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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월진천 133화

무료소설 패월진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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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패월진천 133화

132화. 되돌아온 자

 

 

 

 

초사를 따라 나온 곳은 간양의 외곽이었다.

사방에 불을 피워 대낮처럼 밝혀 둔 그곳에 이전에 없던 거대한 언덕이 만들어져 있었고, 곳곳에 파헤쳐진 구덩이에는 무언가를 가득히 담고 있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시체의 산과 시체의 구덩이.

산은 마천과의 싸움에서 죽어 간 정사 무인들의 무덤이었고 구덩이는 마천 무인들을 한데 담아 둔 것이다.

화르륵!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 코와 입을 막은 인부는 가득 찬 웅덩이에 기름을 붓고 불을 놓았다.

“…….”

잔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신을 방치하는 것은 좋지 않다.

시체가 썩으면 고약한 악취를 풍기고 전염병이 돌게 된다. 차라리 완전히 태워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간양의 무너진 건물들을 수복하는 작업과 별도로 시신들을 수거하는 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행되고 있었다.

 

“저기…….”

초사의 손가락이 한 사람을 가리켰다.

인부들의 틈에서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는 가냘픈 체구의 여인, 제갈상아.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작업을 지켜보던 소청이 챙겨 온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패월, 아직 몸이 완전하지도 않으신데 술은 좀…….”

“시끄러.”

“…….”

소청의 핀잔에 초사가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 공자께서 만류하셨지만 계속 고집을 피우고 계십니다. 휴식을 취해야 할 것인데 며칠 밤낮을 새우며…….”

“쯧, 제자리를 못 찾고 있군.”

“예?”

초사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소청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시신을 수습하는 그녀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곱디곱던 손은 흙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밤낮을 지새워 내력마저 소진된 것인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러다 몸이라도 상하면…….”

“놔둬.”

“예?”

“똑똑한 여인이다. 느끼는 게 많을 거야.”

전쟁 이후의 상처.

직접 본 것은 처음이리라.

고작해야 지도를 두고 말판 놀이나 해 보았을 것이고 대략적인 숫자 놀음만 해 보았을 것이다.

전쟁은 아름답지 않다.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남겨진 광경은 언제나 잔인하고 처참한 것이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그 안에서 펼쳐지는 지옥도는 참가한 자들만이 보아 온 광경이었다.

“초사, 마천의 공격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그녀는 최전방에서 전쟁을 이끌어 가야 하는 군사다. 때로는 잔인해지고 더 독해져야만 한다. 스스로 이겨 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소청의 시선이 그녀를 지나쳐 거대한 봉분에 다다랐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그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들을 막았기에 봉분이라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막지 못했다면 중원 천지에 시신이 가득하고 내천과 강은 피로 가득 채워졌을 것이다.

마천혈세(魔天血世).

도적이 아닌 무인으로서 돌아온 걸음이다.

전생과는 달리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졌으니 외면할 수는 없다.

그들이 지나갔던 그 처참한 지옥이 다시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 지옥 속에 자신의 이름을 아는 그 누구도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 * *

 

쪼르륵.

양쪽으로 도열하듯 앉은 사람들의 앞에 찻잔이 놓였다.

시비는 잔뜩 움츠린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채웠다.

최고급 용정차의 향기가 진득하게 피어올라 대전 안을 가득 채웠지만 어느 누구도 손을 대지 못했다.

향기마저 짓눌러 놓는 답답한 공기로 인해 숨 쉬기조차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한 사내, 마천의 수장인 마종이었다.

“구 사형이 패배했다라…….”

상좌에 앉은 마종의 혼잣말에 도열한 마천의 세주들이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

마종의 무덤덤한 시선이 세주들이 차지하고 앉은 자리를 향했다.

열두 자리 중 채워진 것은 불과 여섯뿐이었다.

믿었던 구자겸의 패배.

그리고 이만 무사들의 죽음.

그들의 죽음이 슬프냐고? 수하의 죽음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냐고?

틀렸다.

그는 마천 어느 누구의 죽음도 슬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수단에 불과했다.

‘재미있군. 고작 시답잖은 도적 놈 따위가…….’

진소청, 아니 막야.

그저 발에 차이는 돌멩이처럼 천한 놈이었다.

눈을 감은 그의 머릿속으로 오래된 기억 속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과거의 기억들…….

피로 물든…….

 

$-삼 공자!

