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31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31화
230화. 역으로 제안해 볼까?
운과 소청은 순식간에 간양을 벗어나 반 시진에 달하는 시간을 달렸다.
운이라는 사내는 꽤나 먼 거리를 이동해 왔음에도 호흡 하나 거칠어지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은수보다 뛰어날지도…….’
적이 강한 것은 좋지 않았다.
하물며 당장에 싸워야 할지도 모를 눈앞의 적이 아닌가?
작은 개천을 단번에 뛰어넘고 숲을 만나면 나무 꼭대기를 밟고 날 듯이 이동했다.
그리고 눈앞에 드러난 산.
‘아, 아미……산?’
산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오래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소청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음마의 습격을 받아 참혹하게 무너진 아미파였다.
복호사가 불타 버린 뒤 아미파의 생존자들은 서천맹으로 이동했다. 아직 전쟁 중이었기에 적절한 터를 잡지 못했고 모두가 떠나 버린 아미산은 싸늘하고 적막했다.
운은 머뭇거리지 않고 내달려 산을 올랐다.
‘이 개자식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자는 필시 폐허 속에 있을 것이다. 처참하게 무너진 참상 속으로 자신을 초대하고 있었다.
소청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애써 삭였다.
아미산 금정봉.
정상에 오르자 멀리 산 아래 불타 무너진 복호사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무너진 아미의 상징 ‘화엄동탑’ 앞에 한 떼의 사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뒷짐을 지고 산세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 그리고 운과 똑같은 흑의를 입은 열한 명의 무인들.
그들은 자신들의 기세를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짙은 마기를 사방으로 뿌리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열두 명이나 되는 마천의 세주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것만 같았다.
“주군, 데려왔습니다.”
뒷짐 진 사내의 뒤로 다가간 운이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소청은 그의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왔다.
머리를 말아 올려 용문의 흑색 관(冠)으로 단정하게 고정한 그의 외양은 어느 곳에서나 볼 법한 그저 그런 가문의 공자 같았다.
‘종리세?’
소청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무황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가 주는 위압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마천의 정점에 있는 자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했다.
시장 통을 돌아다니다 보면 흔히 볼 수 있을 만큼 평범한 기도를 보이고 있었다.
갈무리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소청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상대에게 자신의 기도를 감춘다는 것.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해도 알 수는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나?”
“사람……이었군.”
소청의 말에 종리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피식 웃었다. 마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한 미소였다.
“삼두육비의 괴물쯤으로 생각했었나?”
“…….”
종리세가 차분한 발걸음으로 무너진 동탑의 기둥을 의자 삼아 앉았다.
“앉지. 이야기가 짧게 끝나지는 않을 듯한데.”
“뭐 좋은 사이라고…….”
상대는 여유로웠고 자신은 긴장을 하고 있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청은 툴툴거리며 종리세의 앞에 앉았다.
“한잔하겠나?”
종리세가 수하에게서 받아 든 자기병을 소청에게 내밀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청이 고개를 저었다.
“술에 뭔 짓을 했을지 모르는데 마시기가 껄끄럽군. 그리고 싫어하는 사람들과 겸상을 할 정도로 좋은 성격이 못 돼 놔서…….”
“흠, 그래? 꽤 좋은 술인데 아쉽군.”
소청이 신경을 긁어 보지만 종리세의 표정에는 어떠한 감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이 친구와는 나눌 이야기가 많다. 듣는 귀가 없었으면 좋겠군.”
“예!”
종리세의 나지막한 말에 열두 명의 수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복호사를 떠났다.
“여유만만한 놈들이군. 제 주인이 내 손에 죽을 수도 있는 일인데…….”
소청이 들으란 듯이 이죽거렸지만 종리세는 그저 웃기만 했다.
“십이마령이라 부른다네.”
“…….”
“나의 분신과 같은 자들이지.”
