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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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7화
“……무정검이 우시는구려. 그리 가슴 아프시오?”
운호가 사라진 후 노안에 떨어지는 눈물을 막지 못한 청곡자가 가슴을 움켜쥐자 청문자가 깊은 한숨을 내리쉬었다.
청곡자의 별호는 무정검.
옛날 강호를 종횡할 때 무림인들이 지어준 별호이다.
그만큼 강건했고 냉정했다. 불의는 참지 못했고 약한 자의 편에 서서 점창의 이름을 드높였다.
협객의 진정한 모습.
그럼에도 무정검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만큼 악한 자들에게는 조금의 인정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무정검이 운다.
그리 강건하고 우직하던 사형에게서 눈물이 흘러나오자 청문자는 잠시 동안 말을 하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했다.
울음을 삼키는 그의 얼굴에는 진정한 슬픔과 아픔이 담겨 있었다.
“그만하시구려.”
“……사제도 제자가 있겠지?”
“둘을 키웠소.”
“어땠나?”
“예쁘기도 했고 귀찮기도 했소. 어떨 때는 밉기도 하더이다.”
“운호는 불쌍한 아이였어. 나를 만나 새 생명을 얻었지. 그리고 곧 내 목숨이 되었다네.”
“그런데 왜 굳이 풍운대에 보낸 것이오?”
“가야 했으니까.”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옆에 두지 그러셨소.”
“내 마지막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네.”
“하긴… 그렇기도 하겠구려.”
양손을 주무르며 청곡자가 대답하자 청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화입마를 당한 무인의 마지막은 더없이 고통스럽고 잔인하다.
그런 모습을 제자에게 보여주지 않으려는 청곡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기에 청문자는 그저 눈만 끔벅였다.
잠시 동안 침묵이 방 안에 흘렀다. 갑작스러운 슬픈 이별을 정리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참이 지나고 청곡자의 눈물이 잦아들자 그때서야 청문자의 입이 열렸다.
“천룡무상심법은 어디서 구했소?”
“하산할 때 초량암 구석에서 상자를 발견했네. 그 상자에 담겨 있더군.”
“그렇구려. 그런데 왜 그걸 운호에게 전해주었소? 천룡무상심법은 익히기 난해해서 거의 쓸모가 없는 심법 아니오?”
“맞네. 하지만 만천자께서는 천룡무상심법을 익히시고 태양을 베셨네. 사일검을 극으로 펼치기 위해서는 천룡무상심법을 익혀야 하네.”
“하지만 익히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소. 만천자께서 돌아가신 후 수많은 사조께서 심법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은 포기하고 말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천룡무상심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다른 심법을 익히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니 천룡무상심법을 익힌 사조들께서는 모두 땅을 치며 후회하셨소.”
“사제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네. 삼십 년 동안 천룡무상심법을 공부했지만 나조차 그 극의를 확인하지 못했어. 그럼에도 운호에게 심법을 전수한 것은 한 가닥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네. 점창의 영광을 되찾고 싶다는 열망이 나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었네.”
“운호가 절망한 사조들처럼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하셨단 말이오?”
“분광과 회풍을 자네와 장로들에게 전한다면 점창은 날개를 달게 된다네. 하지만 태양을 베지 못한다면 그 옛날 무림을 이끈 점창의 영화를 되찾지 못해. 나는 운호가 천룡을 얻어 태양을 베기를 간절히 바라네.”
“사형의 욕심이 참으로 크시구려.”
마지막 절을 마치고 운호가 나선 방문을 쳐다보며 청곡자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자 청문자의 입에서 또다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운호에 대한 사랑은 사형의 늙은 얼굴을 가득 적신 눈물에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점창을 위해 제자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만든 사형의 이중적인 태도는 진정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것이었다.
백 년 동안 절전되었던 천룡무상심법.
다른 절기를 되찾았다면 커다란 흥분에 젖어 점창이 온통 난리가 났겠지만 천룡무상심법은 근본적으로 거의 사장되었던 심법이었다. 청곡자를 통해 다시 나타났어도 장문인인 청현자를 포함해 모든 장로가 그저 덤덤히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만큼 쓸모없는 심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목숨처럼 사랑하는 제자에게 그런 심법을 전수했으니 진정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청문자의 그런 의문은 청곡자의 한마디로 인해 금세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사제, 나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겠지? 지금부터 자네에게 분광과 회풍을 보여주겠네. 태양을 벨 수는 없겠으나 자네라면 빛과 바람은 충분히 벨 수 있을 것이야. 그러니 당장 준비하시게.”
