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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월진천 143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09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패월진천 143화

142화. 세작의 정체

 

 

 

 

짙은 어둠이 내리깔린 밤.

호남성 장사 인근의 황보세가.

덜거럭, 덜거럭.

결합부의 아귀가 잘 맞지 않는지 수레의 바퀴가 보는 이에게 불안함을 만들며 황보세가의 뒷문으로 다가왔다.

뒷문을 지키던 무인, 장삼은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거참, 수레 좀 고치라니까.”

짜증스러운 그의 말을 받은 것은 주름이 가득한 촌로(村老)였다.

“이눔아, 돈은 네가 줄 테냐? 가뜩이나 납품하는 식자재량도 줄고 값은 쥐꼬리만큼 쳐줘서 이문도 남지 않는구먼, 바퀴 고칠 돈은 하늘에서 떨어진다더냐?”

“거참, 왜 나한테 돈 문제를 이야기하는 거유? 돈은 총관하고 말해야지.”

“흰소리 말고 문이나 열어. 허리 아프다.”

“거참 성격하고는…….”

촌로는 괴팍한 표정으로 장삼을 나무랐다.

벌써 십 년째 황보가에 식자재를 납품하는 그는 강 노인이라고 불렸다.

어디서 흘러들어 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황보가를 오갔다.

“옜다. 치성이 놈이랑 술이라도 한잔하거라.”

열린 문으로 수레 끄는 당나귀의 고삐를 당긴 강 노인이 무인에게 작은 전낭을 던졌다.

쩔거럭.

제법 묵직하다.

“뭐, 이런 걸…….”

“망할 놈. 그럼 다시 돌려줄 테냐?”

“아, 아니오. 뭔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핫핫핫.”

장삼은 혹여 강 노인이 마음이라도 변할까 재빨리 전낭을 품에 집어넣었다.

황보가의 무인이라는 번지르르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그저 겉모습에 불과했다.

내당이나 외당도 아닌 고작 뒷문 위사밖에 되지 않는 그가 받는 품삯이라고 해 봐야 얼마 되지 않는다.

장삼의 네 식구가 근근이 입에 풀칠하며 살 정도였다.

그렇기에 강 노인이 가끔씩 동료들과 술이라도 마시라며 던져 주는 공돈은 제법 쏠쏠했다.

“그나저나 어째 요새는 잔치도 없누?”

“뭐, 그렇지 않소? 마천인가 뭔가 하는 놈들 때문에 원체 흉흉해서…….”

“어휴, 말도 마라. 그 씹어 먹을 놈들 때문에 무인들이 다 빠져나가서 식자재량이 반으로 줄어 버렸다.”

“뭐 어쩌겠소. 어여 들어가슈.”

장삼은 노인의 수레까지 밀어 주며 서둘러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놈아 안 하던 짓 하지 마라. 일찍 죽는다.”

“허, 강 노인 가기 전에는 안 죽소.”

“쯧쯧. 이놈아, 가는 데 순서 있다더냐?”

강 노인이 핀잔을 주었지만 장삼은 찢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레 미는 것이 대수랴?

품 안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전낭의 느낌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흐흐, 마누라 고쟁이라도 하나 사 줄까? 저번에 보니 구멍이 났던데…….’

장삼이 고쟁이를 사 들고 들어가 마누라와 뜨거운 밤을 보낼 생각에 히죽거리는 사이 강 노인의 수레가 덜거럭 소리를 내며 안으로 사라졌다.

“거참, 사람들 잠 다 깨우겠네. 바퀴 좀 고치라니까.”

눈을 찡그리고 툴툴거리지만 품에 있는 묵직한 전낭의 느낌에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강 노인, 오늘은 채소 상태가 엄청 좋은데?”

아삭!

식자재 상태를 점검하러 나온 숙수, 주필이 수레에서 당근 하나를 꺼내 베어 물었다.

“언제는 안 좋았나?”

강 노인이 샐쭉하게 눈을 뜨고 주필을 째려보았다.

“근데 소가주께서는 안 돌아오시나? 내 듣기로는 그 마천이라는 작자들과 싸움도 끝났다고 하던데?”

