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50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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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50화 (완결)
249화. 전쟁, 그 후의 십 년
화르륵.
발갛게 달구어진 숯불에 담긴 마름모꼴의 쇠붙이가 겸쇠에 잡혀 밖으로 빠져나온다.
땅! 땅!
이내 거친 망치질이 이어지고.
치이익!
차가운 물에 담겨 허연 김을 뿜어내었다.
“…….”
창극을 든 서른 정도 되었을 법한 사내의 구릿빛으로 빛나는 피부가 땀의 윤기로 번쩍였다.
“…….”
투박한 근육질의 사내는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손에 잡은 창날을 이리저리 돌리며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잘되었군요.”
옆에서 돕던 나이 든 대장장이의 주름진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예.”
사내 역시 같은 얼굴로 마주 보며 웃었다.
“소가주께서 좋아하시겠습니다, 가주님.”
“흠, 글쎄요.”
만족스러웠던 사내의 표정이 근엄하게 변했다.
“헛헛, 또 그런 표정이십니까?”
“아…….”
“제가 보기에는 누구보다 잘하고 계십니다.”
“그…… 핫핫. 맘처럼 잘 안 됩니다.”
노인의 웃음에 사내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어 대었다.
사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창극을 노인에게 내미는 그때.
월문복을 입은 날카로운 기도의 무인이 대장간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추었다.
“가주님.”
“아, 왔는가?”
“예.”
무인은 공손하게 두 손에 든 월문장삼을 건네었다.
“련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형님께서 벌써 오셨는가?”
“예.”
“알겠네.”
사내의 표정에 모처럼 반가움이 어렸다.
“공 노사님.”
“예, 가주님.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예. 부탁드립니다.”
사내는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정리하고 무인으로부터 받은 월문장삼을 걸쳐 입었다.
패월(覇月). 으뜸가는 달.
옥빛 월문 장삼의 가슴 어귀에 검은 수실로 쓰여진 두 글자.
황보세가, 악가, 팽가, 서문세가와 더불어 중원 오대세가에 소속되어 있고, 이제는 모든 이들이 중원제일가라 부르는 그곳.
사천 패월진가.
서른 남짓의 사내는 그 진가의 가주인 진소강이었다.
마천에 의한 혈겁이 끝난 지 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마천의 잔당이 여전히 곳곳에 숨어 있었지만, 무림은 과거의 기억을 씻어 내고 안정화되었다.
정사 연합은 정해진 수순처럼 다시 사도련과 정천맹으로 갈라졌다. 그것이 반복되어 온 무림의 역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반으로 갈라진 무림 중 유일하게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고 중립에 남은 곳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사천.
패월진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자의 영역으로 나누어졌으나 정사의 그 누구도 사천에 해악한 마음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다.
소강이 간양을 떠나 돌아오는 사이 또 다른 행렬이 진가에 도착했다.
황색 무복을 입은 사내.
눈 사이가 당겨져서 시선이 닿는 누군가를 째려보며 슬쩍 비웃는 듯한 표정을 가진 황보인이었다.
“모두 여기들…….”
진가의 대전각 앞에 미리 도착해 인사를 나누고 있는 이들.
화산의 장로에 오른 옥명자.
머리를 깎고 아미의 장문인이 된 승혜, 아니 대현신니.
악가의 가주 악이군과 서문 가주 서문중걸 등.
모두가 현 무림을 이끌어 가는 주축이었다.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갔던 황보인은 현 정천맹 군사 제갈상아와 사도련의 군사 우진혜 사이에서 한 인물을 발견하고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혀, 혁련 련주!’
뒷짐을 지고 있는 혁련휘를 발견한 황보인이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고 뒷걸음질 쳤다.
-야, 따, 딴데로…….
황보인이 기겁한 표정으로 수하들에게 전음을 보내고 살금살금 물러나려다가 고개를 돌린 혁련휘와 눈이 마주쳤다.
“황보 가주님 아니시오.”
“아, 려, 련주님.”
황보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혁련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호오? 째려……? 비웃어? 이제는 보고 인사도 나누지 않을 셈인 모양이요?”
“아, 그, 그게…….”
황보인을 발견한 혁련휘가 뒷짐을 풀며 이죽거렸다.
“하긴, 그럴 만도 하던데?”
“아, 련주님, 그게 아니라…….”
