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45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45화
144화. 개가 똥을 끊지
어둠이 짙게 깔려 술시 말을 넘어 갈 무렵(저녁 9시).
모두가 잠들기 시작하는 시간, 황보세가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황보가 인근에 도착한 음마와 그 수하들은 인근 수풀에서 선예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새벽녘, 아미파를 습격하면서 미리 호남성으로 잠입시킨 선혜에게 전서구가 도착했다.
그녀의 필체가 확실했다.
그런데 어째서 나타나지 않는단 말인가?
“선예와 연락이 닿질 않습니다.”
“이상합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추련과 교아의 말에 음마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세주님, 어쩌죠?”
교아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눈빛은 전혀 다른 감정을 담고 있었다.
탐심, 욕정…….
환희요락궁의 여인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황보가에 도착하는 순간 그들의 얼굴에는 묘한 흥분에 홍조가 피어올라 있었고 눈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중원으로 들어온 이후 제대로 된 사내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중원에 나와 젊음을 되찾아 가고 있었는데…….
“음…….”
음마의 시선이 황보세가를 매섭게 훑었다.
그때.
“세주님! 저기.”
교아의 손가락이 황보가의 대전각을 가리켰다. 나의를 입은 여인이 어둠 속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선예입니다.”
꽤나 떨어진 거리였고 어둠 속에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림자는 분명 선예가 분명했다.
“망할 년, 벌써 들어가 있네.”
추련이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었다.
선예의 모습에 추련을 비롯한 환희요락궁의 요녀들이 잔뜩 달아오른 몸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음마도 마찬가지였다.
“추련.”
“예, 세주님.”
“아이들을 보내거라. 황보세가를 정리한다.”
“네!”
* * *
휘적, 휘적.
쫙 달라붙어 있는 옷을 입은 선예는 새 쫓는 허수아비처럼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망할 악종 놈은 도무지 그만두라고 할 것 같지 않았다.
지난밤 동안 구타당한 고통에 온몸이 욱신거려 왔지만 더 맞고 싶지 않았다.
더 맞으면 정말로 죽을지도 몰랐다.
“야! 빨리 안 흔들어?”
“…….”
조금이라도 늦어질라치면 소청이 독사눈을 하고 째려보았다.
휘적, 휘적.
선예는 열심히 흔들었다.
“대장, 혹시 형산파로 간 게 아닐까요?”
황보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황보가 전체를 째려보았다.
황보세가 대전각의 지붕에 모습을 숨기고 기다린 지 벌써 반나절이 지났다.
저들이 도착할 시각이 되었음에도 너무나 조용했다.
평소의 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모처럼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온 황보인은 아비와 가족들을 눈앞에 두고도 지켜보기만 할 뿐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물려준 이후로 훌쩍 늙어 버린 황보숭과 장로들의 모습에 가슴이 저릿해져 왔다.
주력 무인들인 패왕대마저 서천맹으로 가 버린 뒤라 크기만 한 황보세가의 전각들은 활기를 찾아보기 힘들었고 밤이 찾아오자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조바심을 느낀 황보인이 소청을 계속해서 째려보며(?) 힐끗거리지만 소청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곧 올 거야. 애초에 목표가 여기니까.”
“예?”
황보인은 소청의 옆에 잡혀 있는 선예라는 노파를 흘낏거렸다.
피도 눈물도 없는 소청에게 불쌍할 정도로 구타를 당해 온몸의 뼈가 부러진…….
“마천은 명령받은 목표를 절대로 바꾸지 않아.”
“…….”
“전서를 보낸 지 하루, 얼추 도착할 시간이니 황보세가 주위에 숨어서 내부를 살펴보고 있을걸? 안 그래?”
소청의 질문에 선예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협이 없다는 전서는 보냈고, 저렇게 약속된 시간에 신호도 보내고 있으니 이제 곧 들이닥칠 거야.”
“어찌 그리 확신을…….”
“확신? 흥, 개가 똥을 끊지. 저것들은 절대로 못 끊어. 눈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아마 독이 잔뜩 뿌려져 있어도 처먹으려 할 거야.”
