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8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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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89화
188화. 서로 다른 준비의 시간
북천맹으로 은밀하게 찾아온 손님.
비마대의 은수.
그는 혜어화에게 제갈휘문의 명령서를 내밀었다.
“이건?”
은수로부터 제갈휘문의 명령서를 받아 든 북천맹의 군사 혜어화가 얼굴을 찡그렸다.
“어찌 그러십니까?”
신승이 그녀의 반응에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신승과 백인회를 제외한 북천맹의 주력을 사천으로 이동시키라는군요.”
“사천이라면 서천맹이란 말입니까?”
“흠. 이상하네요. 마궁이 움직인다는 정보는 듣지 못하였는데…….”
“흠, 이상하긴 하군요. 북해의 전력이 남하하고 있는 것을 극비로 하라 하면서 주력을 이동시키라니…….”
두 사람은 무황 위도혁의 인장이 선명히 찍혀 있는 맹의 명령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북해의 남하에 대해서는 미리 언질이 있었기에 북천맹 예하에 따로 공표하지는 않았다. 알고 있는 것은 자신과 신승, 그리고 대막으로 간 섬뢰가 고작일 것이다.
하지만 혜어화는 구 사도련의 세력을 개편함과 동시에 신승이 이끌고 온 백인회의 도움으로 무인들의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병력이 부족한 판에 무엇으로 북천맹을 방어하며 전쟁이 벌어졌을 때 어찌 선발대의 후방을 지원한단 말입니까?”
“흠…….”
“구자겸이 이끌었던 대막혈궁의 병력이 서천맹을 공격했을 때 그들의 병력이 이만에 달하지 않았습니까?”
“예. 아마 북해의 전력도 그에 못지않겠지요.”
신승의 질문에 혜어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더 이상합니다. 진혜에게 듣기로는 흑선의 정보원들이 북쪽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북해의 남하를 조금이나마 더 빠르고 정확하게 확인하고자 함이 분명한데…….”
혜어화는 말없이 대기하고 있는 은수를 향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혹 속사정을 알고 있는가? 명령서를 전서구가 아닌 자네를 통해 보낸 것을 보면 따라 전할 말이 있는 듯한데?”
그녀의 말에 은수가 답을 했다.
“북천맹은 마천의 눈과 귀가 집중되어 있으니 직접 전하라 하셨습니다.”
“…….”
“이번 전투는 마천과의 싸움에서 분수령이 될 것이니 반드시 승전해야만 한다 강조했습니다.”
“흠.”
“주력을 서천맹으로 보내는 것은 중원 무림이 북해의 움직임을 알지 못함을 드러내고, 또한 마궁을 움직이지 못하게 함입니다.”
“흠, 하면 북해만을 상대하겠다는 뜻인가?”
“예.”
“하지만 주력을 다 보내고 나면 무슨 병력으로 저들을 상대한단 말인가? 섬뢰께서 이끌고 간 병력은 이천 남짓밖에 되지 못하네.”
혜어화의 말에 은수가 빙긋이 웃었다.
“패월과 혁련 소련주께서 별동대를 이끌고 은밀히 오고 있습니다.”
“…….”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얼마 되지 않는 전력인데…….
“자세한 것은 그분께 들으시면 될 듯합니다.”
“…….”
“어쨌든 이번 전투는 패전을 반복해 승리한다 하셨습니다.”
“패전을 통해 승리를 얻는다? 흠, 국지전을 반복하며 저들을 중원 깊숙이 끌어들이겠단 말이군.”
“예.”
“무슨 뜻인지 알겠네.”
“그리고…….”
“…….”
“무인들을 서천맹으로 떠들썩하게 보내라 하셨습니다. 모두가 보고 듣고 알 수 있게끔, 마치 서천맹의 병력이 마궁을 쳐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처럼…….”
은수의 말에 혜어화가 만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북천맹과 각 파에서 선발된 무인들이 제갈휘문의 명령서에 사천으로 떠났다.
소청과 혁련휘는 별동대를 이끌고 북천맹을 향하며 수련을 이어 가고 있었다.