황보인은 점점 더 당황스러워하며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했다.
“그게 아니긴. 근래 황보가가 단강구까지 영역을 넓히신 모양입니다?”
호남성 북방 동정호 일대를 기반으로 한 황보세가가 그럴 리 없었다.
단강구는 호북성에서도 북쪽 끝이었다.
남쪽으로는 무당과 제갈이 북쪽으로는 사도련의 영역이었다.
혁련휘는 불과 두 달 전에 있었던 일을 비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오해 마십시오. 제가 어찌 감히…….”
“어찌 감히? 아니던데? 아주 맘먹었던데?”
“그, 그게…….”
“황보 가주께서 단강구 이북이 우리 뇌령도문의 영역인지 몰랐을 리도 없고…… 허참…….”
“…….”
“그래도 직접 나서신 덕분에 죽은 이는 없더이다. 제일 많이 다친 이가 한 팔 개월 정양하면 된다던가?”
“아이고, 련주님. 제발…….”
황보인은 뒤에 수하들이 있음에도 안절부절못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이제는 능숙해지셨던데요? 권왕의 천왕와류권(天王渦流拳).”
“…….”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혁련휘를 만날 것을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두 달 전.
단강구에 자리 잡은 황보세가의 방계 중 하나가 뇌령도문 예하의 세력과 사소한 이권 다툼이 있었다.
혁련휘와 뇌령도문의 친밀한 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황보인이었기에 직접 협상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협상 과정에서 싸움이 나게 되었고, 황보인이 직접 나서게 되었다.
이미 정천의 한 중심으로 성장해 권왕이라 불리는 황보인이 질 리는 없었다.
문제는 황보인에게 맞은 자가 하필 전대 뇌령도문의 문주 섬뢰의 다섯째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놈은 제게 동생이나 다름없는 놈인데…….”
“…….”
혁련휘의 이죽거림에 황보인은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권왕 황보인의 천왕와류권.
그 시초는 다름 아닌 혁련휘였다.
혁련휘에게 배운 덕분에 창안되었고, 그에게 배운 덕분에 지금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련주님, 사소한 오해였습니다. 화를 푸시지요.”
“사소하다? 핫핫. 하긴, 정사연합이 끝난 지도 십 년은 지났고, 사소한 영역 다툼이야 그사이에도 비일비재했으니.”
혁련휘의 말에 황보인은 쉴 새 없이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내었다.
“아, 그게 아니라…….”
황보인이 도움을 청하듯이 주변을 바라보았지만, 모두가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걱정 마시오. 내 오늘처럼 좋은 날 분란이야 일으키겠소. 그리고, 패월의 가문에서 그래서는 안 되지. 암.”
혁련휘가 턱 언저리를 쓸며 말했다.
“이보게, 군사.”
“예. 련주님.”
혁련휘의 부름에 우진혜가 살포시 웃으며 답했다.
“동정호 인근에 하오문의 영역을 좀 넓혀야 하지 않나?”
“이를 말입니까? 안 그래도 황보가의 통제가 하도 심하다는 연락이 수도 없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호오? 그래? 잘됐구만. 이번에 돌아가면 동정호 쪽에 좀 더 힘을 실어 주도록 하지. 내가 직접 나서면 정천과의 마찰이 될 테니 군사가 좀 신경을 쓰지. 황보가와 사소한 영역 다툼 좀 할 수 있게 말이야.”
“예. 하오문에 총력을 다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우진혜의 말에 황보인의 낯빛이 시커멓게 변했다.
“아니, 우 군사까지 왜 이러시오?”
“호홋, 왜라니요. 련주의 명이 내려졌으니 따르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지만 황보인에게는 도무지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제갈 군사님, 그리해도 되겠지요?”
우진혜가 제갈상아에게 묻자.
“정천에서 나설 이유가 없네요. 하오문과 황보세가의 사소한 영역 다툼이니…… 대신 큰 피해만 나지 않게 부탁드립니다.”
“이를 말씀을요.”
제갈상아가 발을 빼듯이 말하자 황보인은 하늘이 노래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헛헛헛, 다, 다들 농담도 잘하십니다. 그나저나 이 친구는 왜 이리 안 오는 건지…… 이 중요한 행사의 주관자가 미리 준비를 하지 않고! 내 당장 찾아와야겠습니다!”