“……?”
뭘 끊고, 뭐가 진수성찬이란 말인가?
지붕 위에 있는 자들은 도무지 소청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청은 열심히 손을 휘젓고 있는 선예를 보며 피식 웃었다.
몇 대 맞고 주안공이 풀려 버린 그녀. 필시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사내들의 양기를 흡수해 왔을 것이다.
그녀들이 하고 있는 짓은 채음보양(采陰補陽)이다.
아니 채양보음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들은 사내의 양기를 취해 자신들의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흡정이라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타인의 기운을 몸 안에 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일종의 역천(逆天),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다.
일순간 큰 힘을 발휘할 수는 있겠지만 흡수된 기운은 시간이 지나면 소멸되기 마련이다.
만약 그 기운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뭐 하러 불가와 도가에서 영단을 만들고, 무엇 하러 무인들이 내공을 수련한단 말인가?
흡정공만 익혀서 천하제일인이 될 수도 있는데…….
물론 개중에 한둘 정도는 흡정한 내공의 일부를 녹여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음마를 제외하고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채양보음술을 사용하는 이상 지속적으로 사내들의 양기를 흡수할 수밖에 없었다.
소청이 황보인과 악이군을 슬쩍 바라보았다.
제갈휘문의 제안으로 격체전공을 수련한 무인들…….
그들 역시 제대로 녹여 내지 못하면 언젠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할 것이다.
소청이 기억하는 그때와 인물들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전생에 있었던 마천 정벌 당시에도 격체전공으로 순식간에 힘을 얻은 자들이 있었다.
삼 년에 걸친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그들은 결국 비참한 말로(末路)를 맞이했다.
소실…… 그리고 폐인…….
순리를 역행한 자들에게 뒤따르는 천형(天刑)과 같은 것이다.
내공이 소실되기 시작한 그들은 빠르게 늙어 갔고 십 년이 채 못 되어 고목처럼 말라 죽었다.
그들이 얻었던 것은 마천 정벌을 막아 낸 ‘영웅’이라는 허명뿐이었다.
그리고 그 역사가 반복되어 격체전공을 이룬 무인들…….
그들은 아직 자신들의 말로가 어떠할지 모른다.
그리고 소청에게 구타를 당한 것이 얼마나 대단한 기연인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방편에 불과했다.
길을 열어 주는 것은 소청이 해 줄 수 있었지만 남은 것은 결국 그들의 몫일 테니까…….
“왜 그리 보십니까?”
“…….”
소청이 그들을 응시하자 황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네가 째려보면서 비웃길래.”
여전히 황보인은 고통(?)받고 있었다. 변해 버린 외모 때문에…….
“아니, 이것은…….”
황보인이 뭐라 변명하려는 순간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소청이 고개를 돌리고 싸늘하게 웃었다.
“저 봐, 움직이기 시작하잖아.”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속이 훤하게 드러나는 나의를 입은 여인들이 은밀하게 황보세가의 담을 넘고 있었다.
“저!”
황보인이 움찔하며 일어나려는데 소청이 그를 잡았다.
“대, 대장.”
“잠깐 기다려.”
“…….”
이상했다.
담을 넘어오는 요녀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던 소청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 이것들 봐라?’
음마로 보일 정도로 강력한 기운을 지닌 인물이 없었다.
‘일단 지켜보겠다 이거지?’
“대장…….”
습격해 온 여인들이 황보가의 무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내당의 무인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가주인 황보숭마저 모습을 드러내었다.
“대장, 저러다 다 죽소!”
황보인이 참고 있던 울분을 터트렸다.
“어쩔 수 없지. 황보인, 악이군, 잘 들어. 여인이라는 사실에 현혹되지 마라. 저들은 그저 적일 뿐이다. 가리지 말고 조져. 그리고 절대로 눈동자를 마주치지 마.”
“예?”
“그것만 명심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마음이 급한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요녀들의 술수에 홀린 황보가의 무인들이 칼끝을 돌리고 있었다.
