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2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2화
청문자가 보여준 자세를 떠올리며 운호는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보다 더 느린 속도로 검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쉬워 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온몸을 으스러뜨리는 고통이 찾아왔다.
빠름보다 느림이 훨씬 힘들고 괴롭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시간이었다.
하체를 완벽하게 고정시키고 전신의 균형을 유지한 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을 느리게 움직인다는 것은 죽을 만큼 힘든 것이었다.
모래각반을 전신에 두르고 뛴 것보다, 몇 시진 동안 쉬지 않고 목검을 휘두른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그럼에도 운호는 참아냈다.
청문자가 가르쳐 준 파검칠식을 끊임없이 수련하며 자세를 가다듬어 나갔다.
다시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훨씬 발전된 모습을 보여 한시라도 빨리 유운검법을 익히고 싶었다.
하지만 칠 일이 지나 운문을 찾은 청문자는 그런 운호를 향해 질책만 하고 다시 사라졌다.
그런 행동은 석 달이 넘도록 변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운호의 자세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 동안 기본 자세를 붙들고 씨름해야 되는 걸까.
시간이 지나면서 기본 자세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밤잠조차 이루지 못하기 시작했다.
운학 사형은 석 달이 지나자 나중에 보자며 환한 웃음을 남기고 떠나간 이후 한 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사형이 있을 때는 위로라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마저 떠나자 외로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괴롭히는 건 청문자의 눈에 들지 못하는 검이었다.
의지가 강하다는 건 천성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자라온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운호는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의지 면에서 남다른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에 미친 자의 눈에는 오직 한 가지밖에 보이지 않는다는데 운호가 그랬다.
밥 먹을 때도, 해우소에 갈 때도, 심지어 잠잘 때도 오직 파검칠식에 목숨을 걸었다.
칠 일마다 나타나서 질책을 거듭하던 청문자는 삼 개월이 지난 어느 날 운호의 파검칠식을 확인하더니 이번에는 눈에 보일 정도의 속도로 수련하라며 훌쩍 사라져 버렸다.
눈에 보일 정도의 속도.
아주 느리게 움직이던 검을 막상 눈에 보일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려 하자 부자연스러워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검이란 참 요상한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똑같은 목검을 가지고 속도만 달리 했을 뿐인데도 자세가 금방 흐트러지며 균형이 무너졌다.
그러나 계속 수련하자 점점 익숙해졌고, 자세도 완벽하게 변해갔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느리게 수련하던 것에 비하면 훨씬 수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검이 손에 달라붙는다.
비록 목검이지만 구 개월 동안 손에서 떨어뜨린 적이 없으니 마치 몸의 일부처럼 여겨졌다.
청문자가 나타나 유운검법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검을 잡은 후 꼭 일 년 만이었다.
눈에 보일 정도의 속도로 삼 개월간 수련했고, 그다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검을 움직이게 만든 지 삼 개월이 지난 후였다.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가르침.
청문자는 유운검법의 초식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검리를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반복적으로 시범을 보여주었는데, 거의 한나절이나 지속되었다.
그냥 검의 진로만 보여준 것이 아니라 검법 운용의 핵심인 유운신법까지 가미되어 움직이니 운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천천히 가르친다 해도 처음 초식을 접하는 운호의 이해 능력은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은 번쩍이며 청문자의 검을 지켜보았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또다시 칠 일을 기다려야 했다.
그것도 제때 왔을 때야 그렇고 청문자가 수련에 정신을 팔게 되면 보름이 될 수도 있고 한 달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운호는 청문자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했다.
“유운검법은 점창의 기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검법이다. 개파조사이신 태청자께서 점창을 여신 후 지금까지 점창의 검은 언제나 패의 길을 걸어왔다.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는 것이 점창의 검이니 점창의 기상을 한시도 잊지 말라.”
검을 접고 떠나면서 청문자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운호가 비상한 두뇌를 지닌 천재라 해도 단 하루 만에 유운검법을 익힌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만병지왕이라는 검의 길.
그 길이 쉬웠다면 만병지왕이라 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청문자가 떠난 후 머릿속에 저장해 놓은 검의 진로와 신법의 경로가 상충되면서 운호는 단 일 초식도 제대로 시전할 수가 없었다.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에 고개를 흔들며 수없이 같은 시도를 반복했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청문자의 거듭된 시범을 보면서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혼자 하려니 팔이 움직이지 않고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바위에 앉아 머리를 감싸 안고 괴로워했다.