상륜각에서 나온 후 운학의 손에 이끌려 황계곡에 도착할 때까지 운호는 슬픔을 숨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눈물을 보였다.
그의 눈물은 경망스럽지 않았고 시끄럽지 않았으며 가볍지 않았다.
묵묵히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
그 눈물 속에는 슬픔이 절절히 담겨 있어 바라보는 운학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상륜각에서 그들 사제의 슬픈 이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운학은 황계곡까지 올 동안 운호에게 청곡자에 대한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겪어야 할 이별이라면 그에 대한 슬픔은 운호의 몫이 될 수밖에 없고, 그 슬픔을 이겨내는 것 역시 운호가 해야 할 일이었다.
어린 사제이나 사부를 사랑하는 마음은 오래전 어른이 되어버린 자신보다 훨씬 강한 것 같아 씁쓸한 마음마저 들었다.
조건 없는 운호의 사랑은 티끌 하나 없는 백지에 쓰인 것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냥 이별이 아니라 죽음을 염두에 둔 이별이니 그 찢어지는 마음이 오죽하랴.
운학은 운호를 옆으로 끌어당긴 후 멀리 보이는 오목한 계곡을 가리켰다. 이대로 운호를 지켜보다가는 감정을 억제 못하고 사부인 청현에게 달려갈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청현자의 몸이 야위어져 간다는 생각이 점점 커져 갔다.
“운호야, 저기가 황계곡이다. 나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으니 이제부터는 너 혼자 가야겠다.”
“어느 쪽으로 가요?”
“움푹 파인 계곡 쪽으로 돌아가면 세 채의 전각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 가면 된다.”
“……알았어요.”
“앞으로 네 앞날에는 힘든 일이 많을 것 같구나. 육체적인 고통은 지독하고, 죽고 싶을 정도의 외로움이 너를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견뎌라. 그리고 이겨내라. 점창의 암천이 되어 강호를 질주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난관이 어찌 대수이겠느냐. 운호야, 부디 멋진 무인이 되길 바란다.”
“최선을 다할게요.”
“나는 이제 돌아가련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으나 다시 만나는 날에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저는 울보 아니에요. 오늘은 아주 특별하게 슬픈 날이기 때문에 운 것뿐이에요. 사부님께서 사내의 심장은 언제나 뜨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저 운호는 사부님의 말씀처럼 철혈의 심장을 갖도록 노력할 거예요.”
“껄껄껄, 장하다.”
“사형, 이렇게 데려다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세요.”
“그래, 너도 몸조심하거라.”
공손히 인사하는 운호의 머리를 쓰다듬는 운학의 얼굴에는 기특하다는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나이로 따진다면 바로 위인 운몽 사형의 제자보다 어렸으나 운호의 행동에는 어딘지 모르게 절제된 기품이 담겨져 있었다.
진정 모를 일이었다.
품성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청곡자의 가르침 때문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배분이 자신과 동렬이라는 사실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큼 운호의 품성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탐이 났다.
비록 몸은 성치 않으나 이런 기상을 지녔으니 바르게 키워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에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한번 선택한 이상 운호는 오직 청곡자의 제자일 뿐이다.
잠시 동안 머리를 쓰다듬던 운학이 유운신법을 펼쳐 뒤로 날아간 것은 황계골에서 못마땅한 기침 소리가 울려 나왔을 때다.
그는 기침 소리를 듣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는데, 기침 소리의 주인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걸 무척이나 꺼리는 것 같았다.
역시 점창십삼검에 포함되는 무인.
전력으로 신법을 펼치자 마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처럼 투명한 기운만을 남긴 채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상청궁에서 처음 만난 청면이라는 이름의 사숙이었다.
점창 최고 배분의 청자배 장로 중 다섯 번째이고 성격이 유별나게 까다로워 점창에 속한 무인들은 그와 상대하는 걸 극도로 꺼렸다.
“여기서 뭐 하는 게냐, 왔으면 냉큼 들어오지 않고!”
“이제 막 도착했어요.”
