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41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41화
240화. 죽음의 문이 열리다
전장을 가로막은 등.
그저 서 있을 뿐인데 산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휘야.”
“…….”
“마지막 가르침이다.”
마지막, 스승의 말이 아릿하게 가슴을 짓눌렀다.
스승은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모든 것을 활짝 연 채 자신의 앞을 막아섰다.
강대한 힘을 가진 무인에게 찾아오는 산공(散功)의 때.
산공의 때를 맞이한다는 것은 인간의 몸으로서 더이상 쌓을 수 없을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강에서 전해지는 등선(登仙).
흔히 깨달음이라 표현하지만, 그 또한 산공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현세에 가진 육신마저 녹여 버리고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산공이자 등선이었다.
혁련휘는 스승이 연 것이 죽음의 문임을 알고 있었다.
슬픔이 찾아온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심장이 쪼개지는 듯이 아파왔다.
“사부님…….”
“슬퍼 말거라. 전장은 무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무덤이 아니더냐.”
“…….”
“나는 이곳을 나의 무덤으로 택하였을 뿐이다.”
무황은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크아아!”
밀려났던 구자겸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손톱을 세워온다.
손톱에 어린 검은 마기가 세상을 발기발기 찢어 놓을 것처럼 강맹하고 날카로웠다.
이지를 잃은 그는 더이상 마천을 이끌었던 역천대공이 아니라 한 마리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파하학!
짓이기듯 휘어진 열 개의 손톱이 무황을 향해 뻗어졌다.
“휘야, 너는 너무나 무르다.”
“…….”
구자겸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무황은 여유롭게 말을 이어갔다.
“당장은 누군가를 살리고자 하겠지. 하나 몇몇을 살리기 위한 마음이 때로 패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
“마음을 굳게 먹어라. 냉정해지고 차분해져야만 한다. 그리되면 소청과 너와의 간격은 더욱 좁혀질 것이다.”
무황은 혁련휘가 소청에 비해 모자람을 알고 있었다.
“내공의 고하가, 항상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
무황은 구자겸과의 승부를 통해 혁련휘에게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혁련휘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펼칠 수 있고 그 원류에 도달할 수 있었다.
“파천도법은 그다지 강한 무공이 아니다. 문제는 어찌 사용하는 가이다.”
무황은 구자겸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구자겸의 손톱이 만들어 낸 칼바람 속에 있으면서도 뒷짐을 진 채 여유로웠다.
그는 가르침을 내리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후계자에게 마지막 몸짓으로 그가 부족한 점들을 일깨워 주었다.
산악을 허물고 대지를 뒤집어 놓는 강맹한 기운이 아닌 가장 효과적이고 단순한 동작만으로 구자겸을 상대했다.
“낚시꾼이 바늘에 꿰인 물고기를 상대할 때는 힘겨루기를 하는 법이 없다.”
“…….”
“그저 놈이 지칠 때까지 팽팽함을 유지한 채 기다리다가 단 한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당겨야 하는 법이다.”
쩍!
가볍게 내지른 팔이 구자겸의 손톱이 만들어 낸 칼바람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순간의 틈.
아주 쉬운 말이지만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만한 경험이 있어야 했고 자신감이 있어야 했으며 일격에 상대를 무력화 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만 했다.
턱!
구자겸의 머리에 닿은 손이 가볍게 떨어졌다가 재차 밀어졌다.
구자겸이 멈췄다.
지금까지 발광하듯이 마기를 뿌려대던 그의 몸이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일격을 넣을 때는 절대 주저하지 말아라. 상대를 완전히 죽일 힘으로 짓눌러라.”
우두둑! 콰아앙!
뼈 부러지는 소리.
구자겸의 머리가 함몰되기 시작했다.
가볍게 내지른 무황의 힘에 짓눌린 머리가 몸속으로 깊숙이 박히고 척추가 으스러졌다.
그리고 구자겸의 몸은 그대로 땅바닥에 박혀 버렸다.
“아!”
혁련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무황의 일격.
힘을 축으로 모으고 그의 몸에 닿는 순간 신으로 증폭시켰다.
소청, 소강처럼 관조의 단계를 넘어선 혁련휘의 눈에 내기의 흐름과 전달 과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폭발하는 것만 같았다.
