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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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36화
235화. 마천, 진격하다
우웅, 우우웅!
거대한 떨림이 방 안을 너머 소진각 전체를 울려놓았다.
“저, 저!”
잘게 진동해 오는 떨림에 놀랐던 섭약란은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일들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손가락질했다.
가만히 누워 있던 소청의 몸이 덮고 있던 이불과 함께 떠오르고 있었다.
“사, 상공. 이, 이게?”
무공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섭약란이 당황스러워하며 진가신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영문 모를 표정을 하고 있다가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무황의 말.
소청의 몸 안에 자리 잡은 세 가지 기운.
짐조의 화기와 태청신단의 한기가 맹렬하게 싸우고 대환단의 기운이 그들을 뭉쳐 놓으려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필시 기연의 조짐이었다.
“서, 서둘러 나갑시다.”
“예?”
“소청이 무언가를 이루어 내려는 모양입니다.”
“……?”
“내 설명해 줄 터이니 일단은 밖으로 나갑시다.”
진가신이 섭약란을 재촉하며 몸을 잡아끌었지만, 그녀는 못내 불안한지 몇 번이고 뒤돌아보다 방을 나갔다.
우우웅!
그사이 소청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묘한 진동은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쿠르릉!
막아두었던 강둑을 터트리고 달려가는 강물처럼 단중의 화기가 스스로 일어나 백회를 향해 움직이자 귓가에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아!’
소청은 그 움직임을 너무도 선명하게 느꼈다.
본시 기운은 심장의 피가 동맥을 통해 흘러 정맥을 따라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전에서 나와 다시 단전으로 돌아가는 법이다.
단전에서 회음으로 이어져 등줄기를 타고 백회에 올랐다가 다시 단중을 흘러 단전으로 돌아오는 것을 순행(順行)이라 한다.
팔괘공 또한 마찬가지였다.
호흡을 통해 들어온 기를 단전에 쌓고 회음을 지난 기운이 명문의 한기를 따라 백회에 오르며 차가워졌다가 백회에서 떨어진 기운이 단중의 화기와 만나 단전으로 돌아와 쌓인다.
이른바 운기의 기본인 수승화강(水昇火降)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순행이 아닌 역행.
위에서 아래로 흘러야 마땅할 이치를 거스르고 가슴 중앙에 있던 단중의 기운이 거꾸로 치고 오르고 백회는 팔을 벌려 그를 맞아들였다.
원래의 길을 거스르고 있으니 혈맥이 정상일 리 없었다. 이미 겪어 본 적 있는 익숙한 느낌이지만 그 통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소청은 불이 지져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지만,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묘하다.
한 곳이 아니라 두 곳에서 일어나는 움직임.
백회를 향해 거친 열기가 몰려가는 사이 명문의 한기마저 역행하기 시작했다.
츠츠츠.
명문혈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새하얀 한기가 배어 나왔고, 기운이 회음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으으, 이건 뭐…….’
소청이 할 일은 없었다.
주객이 바뀌어 버린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두 개의 기운이 스스로 날뛰고 있었다.
그동안 단중의 화기와 명문의 한기를 지속해서 사용해 온 소청이었다.
그에게 이어진 기억 속에서 들었던 음양합일(陰陽合一).
기운이 스스로 움직여 뭉쳐지고 있다.
스르륵.
소청의 몸에서 이불이 벗겨져 나갔다.
그리고 소청의 몸이 허공에서 회전하더니 마치 보이지 않는 단에 앉은 것처럼 좌정하고 있었다.
단중과 명문을 경계로 반은 뜨겁고 반은 차갑다.
음과 양이 명확한 경계를 나누며 소청의 몸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허!”
“상공, 상공!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
밖으로 나온 진가신은 방 안에서 있는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섭약란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가운 한기와 함께 얼어붙는가 싶으면 뜨거운 열기와 함께 녹아내리기를 반복했다.
뭐라도 알아야 설명을 할 것인데, 고작해야 자식의 도움으로 백대고수에 막 발을 걸치려는 진가신이었다.
그가 설명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사, 상공…….”
“아, 이게, 그러니까 저…….”
진가신은 자신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섭약란과 가문의 무인들을 보니 입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오방색을 지닌 기운이 백회에 오른다는 오기조원(五氣朝元), 머리위에 꽃이 핀다는 삼화취정(三華聚頂), 적사투관이니 천화난추니…….
이야기로 들은 적이 있지만 지금 소청에게서 보여지는 것과는 하나도 같지 않았다.
“다…… 좋은 일이야.”
“예?”
설명할 수 없으니 얼버무린 통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허, 구경만 하고 있는 겐가. 서둘러 주위를 경계하게!”
“예? 예! 가주님.”
진가에 있는 것은 그들 가문의 사람들뿐이었다.
당장에 마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외부의 위협이 없는데 굳이 경계를 둘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저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상공?”
“부인께서도 더 걱정마시오. 기연이 닿았으니 스스로 깨쳐야만 할 일이지 우리가 도울 것은 없소. 정히 걱정되시면 천지신명께…… 마음속으로나마 빌어 볼 수밖에…….”
“아!”
그 말에 섭약란이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부지런히 뛰어갔다.
분명 정화수라도 떠올 생각일 것이다.
‘흠,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변화였다.
하지만,
‘기특한 녀석…….’
지금까지 이루어 온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또 한 단계 도약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에 진가신은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 * *
“소청…….”
서천맹의 거대한 성곽 위에서 서쪽의 먼 곳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던 혁련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걱정되느냐?”
어느새 다가와 혁련휘의 옆에 뒷짐을 지고선 무황이 술병을 받아 들었다.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의 모습은 이전과 달리 훌쩍 늙어 보였다.
