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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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50화
149화. 기다리는 사람들
혈승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무너진 전각들, 담벼락…….
처참하게 죽어 있는 수많은 시신들.
그 지옥 같은 풍경 속에 선 우람한 덩치의 사내.
권마 우도.
청해성을 습격한 그는 화산이 아닌 호북의 초입에서 혈승과 음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도!”
“예, 혈승!”
혈승의 부름에 권마가 묵직한 걸음으로 쿵쿵거리며 달려왔다.
“수고했네.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권마가 바보스럽게 웃으며 이빨을 드러내 보였다.
“기르던 개새끼까지 때려죽였습니다.”
“잘했군.”
혈승의 칭찬에 권마가 기분 좋게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람 좋게 웃는 그를 보며 음마가 눈을 찡그렸다.
‘멍청이…….’
지극히 단순한 인간이었다.
마천의 세주들 중에서도 마종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뛰어난 그를 두고 남들은 우직하다 할지 모르겠으나 그저 생각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저 마천에 복속된 혈마궁이다.
전권을 받았다고 하나 결국 혈승은 마천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자였다.
그런데 존대라니……
‘자존심도 없는 놈 같으니. 그새 혈승의 개가 되다니…….’
아무리 전권을 가졌다고는 해도 마천의 세주로서 명예가 있는 것인데…….
“진소청이 황보세가에 나타났으니 이제 자네는 천패동의 무인들을 이끌고 화산을 쳐야 하네.”
“화산을요?”
“그래, 화산일세. 검존의 목을 따고 화산을 피로 물들이게.”
진소청이 황보세가에 있으니 무황이 움직이지 않는 이상 화산에서 권마를 막을 수 있는 무인은 없었다.
검존이 과거 정천의 최고수였다고는 하지만 권마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권마는 충분히 화산을 무너뜨릴 것이다.
“알겠습니다!”
반문은 없었다.
권마가 곧바로 대답하고 천패동의 무인들과 함께 화산이 있는 북쪽을 향해 곧장 몸을 날렸다.
명이 내려졌으니 권마의 행동은 뻔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산으로 가서 검존의 머리통을 뜯어 올 것이 틀림없었다.
혈승의 말은 그저 검존을 죽이라는 것이었지만 우도는 말하는 그대로 듣고 들은 그대로 행동한다.
화산을 쳐야 하는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혼란을 계속해서 만들어 북쪽에 대한 감시가 소홀해지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그것이 혈승의 두 번째 목적이었다.
그들이 무림으로 잠입하던 시점에 북쪽으로 전서구가 날아갔다.
이미 북천대공 백효가 은밀하게 남하를 시작했을 것이다.
반년.
반년 후면 북해가 도착할 것이다.
혈승은 중원 곳곳을 습격해 저들의 눈을 돌리고 혼란을 틈타 은밀하게 북해를 진격시키고 있는 것이다.
중원의 혼란은 그것을 가리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종래에는 북해의 병력과 마궁의 병력이 중원을 침공할 것이다.
그것이 최종 목표였다.
떠나 버린 권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던 음마가 물었다.
“다음 계획은 무엇이오?”
“계속해서 민가를 습격해 관을 끌어들인다.”
“뭐라고?”
음마가 놀란 표정으로 혈승을 바라보았다.
민가를 계속 공격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혈승! 설마 관군과 싸울 생각입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
무공의 강함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의 나라를 세운 태조의 건국 당시 중원의 무인들은 그의 건국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무림에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보장했다.
이른바 관무불침(官武不侵).
황제가 직접 천명한 말이었다.
그렇기에 무림에서 살인이 일어나고 소란이 있어도 관에서 직접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혈승은 지금 황제가 세운 금기를 깨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황제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또 하나의 역모였다.
사태가 복잡하게 변한다.
“이런 미친…….”
음마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혈승은 웃기만 했다.
“어찌해서 그러는가?”
“몰라서 그러는 게요? 관이 끼어들면 중원 무림뿐 아니라 마천도 위험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악수(惡手)였다.
