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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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3화
청곡의 손짓에 몸을 돌린 운학은 유운신법을 펼쳐 바위를 짚고 순식간에 오 장을 전진했다. 그러다 이상한 기색을 느끼고는 뒤로 돌아본 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운신법은 명칭대로 구름이 흘러가는 것처럼 부드럽고 표홀해서 전진과 후퇴가 자유롭고 적은 내공으로도 험한 지형과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절학이었다.
점창에 몸을 담은 제자들이 유운검법과 더불어 가장 기본으로 배우는 공부였다.
물론 그 깊이에 따라 효능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나지만 일정 수준까지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점창 사람은 대부분 이동 시 유운신법을 펼쳤다.
그런데 청곡 사백과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꼬마는 그러지를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청곡 사백이 아이를 안고 신법을 펼칠 것이란 생각을 했지만, 사백은 제자리에서 불과 다섯 발자국 옮긴 상태에서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 이런 바보 같은 짓을.
그때서야 청곡 사백에 대한 사부의 말이 머리를 때렸다.
역대 점창 무인 중에서 손가락에 꼽힌다는 천고의 기재.
점창의 최후 절예인 사일검의 마지막 초식, 회풍무류를 익히다 내력이 역행되어 모든 내공을 잃었다고 했던가.
그 충격으로 인해 점창을 벗어나 세상을 전전하며 스스로를 혹사시켰다던 불운의 천재가 바로 청곡이었다.
그런 사실을 깜박하고 신법을 펼쳐 움직였으니 결례도 이런 결례가 없었다.
다시 몸을 날려 다가온 운학은 아무런 말 없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 청곡의 손에 잡혀 있는 운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를 저에게 주시면 조금 덜 힘드실 것 같습니다.”
“그리하는 게 좋겠구나. 운호야, 사형의 등에 업히거라.”
“아니에요. 걸을 수 있어요.”
“네 사형의 무공이 깊으니 등에 업히면 편하게 갈 수 있을 게다.”
“저는 사부님과 함께 걷는 게 좋아요.”
“이런, 쯧쯧. 사부 말을 들으래도.”
“…….”
청곡이 혀를 찼음에도 운호는 아무 말 없이 사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엔 헤어짐을 싫어하는 고집이 담겨 있었다.
“그냥 천천히 걸어가시지요. 먼 거리도 아니니 사제 말처럼 걸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운호를 바라보는 운학의 얼굴에 훈훈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부를 먼저 생각하는 제자의 마음.
자신도 어린 시절 그러했다.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사부님.
그분이 힘든 것을 보면서 자신이 편해진다는 것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으니 운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운학은 두 사제의 말다툼을 말리지 않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말린다고 해결될 대화 내용이 아니었다.
서로를 사랑해서 달리 주장하는 말이 어느 게 맞고 어느 게 틀리겠는가.
오직 거기에는 곱고 고운 따뜻함만이 있을 뿐이다.
점창.
구대문파 중의 하나로서 칠백 년의 역사를 지닌, 명문 중의 명문이다.
현재에 들어 무림을 장악한 문파들은 점창의 역사를 폄하하느라 개파의 시기를 이백여 년 전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도도한 점창의 역사는 오랜 시간 동안 장구하게 흘러왔다.
점창의 특징은 다른 구대문파와는 다르게 불교나 도교에 완전히 예속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불교에서 태동했고, 도교의 무공과 실전적인 무예로 이동해 간 경우이다.
그중 점창을 상징하는 사일검법은 점창의 기풍을 극명하게 알려주는 실전검법으로 천하일절이다.
무림에서 실전검법이 천하일절로까지 불린 이유는 사일검법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점창에서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점창의 칠백 년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무인들의 혼이 사일검법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에 실전검법임에도 불구하고 천하일절로 불릴 만큼 강력한 위력을 담고 있다.
점창의 초인들은 각자의 능력에 맞추어 사일검법에 자신의 검을 담음으로써 수많은 초식이 태어났다 사라져 갔다.
만류귀종이라고 했던가.
현재 사일검법을 이루는 일곱 초식은, 오백 년 전 당대 천하제일인이었던 십팔대장문인 태청자가 그때까지의 이론과 선조들이 구성한 초식을 집대성해서 뼈대를 만든 것이다. 그 후 삼백 년 동안 수많은 점창의 무인이 혼을 담아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아홉 초식으로 완성되었다.
특히 여덟 번째 초식인 분광천하와 아홉 번째 초식인 회풍무류는 무림 역사상 가장 강한 무인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검제 무진자가, 임종을 앞두고 자신이 평생 얻은 심득을 집대성해 만들었다고 알려진 무적의 검공이었다.
그러나 사일검법이 완성된 후 극에 달하도록 익힌 무인은 단 한 명에 불과했다.
백 년 전 점창을 무림의 태두로 만들며 천하제일인으로 우뚝 섰던 만천자가 바로 그다.
태양을 베어버린 검.
대막과 사천, 청해, 운남을 장악한 후 거침없이 중원으로 진격하던 천왕성주 요광의 앞을 가로막은 채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베어버린 전설은 무림오대사건 중 하나로 생생히 기억될 정도다.
그 당시 천왕성의 전력은 가히 폭풍과 같아 무림은 바람 앞의 등불과 다름없었다.
수많은 문파가 소멸되었고, 수많은 무인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결국 소림을 중심으로 연합군이 구성될 즈음, 천왕성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점창이 홀로 일어나 그를 가로막았다.