“허, 촌구석 노인네가 소식도 빠르구먼. 그건 또 어찌 알았소?”

“이놈아, 내 곁에서 듣는 귀는 멀었어도 바람에 흘러들어 오는 소문에는 네놈보다 훨씬 밝다. 갇혀서 밥이나 하는 놈이…….”

“하여간 말은. 누가 보면 어디 산중의 호랑말코 도사쯤은 되는 줄 알겠소.”

“늙으면 다 도인이고 신선인 게야.”

“웃기고 있네. 귀신이라면 모를까.”

주필이 피식 웃으며 당근을 입으로 가져갔다.

“말혀 봐. 안 돌아오신대?”

“나야 뭐 잘 모르지. 뭐 별다른 말이 없는 걸 보면 딱히 그럴 기미는 안 보이던데?”

“에휴…… 이거 장사하기 힘들구먼……. 안 그래도 싸게 들어오는데 계속 요만큼씩 팔았다가는 드러누운 할망구 약값도 못 대겠구먼.”

“…….”

강 노인의 말에 주필이 살짝 굳은 표정이 되었다.

“산산 할매는 여전하시오?”

“여전은…… 드러누운 지 십수 년이여. 쉽게 일어나겠는가?”

강 노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산산 할매라 불리는 노파는 강 노인이 장사에 터를 잡기 이전부터 호환을 당해 누워 있었다.

주필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사람들 말로는 숨만 쉬었지 시체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런 산산 할매를 십수 년째 병수발을 들고 있는 강 노인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휴우…….”

한숨을 쉰 주필이 당근 하나를 더 만지자 강 노인이 손등을 찰싹 때렸다.

“그만 처먹어라 이놈아. 총관 나리 아시면 또 경을 치려고…….”

“거, 왜 때리고.”

인상을 찡그리는 주필 앞에 강 노인의 손이 내밀어졌다.

작은 전낭.

“당근 처먹지 말고 가서 술이나 한잔 받아 와.”

“아휴, 뭔 돈이 있으시다고……. 오늘은 내가 사겠수.”

“시끄럽다 이놈아. 어린놈한테 무슨 술을 얻어먹는다고.”

“핫핫, 무슨 그런 소릴 하는 게요? 지난번엔 잘도 얻어 먹더만.”

“잡소리 말고 내 총관께 다녀올 테니 먹음직하게 한 상 만들어 놓거라.”

“알았수. 얼른 다녀오시오. 내 후딱 가서 술이나 한잔 받아 올 터이니…….”

주필이 어린 숙수들에게 물건을 내리라 하고 잰걸음으로 뛰어나갔다.

“그놈 참…….”

혀를 찬 강 노인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황보가의 내당으로 걸어갔다.

 

* * *

 

“저자냐?”

황보세가의 대전각 지붕 위.

소청은 황보세가에 은신해 있는 재선을 만났다.

“예. 강 노인이라는 자입니다.”

재선의 보고에 소청이 가늘어진 눈으로 강 노인을 살폈다.

황보세가에 잠입해 은신한 비마대들이 세작으로 가장 유력하게 지목한 자였다.

“의심한 이유는?”

“뒷문 시위인 하급 무사, 숙수, 총관, 황보가 내의 시비들까지 꽤나 깊은 대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

“언뜻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어 보면 모두가 황보가의 정보를 파악하는 내용들입니다.”

소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 노인은 걸어가면서도 황보세가 안쪽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다녔다. 무척이나 의심스러운 행동이기는 했다.

“흐흠……. 거처는 따라가 보았나?”

“아닙니다. 황보가를 떠나지 말라 말씀하셨기에…….”

소청은 황보가를 드나드는 이들 중 의심스러운 자들만 확인하라 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뭐, 대충 선별 했으니 따라가 보면 될 일이지.

“어떤 사람이야?”

“식자재상을 운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항상 같은 시간에 식자재를 가지고 황보가의 뒷문으로 드나듭니다. 자식들은 없고 부인이 있습니다.”

“부인?”

“예.”

“오래전 호환에 당한 이후 척추를 다쳐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움직이지 못하는 부인이라…….”