“분신이 많아서 좋겠군. 열두 명이나 되니 심심하진 않겠어.”
소청의 어투가 다분히 공격적이었다.
열둘.
거의 다 죽였다 생각했는데 세주들과 비슷한 힘을 가진 놈들이 열둘이나 늘어 버렸다.
더욱이 주인이 적과 함께 있음에도 머뭇거림 없는 그들의 행동이 신경 쓰였다.
자신들의 주인이 더 강하다는 자신감이었다.
소청의 실력으로는 자신들의 주인을 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폄하가 아닌 확신이었다.
‘제길…….’
그리고 그들의 자신감과 확신이 소청 스스로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승부를 자신할 수가 없었다.
뭐라도 느껴져야 해볼 만한지 알 수 있을 것인데…….
모두가 떠나 버린 복호사에는 종리세와 소청만이 남아 있었다.
“신투 막야.”
“…….”
종리세가 소청의 전생을 말했지만 놀랍지 않았다.
이미 그가 하나의 삶을 되돌아 왔음을 알고 있었다. 막야라는 이름이 그들에게 알려졌으니 당연히 알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호오? 내가 정체를 알고 있음에도 놀라지 않는가?”
“그래. 네놈도 똑같은 경험을 겪었을 테니까.”
“…….”
소청의 말에 종리세의 표정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똑같은 경험.
종리세가 이전의 생에서 돌아온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법이군. 어찌 알았나?”
“의심은 했었다. 그리고 혈승이 확신시켜 주더군.”
“혈승……. 눈치채고 있었던가?”
“그래. 알고 있었다.”
“흐흠, 역시 그냥 오래 산 인생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종리세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켜도 상관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가 돌아오던 그때 비고에 들어왔었나?”
“보물이라도 숨겨 두지 않았을까 생각했지. 그 보물이 회귀였음을 알았다면 털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청의 말에 종리세가 또다시 웃었다.
“그래, 어떻던가? 두 번째 인생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럴 리가?”
조금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
“많이 달랐을 터인데? 삼류 잡배의 인생과 무림이 추앙하는 무인의 삶이…….”
“흥, 너는 달랐던 모양이군.”
“…….”
“그냥 똑같은 인생일 뿐이다. 새로운 몸을 얻어 무공을 얻게 되었을 때는 뛸 듯이 기뻤지. 하지만 그뿐이었다. 신투의 인생 또한 나름대로 즐거웠고 더없이 자유로웠다.”
“즐겁고 자유로웠다라.”
이번에는 아련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군. 그래 본 적이 없어서…….”
“그렇겠지. 부수고 죽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을 테니.”
소청은 일부러 계속해서 그의 신경을 긁어 놓았다.
뭐라도 알아내야만 했다.
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무공을 사용하는지.
적을 모르고 상대하는 것보다는 알고 상대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니까.
만약 그가 자신이 어쩌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면 도망치면 될 일이었다.
소청은 자신의 경공을 믿고 있었다.
“후후, 맞는 말이야. 그것이 내 삶의 목적이지.”
“개 같은 목적이군.”
소청이 쏘아보았지만 종리세는 그저 술병을 입으로 가져갈 뿐이었다.
“네가 방유현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무시했다. 그런데 구 사형을 그리 만들고 혈승을 죽이고 이번에는 백 사형까지 죽였더군. 꽤나 의외였어.”
“뭐가 의외였지? 중원의 힘이 그리 약해 보였나?”
“중원? 후후,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
“그들을 막은 것은 중원이 아니라 너야.”
소청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자신을 치켜세우듯이 말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고작 신투에 불과했던 네놈이 마천에 대해 아는 것은 고작해야 세주들의 신분이나 무공의 특징뿐일 텐데 어찌 알고 막았을까?”
호기심 가득한 눈.
마치 곤충을 놓고 다리와 날개를 뜯어내 볼까 하는 아이처럼 호기심을 빛내고 있었다.