노력으로 되는 것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지만 유운검법은 운호를 비웃기라도 하듯 전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청문자의 앞에서는 한 올도 남기지 않은 나신으로 온갖 교태를 보이던 놈이 어찌 자신의 앞에서는 옷섶을 굳게 여미며 꼼짝도 하지 않는단 말인가.
답답하고 답답한 일이었지만 운호는 또다시 목검을 손에 쥐고 공터에 섰다.
마음을 다잡는다.
자신은 분명 사숙의 설명을 들으며 유운을 봤고, 그 움직임을 기억하고 있다.
검법 속에 숨어 있는 위력을 찾아내어 펼치지는 못하겠지만 비슷하게라도 따라 하고 싶었다.
어두워지는 것도 잊었고 새벽이 다가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꼬박 공터를 헤맸다.
또다시 떠오른 태양이 그의 얼굴을 붉게 만들었어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굳은 얼굴.
유운을 꺼내지 못한 그의 얼굴은 실망과 분노로 인해 잔뜩 굳어 있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놈이로다!”
아침마저 굶은 채 목검을 휘두르는 운호의 뒤에서 창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언제 나타났는지 바위를 딛고 선 청문자는 운호의 수련 모습을 보면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꾸짖었다.
한눈에도 그 후 공터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그의 눈에는 답답함이 담겨 있었다.
“어쩌자고 밤을 새운 게냐!”
“유운이 저에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쯧쯧쯧, 점창의 신기가 그리 만만해 보였단 말이냐? 단 한 번으로 너에게 진면목을 보여줄 정도라면 그것이 어찌 유운이겠느냐!”
“…….”
“먼저 밥을 먹어라. 그다음 내 너의 수련을 보도록 하겠다.”
청문자는 그로부터 칠 일 동안 운문을 떠나지 않고 운호의 곁에서 유운검법의 수련을 도왔다.
초식 하나하나마다 들어 있는 속성과 검리를 일일이 설명했고, 자세를 교정해 주며 전진과 진퇴의 묘리를 깨우쳐 줬다.
신법이 검법에 미치는 영향과 그 운용의 적절성을 강조하며 변화를 가르쳤고, 속도와 균형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주입시켰다.
그 칠 일 동안 청문자는 일 년이 넘도록 하던 말보다 훨씬 많은 말을 운호에게 하며 수많은 질책을 퍼부었다.
단 한 번도 칭찬을 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기꺼워하지 않았다.
운호의 괴로움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칠 일간 유운검법의 운용을 가르치고 떠난 청문자는 칠 일마다 한 번씩 나타나서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않고 얻어맞다가 사숙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된 이후부터 유운검법을 시전해서 반격을 시도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얻어맞는 것은 똑같았다.
처음이나 나중이나 청문자가 나타난 날은 밤새도록 끙끙 앓아야 했다.
인정사정 보지 않고 두들겨 팼기 때문에 온몸이 멍으로 뒤덮였고, 잠자리에서 제대로 눕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다음 날 일어나서 수련을 할 수 있는 것은 천룡무상심법의 효능 때문이었다.
잠이 들면 여전히 혈도를 두들기던 힘이 고통과 함께 전신으로 움직여 고통을 완화시켜 주었다.
아지랑이와 같은 기운은 사부님이 두들기던 그 혈도의 순서에 따라 천천히 움직였는데 아침이 되면 청문자에게 얻어맞았던 멍 자국은 대부분 사라진 상태였다.
사부가 남겨주신 천룡무상심법의 무한한 효능을 확인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달리기를 하면서 고갈된 체력을 회복시켜 주었고, 목검에 얻어맞은 상처마저 단숨에 치료해 주니 천룡무상심법은 천고의 비전임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생각은 청문자로 인해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사정없이 한동안 두들겨 패던 청문자는 땅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운호를 향해 뼈에 사무치는 한마디를 던지고 떠났다.
“천룡무상심법의 단점은 주천화부(周天火符)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네가 지금 겨우 당도한 주천화부는 몸의 균형을 유지시켜 주고 단전에 기를 축적시키는 단계에 불과하다. 다른 심법과는 다르게 주천화부에 이르는 기간이 짧아 수많은 선조께서 그 함정에 빠진 채 생을 마감하셨다. 그런데도 너의 사부께서 너에게 천룡무상심법을 남긴 이유가 뭔지 아느냐?”