소청이 총관실에서 돌아와 주필과 술을 마시는 강 노인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을 감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나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세작이라면 기본 이상의 무공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이 지켜본 강 노인은 발걸음이 투박하고 움직임에 힘이 없어 보였다.

아무리 훈련이 잘된 자라 해도 은연중에 무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법인데 발걸음, 호흡, 작은 움직임까지 어느 하나 무인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무공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알겠다. 계속 주시해라.”

소청의 명령에 재선이 인사를 하고 은밀하게 모습을 감추었다.

 

* * *

 

덜그럭, 덜그럭.

“아유, 이제 나가슈?”

장삼이 문을 열어 주자 수레에 드러누운 강 노인이 대충 손을 흔들었다.

“거참, 술도 약한 양반이…….”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숙수 주필과 술을 퍼마신 게 틀림없었다.

물건을 배달하고 나면 항상 같은 모습으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하긴, 자식이 있기를 하나, 산산 할매마저 누워 있으니 집에 가도 재미도 없겠지…….”

장삼이 멀어지는 강 노인을 안쓰럽게 바라보다 외쳤다.

“거, 조심하슈! 요새 밤늦게 사내들이 횡액을 당하는 일이 있답니다!”

하지만 들은 것인지 못 들은 것인지 강 노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츱, 뭐 별일이야 있겠어? 다 늙은 노인인데……. 그러고 보면 저놈도 참 신기하단 말이야. 어째 매일 딴 데로 안 가고 집을 찾아가는지…….”

강 노인의 수레를 끄는 나귀는 따로 방향을 잡아 주지 않아도 희한하게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강 노인이 수레에 드러누워 코를 고는 사이 나귀는 외곽에 위치한 그의 거처에 도착했다.

그가 사는 곳은 그리 크지 않은 곳으로 상점과 집이 한데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나귀가 쇳소리를 내며 울자 잠에서 깬 강 노인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오냐, 고생했다. 인자 네눔도 가서 쉬어.”

수레를 풀어 주자 나귀가 잘도 알아듣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대충 수레를 내려놓은 강 노인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철컥.

“마누라, 나 왔네.”

문을 걸어 잠근 강 노인의 말소리에도 드러누운 산산 할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만 끔벅거렸다.

“자는 게여?”

비틀거리며 다가간 강 노인을 드러누워 있던 산산 할매가 똑바로 쳐다보았다.

“거, 잠도 안 자면서…….”

순간 강 노인의 눈이 몽롱하게 변해 산산 할매가 누운 침상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방금 전까지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차분한 모습이었다.

회백빛의 초점 잃은 눈.

강 노인은 마치 이지를 상실한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쓰아아아…….

“끄으…….”

새하얀 기운이 그의 입을 통해 빠져나와 산산 할매의 입으로 들어갔고 검은 기운이 그녀의 입에서 강 노인의 입으로 전해졌다.

우두둑!

오랫동안 굳어 있던 뼈마디가 풀리는 소리.

강 노인이 아니다?

이제까지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산산 할매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아함…….”

희한하게도 하품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늙은 노파의 것이 아니라 젊은 여성의 것이었다.

일어난 산산 할매의 얼굴에 가득했던 주름이 조금씩 옅어졌다.

“쯧, 노인네라 먹을 게 없네. 이래선 반나절도 못 가겠어.”

산산 할매, 아니 여인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찡그렸다.

초췌해져 버린 강 노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서 요사스러운 빛이 흘러나왔다.

“그래 알아봤니?”

“예…….”

여인의 말에 강 노인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대답했다.

“그럼 말해 봐.”

“소가주와 패왕대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흠, 그래? 이상하네. 분명히 아미의 소식이 전해졌을 텐데…….”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인의 이름은 선예.

음마의 제자로 환희요락궁의 여섯 대방 중 하나였다.

선예는 황보세가를 드나드는 이들 중 강 노인을 선택했다.

산산 할매를 죽인 다음 그녀로 변장한 선예는 강 노인의 이지를 빼앗고 며칠 동안 정보를 모았다.

황보가의 전력, 무인, 현 상황…….

강 노인은 아마도 자신이 섭혼술에 당했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이상하네. 역시나 아미만으로는 안 된다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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