“홀홀,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관이 우리의 뜻대로 움직여 준다면 어떻겠는가?”
“뭐라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관에도 세작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그야 그렇지만…….”
“홀홀, 무림의 분쟁. 민초의 죽음. 관이 어찌할 것 같은가? 관무불침을 계속해서 유지해 줄 것 같은가? 그들에게 구분은 없어. 중원이든 마천이든 무림인일 뿐일세.”
“…….”
“분명 제약을 가해 올 테지. 그리고 그 제약은 중원에 속한 이들에게는 족쇄가 될 것이 틀림없을 터.”
“그…….”
음마는 자신도 모르게 혈승의 곁에서 뒷걸음질 쳤다.
그의 눈동자에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광기의 불길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너무 위험한 계획이다.
관의 개입은 중원 무림에 족쇄였지만 마천에게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수단이 된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북해가 진격해 오는 데 그만큼 좋은 조건은 없을 것이다.
혈승이 이토록 심계가 깊은 인물이었던가?
음마는 지금까지 세주들 모두가 혈승을 잘못 판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마, 너는 지금부터 진소청의 움직임을 살펴라. 한순간도 놓쳐서는 안 된다.”
“아, 알겠소.”
쿠르릉.
하늘이 울기 시작했다.
검은 먹구름이 몰려왔다.
콰과광!
구름 사이를 넘실거리던 전격이 우레성을 내며 지면을 향해 곧장 떨어져 내렸다.
번쩍.
천둥에 이은 거대한 빛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었다가 사라진다.
쏴아아아.
그리고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을 것처럼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과 함께…….
* * *
띵-.
술잔이 부딪치며 진한 소음을 만들었다.
술잔을 입가로 가져간 사내는 단숨에 잔을 비워 내었다.
알싸한 느낌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열기를 피워 올렸다.
“좋은 술이군요.”
“입에 맞는다니 다행일세.”
화산의 접객당인 서현당에 모처럼 손님이 찾아왔다.
검존 현우자와 장문인 운상자는 명주 ‘옥루(玉淚)’를 내어와 그를 직접 맞이했다.
검존과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이는 다름 아닌 혁련휘였다.
“무황께서 자네를 보내실 줄은 생각도 못 했네.”
현우자가 흐뭇하게 혁련휘를 바라보았고 운상자는 말없이 옆에 앉아 대기했다.
사파의 무인 중 서현당의 손님으로 들어온 것은 그가 최초였다.
무황의 후계자이자 장차 사도의 주인이 될 그에게서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도우러 왔음에도 산문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을 현우자가 직접 데려온 참이었다.
‘과연 무황께서 제자로 들일 만하군. 진 공자에 비해 전혀 모자람이 없어.’
현우자는 혁련휘가 잘 벼려진 한 자루의 칼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원을 이끌어 가는 정과 사에 각기 감탄할 정도로 뛰어난 무인이 나왔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진 공자의 생환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니, 거참…….”
현우자의 말에 혁련휘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 감쪽같이 속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망할 친구 놈이지요.”
“헛헛, 그래. 그래, 정말로 망할 친구로구먼.”
“스승님께서 함구하라 하셨다는군요.”
“흠. 그 마음을 이해할 듯하네. 때로는 복수심이 수련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
“그래도 제일 먼저 찾아올 일이지. 대막혈궁에 서천맹 전투까지 지난 다음까지도 소식 하나 없네요. 하여간 무심한 친구입니다.”
혁련휘가 아련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움이리라.
그 마음을 느낀 현우자가 마주 웃었다.
이전에 정사의 무인이 이리도 마음들 두고 서로를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또한 참 특이한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정천에 몸담은 사내는 거침없기가 사도의 낭인 같은데, 정작 사도련의 후계자는 명문 정파의 자제와 비교해도 모자람 없이 경건해 보이니…….
“어쨌든 검마와 독마가 죽었다니 조금은 허탈한 기분이 듭니다.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리 노력했었는데…….”
“그래도 큰 성과를 얻은 모양일세.”