‘사부님…….’
그의 변화를 바라보는 혁련휘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기운이 모자라는 것이다.
소청을 위해 자신의 기를 불어넣어 준 무황이었다.
딱히 젊음을 유지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년같은 외모였다.
피부는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고 윤기가 넘쳤고, 머리칼은 새치 하나 없을 정도로 검었다.
딱히 젊음을 유지하는 주안공을 수련하지 않았음에도 은연중에 그의 몸에 자리 잡은 기운이 그리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자신도 모르게 은은히 몸을 흐르던 기운마저 악착같이 끌어모아 산공을 늦추기 위해 쓰고 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음이 느껴지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날이 찹니다, 스승님.”
“헛헛, 녀석.”
무황은 온화한 표정으로 웃었다.
“너무 걱정 말아라. 깨어날 것이다. 그 시기가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이 가까운 순간에도 무황은 되려 혁련휘를 위로했다.
차라리 스승의 몸 상태를 물었어야 했다.
‘차라리 따로 자리를 할 것을…….’
혁련휘는 스승의 온기가 남아 있는 술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풍악도 없고 여인도 없다.
산해진미도 없고 그럴듯한 술잔도 없다.
그들은 그저 서산으로 내려앉는 붉은 석양을 보며 잔도 없이 병에 담긴 술을 나누어 마셨다.
시대를 이끌어온 무황과 다시 시대를 이끌어가야 하는 혁련휘의 술자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조촐하기만 했다.
“불어오는 바람이 심상치 않구나. 그만 몸을 쉬게 하거라. 전쟁이 임박했음이니…….”
몸을 돌리는 무황의 장포를 여며주는 만중의 모습에 혁련휘가 아련한 눈빛을 보냈다.
후회가 남았다.
좀 더 그럴듯한 술자리를 만들 것을…….
* * *
다음 날,
기다려 온 전쟁은 예상치도 못하게 빨리 시작되었다.
“크아악!”
비명이 터져 나와 메아리처럼 번져나갔다.
곳곳에 피가 뿌려진다.
막아선 자는 호기로웠으나 힘이 부족했다.
분명 그들은 버젓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암습이나 기습 따위는 고려하지도 않고 긴 횡진을 이루고 당당히 관문을 넘어왔다.
사천의 서쪽 관문을 지키던 멸마대는 순식간에 전멸했다.
서천맹을 맡은 제갈상아는 흑비의 전서구를 받은 즉시 후속된 병력을 파당(巴塘)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파당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파당의 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나섰던 무인들은 이백 리 앞에 멈추고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마천에 대항하기 위해 전선을 형성했다.
“적은…….”
멀리 눈앞에서 나타난 적.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전선의 앞쪽에 몸을 숨기고 있던 무인 안충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검은 물결.
산 능선을 넘기 시작한 마천의 무인들은 순식간에 대지를 검게 물들였다.
마치 때 이른 밤이 찾아온 것처럼 눈앞에 보이는 모든 곳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길목을 선점했으나 마천의 진격에 길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발을 디딜 수 있는 모든 곳을 메우며 다가왔다.
“이럴수가…….”
안충은 막막함을 느꼈다.
어디를 막아야 한단 말인가?
하늘 아래 보이는 모두가 검은 물결인데…….
“무, 물러나야…….”
먹히게 될 것이다.
전선은 단번에 거대한 해일처럼 덮쳐오는 적의 물결에 쓸려나가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가 경고를 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는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눈앞을 막고 있었다.
“흐흐흐, 중원의 쓰레기들…….”
“……!”
스걱.
끝이 양쪽으로 찢어진 검에 묻은 피를 혀로 쓸어내리는 거대한 체구의 노인.
언제 나타났단 말인가?
분명 적의 선두가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안충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눈조차 감지 못한 그의 머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죽여라.”
안충의 머리를 잘라 버린 것은 살이 투실하게 오른 노인이었다. 그의 명령은 전선 곳곳에 피바람을 불러왔다.
소청에 의해 무너져 버린 잔마의 편살원과 더불어 마천 최강의 암습자라 불리는 요마 이옥상과 은은비림(隱隱飛林)의 무인들이었다.
“크크크, 가거라!”
수마(獸魔) 금학령의 손이 가볍게 움직이자 미쳐 버린 짐승들과 그들을 부리는 무인들이 지면을 박찼다.
“크악!”
전선의 곳곳을 향해 뚫고 들어오는 짐승들의 공격에 무인들은 제대로 된 방비조차 하지 못했다.
잔인한 이빨이 머리를 물어뜯고 날카로운 발톱이 그들의 살을 찢어 놓았다.
“이런, 이런…… 이리 찢어 놓아서야 쓸 만한 것이 없지 않나.”
짐승들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고목처럼 마른 노인과 그와 똑같은 모습을 한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너무도 말라 입은 옷이 커 보이는 노인의 소매 아래로 악귀가 새겨진 종이 흔들려 전장을 가득 채웠다.
딸랑! 딸랑!
끄그그극.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죽어가던 중원의 무인들이 괴이한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혼백을 빼앗겨 버린 듯한 눈동자로 아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뜯겨나간 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 아군을 향해 검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
그리고 파군 용유명이 마천의 검은 물결을 이끌고 전선을 강타했다.
마천의 세주들.
비록 여덟이 죽고 넷밖에 남지 않았으나, 그들의 힘은 하늘을 울리고 땅을 흔들어 놓았다.
중원 무인들이 만들었던 전선은 마치 살육에 미친 메뚜기 떼가 지나간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