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2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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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203화
202화. 눈치 빠른 자
“동주님! 놈들이 퇴각하고 있습니다!”
치열하게 부딪치던 전투에 균열이 생겼다.
길목을 방어하던 전선의 한쪽이 무너지면서 빙마동의 괴인들이 대막혈궁을 향해 쏟아지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비록 중원 무림의 고수 몇몇이서 아군의 퇴각을 도우며 빙마동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기세가 오른 빙마동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조금만 더 가면 대막혈궁이었다.
중원에 빼앗긴 것을 빙마동이 나서서 되찾은 것이 된다.
북해의 전체 전력도 아닌 빙마동 단일 세력으로…….
‘이로써 우리 빙마동의 입지가 높아지는 것이다. 크크크, 대막혈궁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지. 더 많은 전공을 올려야 한다. 이번 전쟁을 통해 만년빙정을 되찾는 것뿐만 아니라 빙마동은 궁주 아래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서량의 두 눈에 탐욕이 끓어올랐다.
“가라! 모조리 죽여라!”
미친 듯이 치고 나가는 빙마동의 괴인들 사이에서 추련화는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투가 이어진 지 한 시진 만에 길목의 방어선을 뚫었다.
고무적인 일이었다.
전선의 상황도 안정적이었다.
다소 피해가 있긴 했지만, 적들이 보여 주는 전력이라면 대막혈궁을 차지하는 것은 문제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없다. 놈들이 없어.’
전날 자신이 보았던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전선을 빠르게 훑어보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빙마동주가 모든 전력을 이끌고 나섰다고 하지만 그들이 전투에 참여했다면 이리 쉽게 밀릴 리가 없었다.
‘이건 마치…….’
유인.
길목 너머로 보이는 대막혈궁의 모습이 미끼를 던져두고 쥐새끼를 유인하는 덫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추련화가 밀고 들어가는 빙마동의 무인들을 지켜보는 사이 귀랑이 다가왔다.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의 얼굴에 묘한 걱정이 어려 있었다.
“추련화.”
“응?”
“거웅이 오지 않았다.”
“뭐?”
“후미로 처졌다고 해도 지금쯤이면 도착했어야 한다.”
순간 머리가 찡 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설마?”
추련화의 고개가 후방을 향해 홱 하고 돌아갔다.
자신들이 걸어온 길…….
“백괴는?”
“알지 않는가? 그가 동주님께 얼마나 충성하고 있는지…….”
“음.”
백괴는 가장 오랫동안 빙마동주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다.
“안 되겠다. 귀랑, 서둘러 후미로 가라. 가서 거웅을 찾아라. 만약 이것이 놈들의 함정이라면 빙마동 전체가 위험하다.”
“하지만 동주께서…….”
“내가 책임지겠다. 만에 하나 거웅이 죽었다면 그들과 싸우지 말고 곧바로 돌아와라. 돌아와서 이 사실을 동주님께 알려야 한다.”
추련화의 음성이 다급해졌다.
명령 없이 전선을 이탈하는 것은 일종의 항명이었다. 빙마동주는 누구보다 권위적인 사람이었다.
귀랑은 잔뜩 구겨진 얼굴로 고심했다. 추련화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일치하고 있었다. 추궁을 받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알았다. 거웅을 찾아보겠다.”
“혼자서는 안 된다.”
“음…….”
순간 추련화의 얼굴에 싸늘한 살기가 떠올랐다.
“병력을 데려가라. 너는 반드시 살아 돌아와야 한다.”
“…….”
귀랑은 추련화가 병력을 데려가라는 의미를 단번에 깨달았다.
여의치 않을 시에는 수하들의 목숨을 이용해서라도 도망쳐 오라는 뜻이다.
“귀랑. 냉악이 죽었다. 어쩌면 어제 보았던 그들이 후방을 습격한 것이라면 거웅도 죽었을지도 모른다. 남은 것은 우리 셋이다. 몇십, 몇백의 목숨보다 너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
귀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빙마동에서 빙동마령들의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그리 가볍지 않았다.