“어허, 이놈이 말대꾸를!”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뭘 잘못 먹었는지, 청면자는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는 운호를 향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미리 운학 사형에게서 청면자의 성격에 대해 들었기 때문에 운호는 지체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운학은 장로들이 화를 낼 때 무조건 고개를 조아리고 잘못을 시인하면 웬만한 일은 대충 넘어간다고 대처 방안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무척 효과적이었다.
“흥, 따라오너라. 너를 기다리느라 네 사형이 아침을 굶고 있었다는 걸 명심해라. 멍청한 놈!”
청면자는 더 이상 추궁은 하지 않았으나 대신 간담이 서늘해지는 이야기를 꺼냈다.
사형들에 관해 처음으로 듣는 정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 때문에 아침밥을 굶어 상당히 화가 났다는 것이니 정신이 아득해질 수밖에 없었다.
비록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하더라도 상황이 자신으로 인해 발생했다면 사형들은 모든 책임을 지우려 할 것이다.
같이 살아가야 할 사형들이니 첫 대면에서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은 이상하게 나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랬기에 청면자를 따라 계곡으로 들어서는 운호의 발걸음은 전각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무거워져 갔다.
“그 아이는 왔는가?”
“놈들 방에 넣고 오는 길이오.”
“수고했구먼. 앉게. 아직 식지 않았어.”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청면자를 향해 청운자가 빈자리를 가리켰다.
방 안에는 그 말고도 청우자가 더 있었는데 청면자가 밥상을 향해 다가오자 슬그머니 엉덩이를 밀어 공간을 여유 있게 만들어주었다.
청현자가 장문인으로 취임한 후부터 장로들이 직접 풍운대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넉 달씩 맡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그 처음이 방 안에 있는 세 사람이었다.
두 노인의 밥그릇은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자리에 앉은 청면자의 인상이 슬그머니 변했다.
“잠깐 갔다 온다고 했는데 그새 드셨소? 참으로 너무하는구려.”
“껄껄, 미안하구먼.”
“사형은 그렇다 쳐도 자네까지 이럴 수 있는가?”
“넷째 사형께서 혼자 먹으면 밥맛이 떨어진다고 하더이다. 소제도 어쩔 수 없었소.”
“흥, 말은 잘하는군.”
“그깟 밥 가지고 뭘 그러나. 청우는 내가 억지로 먹였네. 그러니 그만 화 풀게. 그건 그렇고 그래, 아이는 어떠하든가?”
“직접 보시면 될 것 아니오.”
“사제, 다음부터는 같이 먹을 테니 그만하고 말해봐.”
“무골이 아니오.”
“어허,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시는가!”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하오. 워낙 고생을 해서 그런지 혈이 망가진 것으로 보이오. 무공은 고사하고 일반인처럼 체력을 회복하는 데도 한참 걸릴 것 같소.”
“음…….”
청면자의 말에 반대쪽에 있던 두 노인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시 확인해 봐야 되겠지만 청면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풍운대에 포함되어 한참 수련 중인 일곱 명의 아이는 벌써 일 년 반 전부터 점창십삼검의 지도 아래 체력 훈련을 지속해 왔고, 점창의 기초 심법과 무공에 입문해서 어느 정도 성취를 보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단순히 운호가 풍운대의 아이들보다 늦게 들어왔다는 점이 아니었다.
풍운대에 포함된 일곱 명의 아이는 청자배 장로들이 직접 천하를 휘젓고 다니면서 고르고 고른 무골이기 때문에 무공의 성취도가 무척이나 빨랐고, 태청단을 주기적으로 먹어 체력 또한 또래에 비해 월등한 상태였다.
반대로 운호의 체력은 또래에 한참 뒤질 정도로 연약했고 무공은 아예 견식조차 못해봤기 때문에, 그가 풍운대를 따라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장로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큰 격차는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전력을 다해 육성하고 있는 풍운대의 수련에 방해가 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만져 봤나?”
“꼭 만져 봐야 압니까?”
“그래도 만져는 봐야지. 혹시 알아. 너무 말라서 근골을 확인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잖아.”
“사형은 나를 그렇게 못 믿으시오?”
“쯧쯧, 못 믿어서 그러겠는가. 셋째 사형 때문에 그러지. 그리 간절하게 부탁했는데…….”
“어쨌든 일단 애들한테 넣어놨으니 천천히 지켜봅시다. 셋째 사형이 계실 때까지라도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나 또한 셋째 사형이 죽기 전에 여한을 만들어주고 싶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