 

자신을 부르던 이름…….

 

“삼 공자!”

파군(破君) 용유명의 외침이 비고를 울렸다.

“그저 전설일 뿐입니다. 차라리 몸을 숨기고 후일을 도모하셔야 합니다.”

“후일? 우리에게 남은 것이 있던가?”

“삼 공자…….”

마천의 삼 공자, 종리세의 허망한 목소리에 용유명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모두가 죽었다.

중원 일통을 목전에 두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종리세와 파군 용유명은 십만대산의 마천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전설로 남아 있던 비고의 검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파군, 모든 것을 되돌려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삼 공자…….”

녹슬어 부서질 듯한 검을 들고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는 삼 공자 종리세의 모습에 용유명이 눈물을 흘렸다.

녹슨 검.

그것 하나만이 남았다.

십만대산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성은 처참하게 부서졌고 전각들은 모조리 불타올랐다.

삼만을 넘던 마천의 무인들 중 자신들을 제외한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예언의 때를 맞추어 시작한 중원 정벌이 이리도 허무하게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필경 잘못 보았음이리라. 천문을 살펴야 하는 흠천각(欽天閣)이 다섯별이 늘어서는 오위합취(五緯合聚)를 잘못 읽어 낸 것이리라.

“분명 오위합취의 때가 다시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푹!

“컥!”

고개를 드는 순간 녹슨 검이 용유명의 아가리를 뚫고 잔인하게 틀어 박혔다.

눈물로 범벅이던 용유명의 눈동자에 불신이 가득하게 어렸다.

‘설마 나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원통한 눈빛이었다.

“천문? 그따위 건 아무런 필요도 없다. 예언? 웃기는 소리. 나는 더 이상 그따위 허황된 말에 기대지 않겠다.”

“…….”

그의 입을 통해 몸 깊숙하게 꽂힌 녹슨 검, 역천(逆天).

하늘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전설을 가진 마천의 보물이자 비고가 지키고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돌아간다. 하늘을 거슬러 돌아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구자겸이 가졌던 혈궁(魔宮), 백효가 가졌던 마궁(魔宮),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빙궁(血宮)의 정수. 돌아가 그 모두를 가질 것이다. 홀로 삼궁(三宮)의 힘을 모아 누구보다 강해질 것이며 예언 따위가 아닌 나의 힘으로 중원을 정벌할 것이다!”

우우웅!

검이 울기 시작했다.

용유명의 피를 빨아 먹고 그의 시신마저 녹여 버린 역천검이 오랜 세월의 녹을 벗어 내고 비고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백색 광채를 뿜어내었다.

의식의 준비는 끝났다.

어쩌면 그저 전설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전설이든…… 아니든…….”

종리세는 주저할 것도 없이 자신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의 잔인한 욕망이 검에 닿아 모든 끝이 시작으로 되돌아갔다.

번쩍!

 

마종 종리세의 감았다 뜨인 눈이 자신의 허리께를 향했다.

검은 마기를 머금은 검, 역천.

희한하게도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뒤 만난 역천은 녹슬어 있지 않았다.

검신은 이전의 백색을 대신해 칙칙한 묵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종리세는 직감적으로 역천검이 본래의 힘을 완전히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운이 좋은 놈이군. 단 한 번뿐인 기회였는데 그 자리에 있었다니…….’

자신이 모든 시간을 되돌리기로 결정했던 그 순간, 필시 비고를 털러 온 놈은 일천청동상을 넘지 못하고 빛에 휩쓸렸으리라.

그 역시 이전의 삶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자신이 그러했듯 누구보다 빨리 강해졌으리라.

폭마에 이어 환마, 잔마, 검마, 독마, 충마…….

이제는 구자겸까지.

‘재미있군. 버러지가 운이 좋아야 나비가 되는 것인데. 제 분수를 모르고 용이 되려는 것인가?’

종리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버러지 한 마리가 날뛴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파군이 앞으로 나섰다.

“마종, 혈승을 벌해야 합니다. 사천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상황입니다. 놈을 놓아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상좌의 첫 번째 자리.

귀로(歸路)의 제물이 되었다는 이유로 파군 용유명을 열두 세주의 수좌의 자리에 앉혔다.

물론 그는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종리세의 시선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청하는 혈승 탑리격을 향했다.

“말해 보라. 어째서 그런 판단을 했는지.”