중원으로 들어서는 운남의 길목을 지킨 삼백의 점창 무인.
그들의 위용은 비록 오천에 달하는 천왕성의 압도적인 병력에 의해 결국 소멸되고 말았지만 거의 칠 할에 달하는 적을 주살했고, 만천자는 성주인 요광의 두 다리를 자름으로써 천왕성의 야욕을 꺾어버렸다.
천하인은 그 사건이 있은 후 무림을 구한 점창에게 황금패를 만들어 바침으로써 무림의 태두가 점창임을 공공연하게 인정했다.
하나, 영광 뒤에 남은 상처는 커도 너무 컸다.
천왕성주 요광과의 전투에서 얻은 내상으로 만천자가 불과 삼 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주력 무인 대부분이 유명을 달리한 점창은 그때부터 줄곧 세력이 축소되어 현재는 구대문파의 말석에서 간신히 이름만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상청궁.
뿌리가 도교는 아니나 도교에 적을 두었으니 점창의 중심에는 원시천존을 모신 상청궁이 떡하니 지어져 있었다.
건물을 모두 합쳐 봐야 스무 채가 되지 않았고 상청궁을 제외한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있었는데 그 규모가 상청궁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운학이 앞장서서 상청궁으로 들어설 때 시끌벅적한 소리가 문을 통해 마당으로 흘러나왔다.
누구 한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여러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떠들고 있었기 때문에 몇 사람이 말하는지 헛갈릴 정도였다.
운학이 입맛을 다시는 청곡을 확인한 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사문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으니 당황스럽기도 하련만 청곡 사백은 그저 입맛만 다시고 있다.
눈치를 보니 청곡 사백이 점창에 있을 때부터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음이 분명했다.
“제자 운학이옵니다!”
“나중에 와! 장로회의 때는 오지 말라고 했잖아, 이놈아!”
“급한 일입니다.”
“허어, 그놈. 나중에 오라니까!”
운학이 물러서지 않고 재차 말을 하자 문이 왈칵 열리며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고함을 쳤다.
나타난 노인은 앙상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는데, 고함을 치면서도 마당에 서 있는 사람들을 매섭게 훑어보는 걸 잊지 않았다.
장로회의가 있는 날에는 그 누구도 상청궁에 접근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데 운학이 찾아왔다는 것은 그만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몸을 일으키지 않은 상태에서 눈을 부라리던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청마루로 나선 것은 청곡과 시선이 마주친 후였다.
“청곡… 사… 형?”
“청면, 반가우이.”
“아이고, 사형!”
청면자가 맨발로 마당을 향해 뛰어내렸다.
그는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청곡자를 안은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밖에서의 소란은 안에서 벌어지던 말싸움을 그치게 만들었고, 곧이어 말소리의 주인들을 나타나게 만들었다.
마루에 모습을 드러낸 노인은 모두 일곱.
모두 머리가 하얗게 세었고 허리마저 구부정할 정도로 나이가 든 노인이었다.
마루에 나타난 노인 중 넷이 청면자가 안고 있는 청곡을 확인한 후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그들 또한 청면자처럼 반가움으로 인해 눈물을 보이며 그의 손을 놓지 못했는데, 모두 격정에 겨워 제대로 말조차 잇지 못했다.
그러나 나머지 세 노인은 꽃꽂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중간에 선 노인은 마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감격적인 해후를 더 이상 지켜보기 싫다는 듯 커다랗게 고함을 쳐서 소란을 잠재워 버렸다.
“청곡, 여기엔 뭐하러 왔느냐!”
“사형…….”
“내가 어찌 네 사형이란 말이냐? 맘대로 떠난 게 벌써 삼십 년 전이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라!”
“사형, 보고 싶었소.”
“흥, 입에 발린 소리 하지 마라!”
“내가 어찌 사형을 잊을 수 있겠소. 밤마다 자리에 누우면… 사형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에 미칠 듯 괴로웠소.”
“점창은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청허 사형, 노여움을 풀어주시오. 사형이 아니면 누가 나를 반겨준단 말이오. 이제 소제는 병들고 늙어 갈 곳이 없소.”
“미친놈!”
이를 악다문 청허자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제.
시들어가는 점창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자신을 대신해 점창의 미래를 이끌어갈 대들보였다.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뤄주기 위해 노력했고, 그의 무력이 한 단계씩 높아질 때마다 자신의 일인 양 기뻐했다.
그런 사제가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지 못하고 폐인이 되었을 때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무너져 가는 사문.
그 사문의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청자배 대사형 청허는 숨이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껴야 했다.
그런 청곡이 삼십 년 만에 불구의 몸이 되어 자신의 앞에 나타나 있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옆에서 차마 마당으로 내려서지 못하고 울고 있는 사제들은 청문과 청현이었다.
청곡과 가장 커다란 인연을 가진 사람들.
아들과도 같았던 청현.
비록 사제의 신분이었으나 청현은 청곡을 아버지처럼 따르며 남다른 정을 보였다.
청곡이 떠난 후 매일같이 헤어졌던 곳을 찾은 것은 그만큼 그에 대한 그리움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인물 청문.
청현이 가족의 정으로 그리워했다면 청문은 우상을 잃어버렸다는 괴로움에 시달렸다.
현재 점창 최고수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청문은 어릴 적 청곡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따라 할 정도로 그를 우상으로 삼았는데, 청곡이 떠난 후 한동안 수련을 멈출 정도로 방황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런 사람들이니 청곡을 바라보는 감정이 어찌 단순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