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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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0화
청곡자의 장례는 조촐하게 치러져 선묘에 안장되었다.
장로의 직책을 박탈당한 상태이기 때문에 평문도에 불과해 문장으로 치르지 못했지만 그의 죽음은 수많은 점창문인을 뜬눈으로 밤새우도록 만들기 충분했다.
슬픔은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
운호가 그랬고, 청자배 장로들이 그랬다. 점창의 미래를 짊어질 운자배 일대제자들이 청곡자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보내며 본래의 삶으로 되돌아갔다.
잊었기 때문이 아니라 또 다른 내일 속에서 점창의 명예를 드높이라는 청곡자의 가르침을 더욱 공고히 새기기 위함이다.
장례가 끝난 다음 날부터 운호는 또다시 달리는 걸 시작했다.
다른 사람보다 훨씬 큰 슬픔이 가슴에 담겨 있었지만 사부의 마지막 말을 이루기 위해서는 잠시라도 절망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직 그에게는 무공에 대한 입문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골격이 완성되고 체력이 궤도에 오를 때까지 외로운 싸움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을 멀리 보낸 슬픔을 잊기 위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로지 앞만 보고 뛰었다.
그런 세월이 계속되면서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뼈마디만 있었던 체격은 그로부터 이 년이 지나자 어느 샌가 탄탄해졌다. 모래각반을 전신에 두른 상태에서 한 번도 쉬지 않고 용호각까지 뛸 수 있는 체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모래각반은 팔다리에서 어깨와 가슴, 허벅지까지 전신으로 확장해서 착용했는데, 그 무게가 다섯 근이나 되었다.
청허자로부터 달리는 걸 멈추라는 명이 내려진 것은 정확하게 이 년 일곱 달 열흘이 지난 후였다.
운호의 나이 열두 살에서 두 달이 지났을 때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이 되어 모래각반을 온몸에 두르고 나서려는 운호를 아침 일찍 나타난 청허자가 가로막았다.
“앉아라.”
“예, 사백.”
“등을 대고.”
대뜸 명을 내린 청허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등을 내민 운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오른손이 중추, 척중, 명문을 훑어 내렸고, 곧이어 왼손이 대맥, 요추, 오도를 일일이 짚으며 꼼꼼히 살펴 내려갔다.
그리고도 한동안 청허자는 운호의 전신 혈도를 하나씩 살펴 나갔다. 중간중간 근육의 형성과 장기들의 위치까지 확인했다.
청허자의 손길이 멈춘 것은 거의 일각이 지난 후였다.
“혈류동이 지겹지 않더냐?”
“그렇지 않았습니다.”
“네 심지가 참으로 대단하구나. 무공을 익히지 못할 만큼 빈약했던 근골이 불과 삼 년 만에 이 정도로 완벽해진 것은 너의 노력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참으로 고생했다.”
“사숙들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입니다.”
“흘흘,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웠을꼬. 가르쳐 준 사람도 없었을 텐데 별걸 다 배웠구나.”
운호가 무슨 뜻이냐는 얼굴로 쳐다보자 청허자가 가볍게 헛기침을 해댔다.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처세에 대해 한마디 한 것인데 운호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쯧쯧.’
세상물정에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운호를 향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었으나 재빨리 다시 입을 열어 운호의 말을 막았다.
질문을 받고 난처한 대답을 하는 것보다는 미리 선수를 쳐서 곤란함을 해결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대처 방법이었다.
“오늘부터 달리는 걸 멈추고 운문으로 가거라. 청문 사숙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청문 사숙께서 왜 저를?”
“이놈아, 그럼 언제까지 뛰기만 할 생각이냐. 풍운대가 매일 뛴다고 해서 되는 줄 알았느냐?”
“그럼 저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시는 건가요?”
“청문이 직접 네 기초를 닦아준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즉시 짐을 챙겨서 운문으로 가거라. 그리고 이것은 사문의 기보인 태청단이란 것이다. 청문에게 가면 복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 잘 보관하도록. 이젠 앞으로 종종 보게 될 테니 각오하거라.”
청허자는 자신이 할 말만 하고 왔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장 무서운 청허 사백이 불현듯 나타나 대뜸 무공 입문을 통보했기 때문에 얼떨떨해하던 운호는 한참이 지나서야 방문을 열었다.
방문 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형제들은 몇 달 전부터 둘씩 나뉘어 사숙들로부터 집중적인 지도를 받았다. 수련에 매진하고 있기 때문에 용호각은 텅 빈 상태였다.
그때부터 용호각을 지킨 것은 운호가 유일했기 때문에 사람의 인기척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방문을 통해 들어온 전경.