구자겸의 머리에 대어졌던 손을 통해 빠져나온 힘이 일순간 거대해져서 그를 짓눌러 버렸다.
“보았느냐?”
“예.”
“소청이 강한 것이 무수히 이어진 기연 때문이라 생각하느냐?”
“…….”
“아니다. 기연에만 의존해 강해질 수 있다면 나는 네게 세상에 알려진 모든 것을 얻어 주었을 것이다.”
“…….”
“그 아이가 강한 것은 강해지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
“그 의지가 기연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만들었기에 강해진 것이다.”
“…….”
“소청은 친구이되, 너와 가장 가까운 숙적이니라.”
혁련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느냐? 너는 그 아이보다 강해지기를 원하지만, 그 아이는 마종을 죽이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
애초에 목표가 다른 것이다.
꿈이 크니 노력이 다르다.
죽이고자 하는 상대가 다르니 의지가 다르고 열망이 다르다.
“만약 네가 나를 꺾고자 했다면 이미 그 아이보다 훨씬 강해졌을 것이다.”
“…….”
“휘야.”
“예.”
“그동안 잘 따라와 주었다.”
무황이 고개를 돌려 혁련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만들어진 너무도 환한 미소가 가슴을 쓰라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호위하고 있던 혈랑대의 틈새를 뚫고 마천의 무인들이 검을 뻗어왔다.
“죽어라!”
살육에 미쳐 벌겋게 변한 눈으로 무황을 공격했다.
턱!
하지만 뻗어진 검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움켜쥔 손.
혁련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황이 검을 잡았다.
“만중, 물러나라.”
무황의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혈랑대의 무인들이 곧바로 뒤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무황이 천천히 몸을 돌려 마천의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잡스러운 것들…….”
자신을 향해 검을 뻗었던 마천의 무인을 내던져 버린 무황이 가볍게 일보를 내디뎠다.
꾸우우…….
또다시 혁련휘의 눈에 보인 힘의 흐름.
이전과 다르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무황의 기세가 순식간에 거대화되었다.
그리고 거칠게 지면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짓눌린 대지가 비명을 질렀다.
드드드드.
무황의 힘에 짓눌린 대지가 참지 못한 대지가 균열을 만들자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거대한 명산평이 통째로 뒤흔들렸다.
콰드드득!
무황의 발에서 시작된 균열은 뒤틀림을 만들고 부챗살 모양으로 퍼져 나가며 지면을 폭발시켰다.
콰아아앙!
전장의 전면이 통째로 날아갔다.
모든 것이 멈췄다.
일순간의 정적이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찾아왔다.
마천의 무인들도, 중원의 무인들도…….
마치 시간이 정지해 버린 것처럼 멈춰서 신이 만들어 낸 광경에 주목했다.
만인지적.
중원 최강의 무인.
무황 위도혁.
그의 앞에는 그 무엇도 남아 있지 못했다. 거대한 지진이 덮친 것처럼 대지는 뒤틀어졌고, 힘의 여파에 있던 마천의 무인들은 학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무황의 등을 감싸고 있는 피풍의가 바람에 날렸다.
앞발을 가볍게 내밀고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그의 모습은 현세에 강림한 천신(天神)처럼 보였다.
구자겸을 죽이고 단 일보를 내딛는 것만으로 전장을 가득하게 메웠던 비명과 피 냄새를 말끔하게 지워 버렸다.
마치 그는 홀로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그 어떤 이도 범접하지 못할 것만 같은 절대적인 위압감에 명산평을 가득 채운 무인들은 입조차 떼지 못했다.
“물러나라.”
나지막하지만 힘이 담긴 목소리가 전장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중원의 무인들이 썰물처럼 뒤로 물러났고, 마천은 그들을 뒤쫓지 못했다.
무황의 기세에 눌러 거대한 횡진이 멈춰 버린 것이다.
전장에 진한 정적이 감돌았다.
짝, 짝, 짝…….
무황이 만들어 낸 정적 속으로 부딪힌 손바닥 소리가 파고든다.
대해가 갈라지듯이 반으로 나누어진 마천의 무인들 사이로 사두마차와 함께 호위하듯 열을 지은 열두 명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마차의 상단에 여유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인물.