“좋아. 가라.”
“예!”
파앗!
황보인과 악이군이 곧장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장문인, 승혜 소저.”
소청의 부름에 신호를 보내던 승혜와 멸절사태가 다가왔다.
“말하게.”
“저들이 사용하는 것은 환락무와 섭혼술입니다. 남녀를 가리지는 않지만 항마공의 불기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알겠네.”
소청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들도 차가운 분노를 머금고 황보가를 향해 뛰어내렸다.
“저, 적…….”
갑자기 담을 뛰어 습격한 여인들의 모습에 외당의 무인들이 위급성을 외치려다 멈칫했다.
그녀들의 눈을 보는 순간 갑자기 멍한 표정이 들었다.
“호호호, 이리 오렴…….”
여인의 손짓에 사내가 홀린 듯이 다가갔다.
화아악!
사내를 끌어안은 여인은 순식간에 그의 입술을 탐했고 새하얀 정기가 빠져나갔다.
“끄으으…….”
아무것도 못하고 잡혀 버린 사내가 정혈을 빨리며 고목처럼 말라 가기 시작했다.
“멈춰라! 이년!”
말라 죽어 가는 동료의 모습에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그녀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호호호, 먹잇감 주제에 어디서!”
오십여 명의 요녀들이 순식간에 앞서 달려 나온 무인들을 제압했다.
그녀들이 지나온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정혈을 빨리고 고목처럼 변해 버린 시신들뿐이었다.
땅땅땅땅!
적의 습격을 알리는 타종 소리가 울리고 황보가의 무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늦게까지 밀린 업무를 처리하던 황보숭은 외당의 참상에 말을 잇지 못했다.
벌거벗은 듯 얇은 나의를 입은 요사스러운 여인들.
그들의 뒤로 고목처럼 변해 죽은 수십여 명의 무인들.
“이런 망할 년들이! 뭣들 하느냐! 저년들을 당장 죽여라!”
황보숭이 솥뚜껑만 한 주먹을 움켜쥐고 뛰어들었다.
그 뒤를 따라 장로들과 내당의 무인들이 합류하자 순식간에 난전이 펼쳐졌다.
“하압!”
쩌엉!
내지른 일권에 나의 여인들이 튕겨 나갔다.
격체전공을 시전한 이후 내력이 반도 채 남지 않은 황보숭이라고는 하지만 백대 고수로 이름을 날렸던 강자였다.
여인들의 공격에도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았다.
“호호호, 그래도 이빨 빠진 호랑이 한 마리쯤은 있었나 보네?”
황보숭이 이곳저곳을 휘저어 놓자 밀린다 싶었던 요녀들이 일제히 물러나며 기묘한 움직임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닥쳐라, 이년! 감히 황보세가를 공격해? 모조리 때려 죽여 주겠다!”
분기탱천한 황보숭이 호목처럼 빛나는 눈으로 기운을 끌어 올렸다.
“호호호, 그래. 어디 한번 해보렴.”
“뭐?”
나의가 풀어 헤쳐져 사방에 흩날렸다. 마치 산들바람이라도 맞은 것처럼 펄럭이는 나의의 틈으로 여인들의 춤사위가 펼쳐졌다.
“으음…….”
선명했던 여인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흐릿하게 잔상을 만들자 황보숭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상하게도 춤사위에서 눈이 떼어지지 않았고 격렬하게 끓어올랐던 분노가 사라졌다.
미혼술이다.
저들의 춤사위가 그들의 정신을 흩어 놓고 있었다.
“휘둘리지 마라! 저년들의 춤사위에…….”
그 순간 그녀들의 눈에 짙은 칠흑빛이 어렸다.
깊다.
무저갱을 앞에 둔 것처럼 빨려 들 것만 같았다.
“호호호…….”
요녀들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 머릿속을 울려 왔다.
그녀들을 공격하던 무인들이 칼을 늘어뜨리고 몽롱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더 이상 방치했다가는…….
“으아압!”
황보숭은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크아앙!
범의 포효와 같은 기합성이 대기를 뒤흔들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