언제나 방문을 열면 그를 반겨주던 마당과 담장, 그리고 한쪽에 우뚝 서 있는 참나무와 그 옆의 못생긴 바위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을 바라보며 운호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혼자만의 외로웠던 이 년 칠 개월의 싸움.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던 고독한 싸움은 고통스럽고 잔인했으며 더없이 외로운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청허 사백은 이제 그 싸움을 끝내라며 수고했다고 말했다.
쉬이 믿을 수 없었으나 청허자가 남겨준 옥함이 아직도 손에 꼭 쥐어져 있기에 운호는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감고 말았다.
사부님이 돌아가신 후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좋은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이 자꾸 흘러내려 운호는 웃으면서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운문은 점창산 서쪽의 험한 지형을 일컫는 말이다.
바위들이 줄지어 늘어서 길을 만드는 곳.
향화객들이 절대 오르지 못하는 길일 뿐 아니라 점창문인조차 드나들기 꺼릴 정도로 험한 지형이었다.
용호각과는 동전의 앞, 뒷면처럼 완벽하게 반대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최소한 다섯 시진은 걸리는 거리이다.
짐이라고 해봐야 달랑 옷 몇 가지와 사부가 남겨주신 세 개의 유품이 전부이다.
운호는 사부의 유품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은 후 옷가지에 정성스럽게 싸맸다.
두 개의 목각 인형과 하나의 작은 은종.
목각 인형은 점창으로 오는 도중 저잣거리에서 사부님이 사주신 것이고, 은종은 예전 강호에서 활동할 때 무정검의 징표로 삼았던 것이라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사형들과 운여에게 자신의 행적을 남기고 싶었으나 아직 글을 배우지 못했기에 그냥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용호각을 나선 운호는 잠시 멈춰 서서 전각들을 확인한 후 즉시 정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의 미련도 남기지 않겠다는 자세.
미래에 대한 도전이 있을 뿐, 불안했던 과거는 과감히 지워 버리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었다.
정상까지의 길은 혈류동에서 용호각을 잇는 험로에 비한다면 오히려 평이했다. 정상을 넘어 나타나는 운문까지의 길은 험준하기 그지없었으나 내려가는 길이어서 속도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운문에 도착한 것은 아직 해가 남았을 때였다.
거의 삼 년 동안 달리기로 체력을 키운 운호는 전신에서 모래각반을 제거하고 뛰자 고양이처럼 날렵하기 그지없었다.
온통 바위로 뒤덮인 지형.
운문이라면 구름과 관련되어야 정상인데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바위뿐이었다.
운호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걸음을 떼었다.
험한 바위군 사이에 허름한 초옥 하나가 한쪽 능선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초옥을 발견한 이상 망설이 필요가 없었다.
운문으로 가서 청문 사숙을 찾으라 했으니 그가 있을 곳은 오직 저 초옥뿐이고,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초옥에 도착하자 마당에 놓인 평상에 좌정한 채 흑색 도복을 입은 노인이 그를 맞아들였다.
허허로운 기운.
처음에 봤을 때는 그 기세가 너무나 강렬해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청문자는 끝을 발견하지 못할 정도의 깊은 눈으로 운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입이 열린 것은 운호가 다가와 허리를 숙일 때였다.
“운호가 사숙님을 뵙습니다.”
“왔느냐. 오르라.”
신기하게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그가 말한 곳이 평상의 왼쪽 빈자리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말투가 너무 자연스럽고 평온해 운호는 주저 없이 지시에 따라 평상에 올랐다.
운호가 무릎을 꿇은 채 올려다보자 청문자의 입이 다시 열렸다.
“내가 누구냐?”
“청문 사숙이십니다.”
“나를 얼마나 아느냐?”
“잘…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이 아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운호의 모습을 건너 청문자의 시선이 서서히 지면서 노을을 만들어내는 태양을 향했다.
아무런 기세를 내보이지 않았는데도 숨이 막힐 정도로 풍겨 나오는 압도적인 기운.
태양을 베고 싶은 무인의 열망일까?
한동안 노을을 바라보던 청문자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운호가 어쩔 줄 모르고 손에 찬 땀을 무릎에 닦을 때였다.
“내가 너를 맡겠다고 한 이유를 아느냐?”
“그것도 모릅니다.”
“그렇겠지. 너를 맡은 이유는 내가 사문에 오 년간의 시간을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오 년 동안 사문 최고의 절기인 사일검을 익히기 위해 폐관 수련할 예정이다.”
“그런데 왜 저를?”
“청곡 사형께 받은 은혜를 돌려주기 위함이다. 사형께서는 내가 너의 무공 기초를 닦아주길 간절히 원하셨다.”
“사부님께서…….”
“또한 사형들께서 너의 노력을 칭찬하며 풍운대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가르쳐 주기를 바랐다. 네 정성이 갸륵하다고 하시더구나. 그러나 나는 수련을 해야 되기 때문에 너를 일일이 지도할 수 없다. 나와 함께 오 년 동안 지내겠지만 얼마나 얻는가는 너에게 달려 있음을 명심하라.”