빙마동주 서량과 빙동마령들은 만년빙정의 극음지기를 한계까지 수련해 온 이들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들 자체가 빙정의 기운을 나누어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곧 빙마동인 것이다.
모두가 죽더라도 그들만 건재하다면 만년빙정을 되찾았을 때 빙마동을 재건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수하들의 피 속에서도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알겠다. 오십 명, 그 정도만 데려가도록 하지.”
“부탁한다.”
추련화는 귀랑의 추가적인 대답을 듣지 않고 곧바로 빙마동주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찾아봐야 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들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알아야만 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이 후방을 노렸는지는 정확하지 않은 추측일 뿐이었다. 그저 거웅이 자신들의 예상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안 요소를 가지고 적의 심장부로 진격할 수는 없었다.
승리에 잔뜩 도취된 빙마동주의 분노를 사게 될지 모르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빙마동의 생존이었다.
애초에 이번 전투에 북해빙궁의 선발대로 나선 것도 몰락해 가는 빙마동을 되살리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전투였다.
* * *
“응?”
빙마동의 전력이 이동했던 경로를 피해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대막혈궁의 길목으로 은밀하게 이동하고 있던 소청이 걸음을 멈췄다.
전방에서 이질적인 느낌이 전해져 왔다.
대막혈궁이 자리한 검은 대지의 열기는 그리 약하지 않다.
북방의 추위를 녹여 버릴 정도로 뜨거운 그것은 멀리 떨어진 곳까지 지열을 만들어 내었다.
한데 그 열기의 틈으로 어울리지 않는 한기가 파고들었다.
빙마동의 괴인들이 지나가며 남긴 여운 따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꽤나 빠르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후미가 대열에 합류하지 않자 이상함을 느끼고 확인하기 위해 되돌아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흩어져! 적이다! 기운을 감춰라!”
소청의 낮은 목소리가 별동대 무인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파파팍.
경공술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별동대의 무인들이 즉각적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순간적으로 속도를 내었음에도 지면을 파헤치지 않고 움직일 정도로 뛰어났다.
그리고 잠시 후 귀랑과 오십여 명의 괴인들이 거칠게 질주하며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빙동마령 중 한 놈.’
죽여야 할 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이 거웅을 죽음을 확인하고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되었다.
-승혜, 란! 너희는 이곳을 경계해라! 혹시 뒤를 따르는 놈들이 있는지 반드시 살펴야 한다.
-알겠습니다!
-나머진 놈들을 쫓는다!
승혜와 서문란을 남긴 소청은 곧바로 귀랑의 뒤를 쫓아갔다.
“이, 이런!”
대지에 펼쳐진 수많은 시신.
귀랑은 부릅뜬 눈으로 이백여 명의 시신의 틈새를 걸었다.
그리고.
“거, 거웅…….”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다.
매일 만녕빙정의 옆에서 얼굴을 바라보며 극음지기를 연마해 온 귀랑은 그의 얼굴 한 조각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찾아낸 것은 반도 남지 않은 그의 육신이었다.
거웅의 시신 곁으로 다가간 귀랑은 차마 안아 들 수가 없었다.
놈들이 후미를 친 것이다.
서둘러 알려야…….
귀랑의 얼굴이 빠르게 돌려졌다.
“여어, 이렇게 빨리 알아챌 줄은 몰랐는데?”
“…….”
검은 피풍의를 휘날리며 손을 들고 인사를 해 오는 소청의 모습에 귀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사방에서 조여 오는 묵직한 느낌.
놈이다.
냉악을 죽이고 전날 자신들을 퇴각하게 했던 그들이었다.
“이거 참, 지금쯤 대막혈궁을 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소청이 팔짱을 낀 채 귀랑을 게슴츠레하게 쳐다보았다.
“결국 추련화의 예상이 맞았던 것인가?”
귀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추련화? 그렇군. 승전 속에서도 우리의 전략을 의심할 정도로 눈치 빠른 놈이 있었다는 이야기겠지?”
소청은 귀랑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에 잠긴 귀랑은 소청의 말을 정확하게 듣지 못했다.
역시 함정이다.