“개새끼들…….”
진주언가의 대공자 언청연은 밥을 짓기 위해 불을 피우다 연기의 매캐함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뒤를 째려보았다.
이곳저곳, 지친 몸을 아무렇게나 누이고 쉬고 있는 별동대의 무인들.
한 놈도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모두가 ‘나만 아니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사력을 다해 쉬고 있었다.
오대 무가까지는 아니었지만, 강남 칠패에 속한 명망 있는 가문의 대공자였다.
그런 자신이 어째서 벌써 십수 일째 쉬지도 못하고 밥을 하고 있는 것인가.
온몸의 근육은 작은 손가락의 움직임에도 비명을 질러 대었다.
“씨발, 내가 왜…….”
진소청이라는 괴물을 만나지 말았어야만 했다.
별동대에 소속된 이후로도 그저 줄만 잘 서면 대충 무림에서 이름이나 날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굳이 화려한 위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저냥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게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란 말인가?
연맹에서 날아온 한 장의 명령서는 진소강을 비롯한 별동대 전원을 무한으로 소집했다.
사람들 눈에 띄지 말고 은밀하게 찾아오되 가장 늦게 도착하는 사람은 각오하라 했던가?
그건 또 무슨 개 같은 소리란 말인가?
사천과 호북이 아무리 인접한 성이라 할지라도 무려 이천 리에 달하는 여정이었다.
응당 말을 타고 달려야 하는데 은밀하게 오라니?
어쨌든 명령이 내려졌으니 최선을 다해 은밀히(?) 말을 달렸다. 아마 말이라는 놈도 길 없는 산자락을 뛰어 본 것은 처음일 것이다.
그렇게 맨 마지막에 도착했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뭐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별동대 내에서는 소청에게 구타를 당하면 무공이 오른다는 별 해괴한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청과 혁련휘는 마치 물건을 고르듯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별동대를 두 패로 나누었다.
아쉽게도 제일 마지막에 서문세가의 대공자 서문중걸이 혁련휘에게 선택되고 자신은 소청에게 선택되었다.
서문중걸이 무척이나 아쉬워했지만 바로 묵살되었다.
소청과 혁련휘는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두 달 후 오태산(五台山)에서 만나세.’라며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거기까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무한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산서성의 북쪽에 있는 오태산이라고 해 봐야 사천에서 무한까지 오는 거리와 비슷하다.
말을 쉬지 않고 달리면 엿새, 혹은 이레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말?
그따위 건 애초부터 없었다.
달린다. 죽도록 달린다.
지쳐서 쓰러진다. 그럼 맞는다. 죽도록 맞는다.
그리고 소청이 준비해 온 속명단에 기력을 회복한다.
그리고 또 달린다…….
“…….”
제길, 갑자기 눈물이 왜…….
제일 처음 만난 것이 산이었다.
소청은 그들에게 군자산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깎아지른 절벽을 오로지 육체의 힘만으로 올라야 했다.
떨어지면 어떻게 되냐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측은지심, 협의, 동료애…….
그따위 건 하루 만에 사라졌다.
모든 일에 일등이 있으면 꼴찌가 있기 마련이다. 일등은 항상 진소청의 동생인 진소강이 도맡았다.
그리고 꼴찌는?
맞는다. 정말 가혹할 정도로 맞는다. 타인이 맞는 모습을 보고 뒷머리가 솟구칠 정도의 섬뜩함을 느끼기란 쉽지 않았다.
첫날은 그렇게 십 리를 이동했다.
그리고 첫 번째 야영지에서 지도 대련이 시작되었다.
뭐, 고생 끝에 보람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개소리다.
말이 지도 대련이지 학살에 가까웠다.
소청은 자신의 실력을 고려하지 않고 정말 최선을 다해 싸워 주었다.
감사할 일이지만 모두가 그의 일초지적도 되지 못했다. 이렇게 죽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몰아붙였다.
하지만 구타가 무서워 반항조차 할 수가 없었다.
별동대의 눈은 고작 사흘 만에 독기로 가득해졌다.
