본을 보여야겠지. 다른 놈들에게 반항하면 모조리 죽는다는 걸 확인시켜 줘야 무정현을 손에 쉽게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시진을 주겠다. 끝장을 보도록.”
“존명!”
노인이 말을 끝낸 후 입을 꾹 다물자 중년 사내가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짧게 끊어 대답했다.
차앙!
손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귓가를 자극하는 도명과 함께 시퍼런 칼이 빠져나와 그의 손에 들려졌다.
그는 한 올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벽사대는 나를 따르라! 지금부터 길을 막는 자는 모두 죽인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도객들이 중년 사내의 뒤를 따라 전각을 향해 박쥐 떼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신법은 무겁고 진중하면서도 한 번에 일 장씩 죽죽 뻗어 나갈 정도로 빨라 전각과의 거리를 급속도로 좁히고 있었다.
파괴의 기운을 담은 검은 구름.
하늘을 가리는 흑운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그들의 손에는 어느새 빼 든 쌍수도가 시퍼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