마종 종리세.
모든 혼란의 원흉이자 마도를 이끄는 자.
마차는 무황의 십여 장 앞에서 멈췄다.
“오랜만이요.”
종리세가 무황을 향해 인사를 건네왔다.
무황은 그런 종리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무황의 뒤로 세주들과 싸우던 소강과 별동대, 검후와 혁련휘를 위시한 사도삼위가 다가와 뒤를 지켰다.
“이런, 이런……. 그나마 없던 세주들이 셋이나 죽었는가?”
종리세는 무황의 등장으로 전쟁이 멈춰 버리고 돌아온 세주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강에 의해 요마가 죽었고, 그 뒤를 이어 괴마의 사지가 분리되었다.
살아남은 것은 수마와 파군뿐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과할 정도로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쯧, 쓸모없는 것들.”
혀를 차는 종리세의 모습을 무황이 가만히 응시했다.
평범해졌다.
아무것도 익히지 않은 것처럼, 아무런 힘도 없는 것처럼 너무도 평범해 보였다.
“나름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인데…….”
종리세는 땅바닥에 박혀 버린 구자겸을 보며 혀를 찼다.
그의 눈빛에는 사형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분노가 아닌 아쉬움이 서려 있었다.
“귀하의 한 걸음조차 막지 못했나 보군.”
“…….”
종리세의 이죽거림에 무황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비범함은 평범함 속에 숨는 법이라 했다.
그런데 지금의 종리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그 정도로 표현될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지만 무황만큼은 보고 있었다.
종리세의 몸 주위로 뿜어지는 엄청난 양의 마기가 대기의 흐름마저 바꾸어 놓고 있었다.
무황이 바라보는 종리세는 마치 현신한 악마 같았다.
겉으로는 차분하고 안정되어 있는 듯했으나 그의 몸속에 잠재되어 있는 거대한 힘이 지옥의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음이 명확히 보였다.
“대단하군. 십 년이라는 세월이 네게 그와 같은 힘을 준 것인가?”
한참 만에 무황의 입이 떼어졌다.
“세월이 주었다고? 아니, 스스로 얻었다 해야겠지.”
“얻었다라…….”
받은 것과 얻은 것의 차이.
“그렇군. 십 년 전 나를 찾아왔던 것은 스스로의 경지를 가늠하기 위함이었는가?”
“…….”
무황의 여유로운 표정에 종리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떤가? 제대로 가늠한 것 같은가?”
“뭐?”
“십 년 전 네가 가진 힘은 실로 보잘것없었다.”
“…….”
“그때의 네가 나를 가늠할 수 있었느냐 묻는 것이다.”
무황이 그러하듯 종리세 역시 무황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을 느끼고 있었다.
강하다.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강한 기운이 무황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떠냐 다시 한번 가늠해 볼 테냐?”
하지만 분명 넘어섰다.
무황의 경지가 눈에 선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인가?
종리세는 한참을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군. 살리고 나면 무슨 대책이라도 있는 것인가?”
“…….”
“좋다. 어차피 죽을 놈들이니 묻힐 곳이 어디인들 상관없겠지. 원하는 대로 해주마.”
무황은 종리세가 자신이 말한 의미를 정확하게 읽고 있자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휘야.”
“예. 스승님.”
-소청 그 아이가 깨어났다면 모르되 깨어나지 못했다면 일단 물러나야 한다.
전음? 어째서 전음인가?
설마 스승이 자신하지 못하는 것인가?
혁련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물러나 기회를 엿보거라.
무황의 시선이 혁련휘를 지나 소강과 별동대, 검후와 섬뢰, 혜어화에게 닿았다.
그들은 상처를 입고 지쳤다.
무황의 옆을 지키는 열두 명의 무인.
결코 마천의 세주들에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현재의 전력으로는 중원은 필히 패배할 것이다.
전열을 가다듬고 소청이 깨어나고 휘가 각성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걸 위해서는 중원의 무인들이 마종에게서 도망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어야만 했다.
“만중!”
“예. 주군!”
“지금부터 사도련주는 혁련휘다! 정사의 무인들은 전장에서 모두 물러나라!”
사자후와 같은 거대한 외침과 함께 무황의 신형이 거대한 기세를 머금고 마종을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