종리세는 내리깐 눈으로 혈승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홀홀, 어떤 이유를 말해도 결국은 마종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그저 뜻대로 하시옵소서.”

“…….”

혈승은 변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혈마궁이라는 거대한 단체의 수장이자 토번의 지배자로 살아온 이였다.

뜻이 있었으리라.

“닥치시오! 혈승! 대공을 구해 온 것은 잘한 일이나 사천을 손에 넣었어야 했소!”

파군이 코끝을 찡그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에 동조하듯 다섯 세주들이 같은 눈으로 혈승을 노려보았다.

“홀홀, 아이야. 너는 무황을 막을 수 있겠느냐?”

“뭐, 뭣이? 이자가 되도 않는 이유를…….”

파군이 눈을 찌푸리며 일어서려는 순간 종리세의 손이 뻗어졌다.

“커억!”

무형의 기운이 파군을 짓눌러 앉혔다.

종리세가 손을 쓰자 다섯 세주들이 고개를 처박으며 바닥에 엎드렸다.

“파군, 흥분하지 마라.”

“요, 용서를…….”

“…….”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종리세가 힘을 풀었다.

혈승은 가만히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마종.

마(魔)의 집약체.

마궁의 정수를 흡수하기 시작한 그의 두 눈은 심연처럼 깊어져 있었다.

그 끝을 알 수 없으니 더욱 공포스러웠다.

“…….”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허, 이 정도인가?’

머리가 아닌 몸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혈승의 얼굴에 주름 가득히 미소가 지어졌다.

“홀홀, 이전보다 더욱 강해지셨군요.”

“아직이다. 마궁의 힘을 아직 삼 할밖에 얻지 못했다.”

혈승의 말에 종리세가 피식 웃었다.

“탑리격, 그대는 충분히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다. 애초에 네게 내린 명은 구 사형을 구해 오라는 것이지, 사천을 손에 넣으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 잡을 수 있음에도 놓은 이유가 궁금하다.”

“홀홀, 진소청을 죽이고 사천을 손에 넣었다면 무황이 전면에 나섰을 것입니다.”

혈승의 눈동자는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무황을 넘어설 수 있겠느냐고.

“무황…….”

위도혁.

종리세가 유일하게 중원 무림에서 인정하는 강자였다.

어찌해서 그만한 강자가 중원을 정벌해 사도련의 세상을 만들지 않았던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 전생에 그가 생존해 있었다면 마천의 중원 침공은 일어나지도 못했으리라.

종리세는 강했지만 오만하지 않았다. 자신을 냉정하게 판단할 줄 아는 사내였다.

‘하나 그저 넘어야 할 산일 뿐.’

마궁의 정수를 완전히 얻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직은 아니겠지.”

“하면 일단은 물러나야 합니다.”

“…….”

“이만. 마천은 삼 할의 전력을 잃었습니다. 빙궁은 멀리 있지요. 이미 저들은 정사가 연합해 단단해졌고, 운남마저 저들을 돕고 있습니다. 무황이 그들을 규합해 밀고 온다면 마궁의 힘으로는 막지 못합니다.”

혈승의 말이 옳았다.

이만이라는 수는 마천조차도 무시할 수 없는 수였다.

빙궁이 중원으로 오자면 족히 반년은 필요하다.

토번, 마궁의 힘만으로는 정사 연합에 운남까지 모인 저들에 비해 열세였다.

마궁의 정수를 흡수하지 못한 이상 무황이 직접 개입을 해 온다면?

“결국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군.”

“예. 마종께서 마궁의 정수를 완전히 얻어 무황을 쓰러뜨릴 때까지는…….”

“…….”

“제게 한번 맡겨 보시겠습니까?”

혈승의 말에 파군은 물론 세주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삼궁은 마천에 복속된 세력일 뿐이었다.

혈승이 아무리 뛰어난 강자라고는 하지만 중원 정벌을 주도하는 것은 두 대공과 열두 세주들이어야만 했다.

안 된다 말해야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 있는가?”

“홀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불태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

종리세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짓고 있는 혈승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째서?

무엇이 오랜 삶을 살아온 토번의 주인을 스스로 움직이게 하고 있는 것인가?

그를 알아 오는 동안 언제나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스스로 전면에 나선 적이 없었다.

“후후, 좋다, 혈승. 전권을 주지. 그대를 믿겠다.”

“기대에 부응해 보겠습니다. 홀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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