“성과랄 것도 없습니다. 이제 겨우 한 초식을 얻었을 뿐입니다. 망할 친구 놈에게 닿을지 걱정스럽군요.”
혁련휘가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마주 웃던 현우자가 혁련휘의 도갑에 시선을 두었다.
검은 용문이 새겨진 도갑.
“혹시 그건?”
“예. 스승님께서 제게 떠넘기신 신물입니다.”
“…….”
흑도 ‘묵룡아(墨龍牙)’.
무황 위도혁의 신물이었다.
아무리 현우자라 해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만약 보았다면 전투였을 것이고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괜찮으면 보여 줄 수 있겠나?”
현우자가 혁련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타인에게 자신의 애병을 내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림에서도 금기시되는 일이었지만 혁련휘는 아무렇지도 도갑을 현우자에게 내밀었다.
애초에 혁련휘가 그런 것을 따지는 성격이 아니기도 했고 그만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
혁련휘가 전해 준 도를 받아 든 현우자가 흥분된 눈으로 이리저리 살피다 도를 뽑았다.
스르릉.
청아한 소리와 함께 도갑과 손잡이와는 달리 백색 도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날카로운 예기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담담하고 무겁다.
“마치 무황 그분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 같군.”
“예. 오랫동안 함께해 왔으니까요.”
“허, 정말 멋진 도가 아닌가.”
“족쇄입니다.”
“응?”
“사도련이라는 짐을 제게 떠넘기시려는 짐이지요.”
“그, 그런가?”
혁련휘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기자 현우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보도였다. 그런 것을 짐이라 표현하니…….
‘허, 진 공자와 성격마저도 비슷하다니…….’
현우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도를 돌려주었다.
그런데 도를 받아 들던 혁련휘가 눈살을 찌푸렸다.
“꺼낸 김에 사용하라는 모양입니다.”
“…….”
“기다리던 손님이 이제야 온 듯합니다.”
혁련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현우자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아!”
그리고.
콰아아앙!
화산의 산문이 터져 나갔다.
그리고 거대한 덩치를 가진 사내가 뛰어들었다.
“이건 뭐야?”
산문을 부수고 올라온 권마 우도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너무나 한가롭다.
그 사이에서도 피부를 찌르는 살기가 쏘아져 나왔다.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의 분위기가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장문인 운상자를 비롯한 화산의 장로들과 수많은 무인들…….
하지만 살기의 정체는 그들이 아니었다. 좀 더 예리하고 차가웠다.
“…….”
우도의 눈이 화산의 무인들을 지나 검은 방립을 쓴 이들에게 닿았다.
화산의 무인들이 아니었다.
살기는 화산의 무인들과 다른 방향에 서 있는 검은 방립을 쓰고 가슴에 흑색 도(黑刀)를 품은 자들에게서 느껴져 왔다.
“이상하다. 이런 것들이 있다는 말은 혈승께서 말해 주지 않으셨는데…….”
권마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약간 당황한 표정을 했지만 권마에게 그따위 살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주먹을 뻗어 그들의 살기를 짓눌러 버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꽤나 늦었군. 기다리다가 술 한 병을 다 비울 뻔했다.”
서현당에서 나온 혁련휘가 권마를 향해 물었다.
“뭐야, 넌? 검존이 그리 젊을 리는 없고. 넌 누구냐? 화산의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혁련휘.”
“혁련휘? 거참. 사도련 놈이 웬일이지?”
“…….”
“어쨌든 비켜라. 혈승께서 원하신 건 검존의 목과 화산의 멸문이다.”
권마는 혁련휘를 마치 물건 취급하듯이 손을 휘저었다.
혁련휘는 자신을 소개하는 권마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약간 멍청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이거 미안하군. 비켜 주고 싶은데 이쪽도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 말이야.”
“…….”
“스승님께서 화산을 지켜 주라 명하기도 했고, 너를 죽이고 서둘러 찾아가야 할 친구가 있어서…….”
혁련휘의 말에 권마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그래 그럼, 너도 죽여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