“모릅니다.”
“내가 알기로 너의 사부께서는 당신이 삼십 년 동안 연구해서 얻은 심득을 알려주었다고 들었다. 맞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되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사숙께서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심득은 머릿속에 있는 내용을 외우는 것만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 뜻을 깨우쳐야 진정한 천룡무상심법을 익힐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천지의 이치를 깨달아야 되는 것이다. 운문에는 수많은 책이 쌓여 있다. 보았느냐?”
“봤습니다.”
“그 책을 모두 읽고 뜻을 새겨라. 그리하여 네 사부님이 전해주신 심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아내라. 그리했을 때 너는 주천화부의 경지에서 벗어나 창천으로 날 수 있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때부터 운호는 낮 수련이 끝난 후엔 운문에 쌓여 있는 수많은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사서삼경은 물론이고 각종 경전과 고서를 섭렵했고, 심지어 불경까지 읽었다.
운문에 있는 책을 모두 독파하자 운호는 본문 자경각에 쌓여 있는 책까지 쓸어와 운문을 책으로 뒤덮이도록 만들었다.
청문자는 여전히 칠 일에 한 번씩 나타나 운호를 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수위가 높아지고 시간도 길어졌다.
유운검법을 펼쳐내는 운호의 검이 세월이 지날수록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국 맞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점창제일고수 청문자의 검은 운호의 검을 마음껏 희롱하다가 시간이 되면 가차 없이 꺾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리곤 했다.
유수와 같은 세월.
세월은 흘러가는 물처럼, 나무 사이를 지나는 한줄기 바람처럼 순식간에 흘러가고 말았다.
청문자가 말한 오 년의 세월이 그렇게 지나갔다.
점창에는 분광십팔수검, 삼절검, 회풍무류사십팔검 등 십여 가지의 검법이 있었고, 냉염장(冷焰掌), 오라경연장(五羅輕烟掌), 신조장법(神爪掌法)과 칠절중수(七絶重手), 자모이혼수(子母離魂手), 한운수(閑雲袖), 일양지(一陽指), 금나수(擒拏手), 칠절수(七絶手) 등 수많은 권법과 지법이 있었다. 그러나 청문자는 그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고 오로지 유운검법과 유운신법만을 전수했다.
그리고 오 년이 지난 오늘.
청문자는 마지막 대련에서 운호의 유운검법을 보며 만족에 겨운 함박웃음을 흘렸다.
마지막 대련에 걸린 시간은 무려 한 시진.
청문자가 마음먹고 유운을 펼쳤으나 끝끝내 운호의 검을 꺾지 못하고 대련을 마무리했다.
물론 꺾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어찌 꺾지 못했을까.
하지만 내공을 쓰지 않은 상태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만큼 운호의 유운검은 경지에 달해 있었다.
그렇게 격렬한 대련이 끝난 후 석양을 마주한 운호의 붉은 전신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뿐 한껏 여유가 흘렀다.
운호의 나이 열여덟.
어릴 적 허약하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온몸이 바윗돌처럼 단단하게 변한 사내가 검을 짚고 서 있다.
처녀들의 방심을 흔들 만큼 멋지게 변해 버린 운호의 얼굴은 함박웃음으로 덮여 있어 사람의 마음을 밝게 만들었다.
그런 운호를 청문자가 기꺼운 얼굴로 쳐다보다 천천히 운문의 경치를 둘러보았다.
온통 바위뿐이었지만 석양이 올라오자 그 경치가 절경이라 부를 만했다.
청문자의 입이 슬그머니 열린 것은 가운데 구름 속에 숨어 있던 태양이 마지막 빛을 내며 사라질 때였다.
“짐은 다 쌌느냐?”
“가져온 게 없잖습니까.”
“그렇기도 하구나. 그럼 가볼까?”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오 년이란 세월이 참으로 꿈결같이 지나갔구나. 남은 인생 역시 그렇게 흘러가겠지.”
“사숙님의 남은 삶은 영광의 길이 될 것입니다.”
“이놈아, 내가 말했잖으냐. 아부와 아첨은 사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저는 그게 뭔지도 모릅니다.”
“쯧쯧쯧, 내가 너하고 무슨 말을 하겠느냐. 꼴 보기 싫으니 너는 돌아가면 곧장 풍운대가 있는 황계로 가거라.”
“곧장 말입니까?”
“장문인께 인사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