“흥, 뭘 알아내고 싶은 모양인데 내가 답을 해 줄 것 같나?”
“아, 뭔가 착각을 하는군. 너를 위협으로 생각해서 느끼는 궁금증이 아니야.”
“위협이 된다는 걸 알게 해 주어야 할 모양이군.”
후욱!
순간적으로 소청의 몸에서 막대한 양의 기가 끓어올라 종리세를 압박했다.
어우러진 태극의 힘.
단전의 모든 힘을 개방한 소청으로 인해 대기가 거칠게 떨어 대었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무더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종리세에게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마치 봄바람을 맞은 사람처럼 그저 흘려 내고 있었다.
“흥분하지 말게. 싸우기 위해 온 게 아니니…….”
“…….”
종리세의 입가에 사악함이 느껴졌고 소청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의 힘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그의 기세는 지극히 평범하고 고요했다.
소청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 더욱이 도발도 통하지 않았다.
“어떤가? 기회라는 것을 주고 싶은데…….”
“기회?”
“그래. 살아남을 기회.”
“변절을 하란 말인가?”
“이해력이 빠르군.”
“…….”
“마천으로 오게. 그리하면 자네만은 살 수 있을 것이네. 그리고 자네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을게야. 세상 누구를 죽여도 좋고 무엇이든 가져도 좋아. 나에게 대항하지만 않는다면…….”
소청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종리세를 노려보았다.
“미쳤군.”
“확신일세.”
“가능할 것 같아? 지금의 마천이? 너희가 손에 넣었던 세력 중 남아 있는 것은 마궁뿐이다. 그들의 힘만으로 결집된 중원의 힘을 넘을 수 있다 생각하나?”
“대막, 북해…… 필요한 세력이긴 했지. 하지만 그들을 무너뜨렸다고 해서 대세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다.”
“흥. 잊고 있는 모양인데, 전생에 마천 정벌에 종지부를 찍었던 사도의 전신(戰神) 혁련휘와 정천의 신산자(神算子) 제갈휘문이 버젓이 살아있다.”
“전신과 신산…… 그리운 이름들이군.”
종리세가 웃었다.
전신과 신산.
전생에 무림의 영웅이 되었던 혁련휘와 제갈휘문의 명호였다.
지금의 소청이 보기에는 이상하게도 둘 다 모자람이 있게 느껴졌지만 과거에는 함부로 얼굴조차 바라보지 못할 존재였다.
종리세 역시도 혁련휘에게 패해 죽었었다 알려졌으니까.
“한데 자네가 그들을 믿는다고? 자네는 뭔가 잘못 알고 있군. 전생의 마천 정벌 당시에 구 사형과 백 사형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들이 막을 수 있었을 것 같은가?”
“…….”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들은 그저 내분으로 약해진 마천을 무너뜨렸을 뿐이네. 강건했던 때의 마천이 아니라.”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너다. 그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또한 그때보다 더욱 단단하게 뭉쳐져 있어. 그리고 무황께서 생존해 계신다. 너도 알고 있겠지? 그분이 얼마나 강한지.”
“흠…… 그렇군. 무황이 있었지.”
종리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무황의 존재.
껄끄러울 것이 틀림없었다.
소청은 그가 지금까지 나서지 않았던 이유도 무황에게 한번 패했었기 때문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역으로 제안해 볼까?”
“…….”
“지금이라도 물러나라. 더 이상 중원을 노리지 않는다면 명은 보존해 주겠다. 무림을 설득해 마궁을 공격하는 일은 없도록 하지.”
그럴 리는 없었다.
마천에 죽어 간 이들이 수도 없이 많았기에 그들은 반드시 멸해야만 했다.
소청이 종리세에게 그리 말한 것은 일종의 도발이었다. 그의 화를 돋우어 힘을 개방하게끔 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 역시 먹히지 않았다.
종리세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일으키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타깝군. 기회를 주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