진소청에 대한 독기가 아니었다.
애초에 괴물이었기 때문에 반항을 하거나 황보인처럼 째려보았다가는…….
뒤는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했다.
그들의 눈동자를 가득 채운 독기는 말 그대로 동료를 향한 독기였다. 지지 않기 위한 독기였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쉴 수 있었고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었다.
지옥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고 바로 이곳일 것이고, 그 지옥을 다스리는 것은 누가 뭐래도 진소청이 확실했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이 순간도 언청연은 꼴찌를 했다.
망할 서문란 저년이 마지막에 발만 걸지 않았어도…….
흠씬 두들겨 맞고 남들이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밥을 해야만 했다.
두고 보자. 내일은 반드시…….
“야! 아직 멀었냐?”
“…….”
마음속으로 다짐하던 언청현은 갑자기 들려온 사신의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 다, 다 됐습니다!”
“거참 굼뜨기는……. 벌써 해가 지고 있는데 도대체 왜 이리 굼뜬 거야?”
‘산의 밤은 원래 빨리 찾아온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청이 신경질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언청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핑계를 만들어야 했다.
아니면 저 악귀 같은 놈이 무슨 꼬투리를 잡고 자신을 괴롭힐지 모른다.
“그게 국이…….”
“장난해?”
“…….”
“뭘 얼마나 맛있게 만들려는 거야? 대충 말린 고기 몇 점 넣어서 물만 끓이란 말이야!”
“예. 예!”
언청연은 열심히 대답했다.
“수련도 제대로 못 따라오는 놈들이 뭘 얼마나 맛있는 걸 먹겠다고…….”
소청이 신경질적으로 눈을 뜨며 별동대의 무인들을 째려보았다.
“제가 도울까요?”
보다 못한 소강이 다가오자 언청연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손을 내밀었다가 살기 어린 소청의 시선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일등께서는 쉬셔야지. 암요. 제가 합니다, 제가!”
그제야 소청의 눈빛에서 살기가 누그러졌다.
망할 일등만 인정받는 더러운 세상. 내 반드시 내일은 꼴찌에서 벗어나리라!
언청연을 뒤로하고 몸을 돌린 소청을 향해 소강이 물었다.
“그런데 형님, 초사와 비마대 분들이 보이지 않는군요?”
“아, 초사는 제갈휘문을 돕고 있을 거고 나머지는 다른 일을 좀 하고 있다.”
“다른 일요?”
“그래.”
“어떤?”
“넌 몰라도 돼.”
“…….”
“어차피 곧 만나게 될 테니까.”
어두워져 오는 밤하늘을 보며 낮게 웃는 소청의 뒷모습에 소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화악!
절강성 도독부 소속 조사관 이태석은 술에 거나하게 취해 돌아가던 중에 누군가의 습격을 받았다.
갑자기 나타난 이들은 그의 머리를 앞이 보이지 않는 자루로 덮었다.
“누구…….”
쩌억!
그의 물음은 이어지지 못했다.
뒷목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뒤,
짜악!
볼을 때리는 따끔한 느낌에 깨어난 이태석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당황스러운 와중에 고개를 돌린 그는 자신이 감금된 곳이 자신의 집임을 깨달았다.
절강성의 외곽에 위치한…….
그리고 금제된 자신의 몸이 의자에 묶여 있음을 깨달았다.
“읍, 읍읍!”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입에 재갈이 물린 자신의 처와 두 아이가 보였다.
“……!”
놀란 마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쳐 보지만 아혈을 제압당한 것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금마강 사건의 조사관 이태석.”
“…….”
“아혈을 풀어 주겠다. 대신 묻는 말에만 대답하도록…….”
‘무림인?’
이태석은 순간 그들의 정체가 무림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파르라니 깎은 머리의 승려였다.
‘하면 소림사?’
관부의 말단 무관직인 그가 아는 무림의 중들은 소림사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다.
좀 더 살기가 짙다고 해야 할까?
붉은 가사를 걸친 그들은 이마와 계인 대신 뜻을 알 수 없는 범어로 문신을 새겨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