황보인이 말을 돌리려 하는데 뒤에서 건장한 사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핫핫핫, 소제를 찾으시는 것을 보니 황보 형님께서 난감하긴 하신 모양입니다.”
웃음소리와 함께 등장한 것은 진소강이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가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왔다.
“어서 오게.”
“오랜만입니다. 형님.”
소강과 혁련휘가 인사를 나누고 그 뒤를 이어 모두를 향해 공손히 포권을 했다.
“소강, 련주님 좀 말려주게.”
“예? 제가 어찌…….”
“그 무슨 섭섭한 소리인가? 자네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으시지 않는가?”
황보인이 울상을 지으며 말하자 소강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형님, 잊으셨습니까? 우리 진가가 정사의 일에 참여치 않기로 한 것이 십 년이 지났습니다.”
“어허, 이 사람! 오대세가의 일원으로 어찌 황보가의 어려움을 몰라라 하는가? 자네 형님께서 음마로부터 지켜주신 황보가라는 것을 벌써 잊은 겐가?”
황보인이 소강의 소매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 모습에 모두가 웃었고, 혁련휘가 슬쩍 다가와 말했다.
“호오? 오대세가를 들먹였단 말이지? 나도 나서도 된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
은근한 어조에 혁련휘가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핫핫, 자, 혁련 형님께서도 그만 놀리시고 들어가시지요. 제가 이번에 귀한 서호 용정을 구해두었습니다.”
“오, 그래?”
소강의 말에 혁련휘가 반색을 했다.
“자, 다들 들어가시지요.”
소강의 인도에 따라 밖에 있던 이들이 줄지어 대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진가의 가주전 패월각.
원래 진가의 가주전을 증축해 만든 그곳은 중원제일가라는 명성에 걸맞도록 백여 명의 사람들이 넉넉히 앉아 연회를 할 정도로 거대했다.
상석에 단을 두어 가주의 의자가 있었고 그 아래로 아름드리 기둥이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그나저나 대족장께서 늦으시는군.”
혁련휘의 말에 소강이 빙긋이 웃었다.
“내일쯤 도착하신다 하였습니다. 아마 태존 어른과 검후께서 도착하실 시간과 비슷할 듯합니다.”
“암, 그리해야지. 내일이 어떤 날인데…….”
혁련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십 년 전 마천혈겁 이후 태어난 소강의 아홉 살 아들 진무린이 소가주에 임명되는 날이었다.
중원제일가문이라 불리는 패월 진가의 이름답게 중원 각지에서 축하 사절이 찾아왔고, 선물을 실은 수레가 줄을 이어 도착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무린이가 제법 똘똘하다지?”
“팔괘공은 물론이고 벌써 은형섬전보를 반이나 익혔다고 하더군요.”
혁련휘의 물음에 옥명자가 소강을 대신해서 대답했다.
소강은 엄하기도 했고 자식 자랑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헛헛. 대단하구만. 고작 아홉 살이거늘…….”
혁련휘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련주님의 제자도 제법 뛰어나다 들었습니다. 근래에 성취가 대단하다지요?”
“성취는 무슨. 무린에 비하면 한참 멀었소. 벌써 삼 년이 지났는데 아직 일초식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으니…… 얼른 성취를 보여야 무린이와 비무라도 해보게 할 터인데…….”
혁련휘가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가, 가주님!”
문이 벌컥 열리고 외팔이 무인 초사가 뛰어들어 왔다.
“아, 초사부님.”
그는 마천혈겁 이후 비마대원들과 함께 진가에 의탁해 진무린의 무사부 중 한 사람이 된 초사였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게…….”
초사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가주님께서…….”
“예?”
소강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이런 게….”
“…….”
초사가 내민 서신을 활짝 펼친 소강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소자, 세상을 떠돌며 자유롭게 살겠습니다. 소가주는 동생인 무진에게…….
“니, 이런 망할 놈이!”
수차례 소가주가 되기 싫다며 떼를 쓰던 패월진가의 큰아들 진무린이 가출을 감행한 것이다.
고작 아홉 살의 나이에…….
“잡아 와…….”
“…….”
“당장 잡아 오란 말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소강의 외침이 진가의 대전각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리고 그의 뒤 벽에는 녹이 잔뜩 슨 검 하나와 넝마가 된 피풍의가 걸려 있었다.
- ≪패월진천≫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