“예, 사숙. 죽을 각오로 배우겠습니다.”
청문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안다.
그럼에도 운호는 뛰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붉은 노을.
태양이 모습을 숨겼고, 노을에 비친 구름만이 마지막 아름다운 빛을 반사시키며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청문자는 말을 끝낸 후 침묵을 지켰고, 운호 역시 대답을 한 후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점창 최고수 청문자.
분광과 회풍의 경지를 위해 스스로 폐관의 길을 가는 절정의 무인과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된 운호의 운명이 서로 교차되며, 그렇게 운문에서의 첫날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새겨라. 유운검법은 구름이 흐르는 형상처럼 유로 강을 제압하는 검법이니라. 점창의 입문 검법이자 사문의 비기를 익히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초 공부이니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세 번을 보여줄 테니 그대로 따라서 하거라.”
운문으로 온 다음 날 아침, 청문자는 운호를 앞에 두고 유운검법의 기초 검리를 가르친 후 세 번의 시범을 보였다.
두 번은 동작 하나하나를 아주 느리게 펼쳤고, 마지막 한 번은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쾌검을 펼쳐 허공을 갈라놓았다.
내력을 싣지 않았음에도 운문의 한쪽 공간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운호는 입을 벌린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천하를 내려다보는 절정 무인의 검.
가히 경이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놀란 채 움직이지 못하는 운호를 향해 청문자가 입을 열었는데, 그 음성이 차가워 마치 그가 펼쳐낸 검과 비슷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칠 일 후 네가 익힌 유운을 볼 것이다. 진전된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더 이상의 가르침은 없을 것이니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그리하겠습니다.”
“글자를 익히는 것은 무인이 되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다. 세상의 이치가 머리에 담기지 않으면 상승 공부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예.”
“석 달에 걸쳐 운학이 운문으로 와서 네가 글자를 익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그는 오지 않을 테니 나머지 공부는 네 스스로 해야 될 것이다. 서책은 초옥에 마련해 놨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운학 사형은 언제부터 오십니까?”
“오늘 밤부터 올 것이다. 마음이 바쁘다. 시간이 없으니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해라.”
“어디로 가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건 알 필요 없다.”
“칠 일마다 오시는지요?”
“그렇다.”
“그렇다면 기다리겠습니다.”
서두르는 청문자를 향해 운호가 입을 굳게 닫았다.
더 이상 시간을 빼앗지 않겠다는 의지가 행동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청문자가 사라지자 혼자 남은 운호는 바위 곁에 놓인 목검을 손에 쥐고 마음으로 감촉을 느꼈다.
처음으로 쥐는 목검.
오직 달리기만 했을 뿐 목검을 쥐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가벼운 흥분이 생겨났다.
목검을 들어 청문자가 한 것처럼 전면을 향해 진격세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멈추어 선 채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리 천재라 해도 단 몇 번 만에 유운을 시전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동작 하나하나마다 배어 있는 검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행할 때, 검은 길을 찾아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초식이라는 것이다.
유운검법은 칠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초식마다 십팔 변이 존재하니 다른 문파의 기초 검법에 비하면 엄청나게 까다로운 검법이었다.
그런 검법을 단 세 번의 시범만 보여주고 횅하니 떠나 버린 청문자의 행동은 진정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한참을 꼼짝하지 않던 운호가 목검을 천천히 거두어들인 것은 반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역시 청문자의 행동이 과하다는 것을 느꼈다.
가르치는 것이 귀찮아서 그랬던 걸까?
하지만 즉시 고개를 저었다.
가르치는 것이 귀찮았다면 당초부터 받아들이지 않으면 될 일이고 굳이 유운검법까지 보여줄 필요도 없었다.
청문 사숙은 자신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사부님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가슴에 와 닿을 정도로 무척이나 합당했기 때문에 한 올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실없이 자신을 데리고 장난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운호는 눈을 감고 유운검법을 느리게 펼치는 청문 사숙의 검을 떠올렸다.
그러자 각 일곱 초식을 펼치는 청문 사숙의 검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아, 이것이었구나!’
처음에는 자신의 판단이 의심스러웠으나 계속해서 기억을 떠올리자 점점 확신이 들었다. 운호는 눈을 번쩍 뜨고 목검을 들어 올렸다.
청문 사숙은 한 가지 동작을 연속해서 몇 번 반복한 후에야 초식을 펼쳤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것이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모든 동작의 기본이 되는 척검과 격검이 바로 그것이었다.
찌르기와 베기.
일곱 가지 척검과 격검은 상중하로 나뉘었고, 또다시 좌우로 갈렸는데 횡격과 종격이 맨 끝이었다.
청문 사숙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운호는 그때부터 척검과 격검을 수련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