놈들은 자신들에게 일부러 승리를 안겨 주고 있는 것이다.
귀랑은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냉악을 단번에 죽인 자였다.
그들이 접전지까지 이동해 온 시간과 전투가 벌어졌던 한 시진을 고려한다고 해도 고작 두 시진 정도의 짧은 시간 만에 거웅과 후위 이백의 무인들을 죽인 자들이었다.
자신이 빙동마령의 일인이라고 해도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도망쳐야 했다.
추련화의 말대로 수하들의 죽음을 발판 삼아서라도 도망쳐서 이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귀랑은 자신을 둘러싼 무인들 중 가장 약한 자를 골랐다.
그곳으로…….
파앙!
몸을 날리려는 순간 공간을 찢어 내는 파공음과 함께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소청의 모습.
“머리 굴리지 마라. 넌 절대로 도망치게 놔둘 수 없거든…….”
“……!”
움직이지도 못했다.
분명 십여 장은 족히 넘는 거리였는데, 발걸음을 내딛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소청이 가볍게 손을 뻗어 귀랑의 머리에 올렸다.
꾸우우우…….
“크윽!”
그의 손은 그저 가벼운 움직임에 불과했는데 마치 산악이 그의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져 왔다.
버틸 생각조차 들지 않게 만드는 압력에 귀랑의 무릎이 강제로 꺾였다.
빙마동주?
아니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소청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부, 북천대공?’
그들의 일족을 빙마동에 가두고 금제를 걸었던 북천대공 백효의 기운을 상회하고 있었다.
‘이, 이런 자가…….’
소청은 싸늘하게 귀랑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에게서 이미 시선이 거두어졌음에도 주먹조차 뻗어 낼 수가 없는 무시무시한…….
“모두 죽여.”
나지막한 사신의 읊조림과 함께 별동대의 무인들이 움직였다.
죽어 간다.
자신이 데려온 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힘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대지에 쓰러지고 있었다.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알려야 했다.
지금 오십의 목숨을 잃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빙마동 전체가 죽을 수가 있는 문제였다.
“끄아압!”
귀랑은 자신이 가진 극음지기를 단번에 발출했다.
순식간에 몰려든 한기에 그의 몸을 가득히 덮고 있는 털이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빳빳하게 돋아 올랐다.
그리고 사방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수천수만 개의 털이 암기처럼 뿜어졌다.
파라락!
콰드드드득!
순간 귀랑에게 적막이 찾아왔다.
한기를 가득히 머금은 털들이 그의 몸을 떠나려는 순간 소청이 재빠르게 피풍의를 풀어 그의 몸을 덮어 버렸다.
“어디서 얕은 수를……. 내가 그 정도의 술수도 느끼지 못할 것처럼 보였나?”
소청은 잔인한 미소를 머금으며 피풍의에 진기를 가득히 주입했다.
혈잠의 보표.
세상에서 가장 질긴…….
진기의 주입에 따라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콰드드득!
귀랑을 감싼 피풍의 속에서 뼈가 뒤틀리는 잔인한 소음이 흘러나왔다.
빙동마령 귀랑.
극음지기를 머금은 귀랑의 저항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파락.
말렸던 피풍의가 풀리고 귀랑의 몸이 쓰러졌다.
몸이 기괴하게 틀어져 버린 그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팡!
피풍의를 털어 내고 등 어림에 걸치는 소청의 얼굴에 떨떠름한 표정이 지어졌다.
“찝찝하네. 다신 하지 말아야지.”
소청은 시선을 돌려 빙마동의 괴인들을 학살하고 있는 별동대의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단연 최고는 소강이었다.
하지만 그를 보는 소청의 눈은 답답하기만 했다.
강하고 잔인하다.
마음속에 무언가가 변한 것처럼 소강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거웅을 죽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소청은 그런 동생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흠, 그때부터였나?’
일전의 부딪힘.
$-언제까지 저를 어린아이 취급하시려는 겁니까?
$-형님! 저는 보호받아야 할 아이가 아닙니다.
소강은 자신의 품을 떠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마치 자신이 이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소강은 함께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속 좁은 녀석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