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월진천 1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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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월진천 130화
129화. 일합의 승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궁의 승려들이 모자겸과 그의 수하들을 끌고 소청의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마천의 잔당을 쫓아간 이들 중 살아 돌아온 이는 모자겸을 포함해 고작 스무 명이 전부였다.
바닥에 놓인 모자겸은 상처가 심했지만 미약하나마 숨이 붙어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다.
하지만 안도감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홀홀, 전장에 나서서 내 손으로 죽이지 않은 첫 번째이니라.”
“…….”
소청이 혈승을 노려보다가 옥명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미 그들의 대화를 전해 듣고 있음이니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옥명자와 별동대의 무인들이 구자겸을 데리고 다가왔다.
그를 혈승 앞에 내려놓은 그들은 모자겸과 운남의 무인들을 부축해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일단은 대족장을 살려 내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할 말은 그게 다냐?”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여차하면 모든 힘을 쏟아부어 혈승을 죽여야 했다.
그래야 한 가닥 희망이 생길 테니까.
소청은 뒤로 잡은 창대에 힘을 주었다. 단전의 기운이 사지 백해로 퍼트려졌다.
놈이 방심하는 찰나의 틈을 노려야 했다. 기회를 잡는 순간 단전의 힘을 모조리 끌어 올려야 했다.
일격이어야 한다.
“아이야, 긴장하지 말거라. 대공을 넘겨받았으니 싸움은 없을 것이다.”
“개소리. 그걸 믿으라고?”
“나는 탑리격이다.”
“…….”
“내 입으로 한 말을 번복할 정도로 약해 보이더냐?”
혈승의 눈이 완만하게 휘어지는 순간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력이 배가되었다.
‘크윽…….’
짜릿한 압박감이 전해져 왔지만 소청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내색해서는 안 된다. 적에게 빌미를 줄 뿐이다.
“하지만 그냥 물러설 수도 없고 어찌한다.”
그의 말에 소청의 눈이 씰룩거렸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혈승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러면 어떠하냐? 너와 내가 이 사천을 놓고 일합의 승부를 가리는 것이다.”
“일합의 승부라고?”
“오냐. 네가 막는다면 이대로 돌아가겠다. 어떠냐?”
“…….”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저들은 수백에 불과하지만 강하다.
정사 연합군의 수가 더 많다는 이유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이미 싸우기 힘들 정도로 지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천을 그냥 두겠다는 이유도 알 수가 없었다.
사천은 청해성을 제외하고 중원에서 가장 넓은 성이다.
그 거대한 크기 외에도 사천은 매우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가진다.
북으로 섬서, 감숙과 청해와 닿아 있고 남으로 운남, 귀주, 호남과 경계를 이룬다.
또한 그 끝이 중원을 향해 송곳처럼 뻗어 있으니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있다.
그렇기에 그곳에 서천맹을 만들었고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 소리를 믿으라는 건가?”
“홀홀, 그것은 너의 판단에 따라 다르지 않겠느냐?”
“과한 호의를 베푸는군. 지금이라면 당장 공격해서 차지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떠볼 줄도 아는 게냐?”
“…….”
“옳다. 과한 호의니라. 가지지 말아야 할 호기심임을 주체할 수가 없음이기 때문이다.”
“…….”
“만약 대공이 죽었다면 너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내가 네게 호기심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 역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보고 싶어졌느니……. 다른 듯 같은 사람들 중 승자가 누구인지 너무도 궁금할 따름이니라.”
도무지 혈승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진심일까?
그리고 같은 듯 다른 사람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 것인가?
“젠장, 거부할 수가 없군.”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가 약속을 지키든 지키지 않든 충분히 걸어 볼 수 있는 도박이었다.
일합의 승부.
그 하나로 모두를 구할 수 있었다.
쓰러뜨리는 것도 아니고 막으면 되는 일이었다.
어차피 단전을 제외하고 남은 것은 단중혈의 화기뿐이었다.
“홀홀홀, 잘 결정하였다. 반드시 막아 내거라. 그래야 나도 마종께 드릴 말씀이 있지 않겠느냐?”
“제발 사정 좀 봐 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군.”
“뭐라? 오홀홀홀.”
소청의 투덜거림에 혈승이 큰 소리로 웃었다.
긴장하지 않는다.
눈앞에 위급함이 다가와 있음에도 여유롭게 농을 건네 오는 소청의 모습에 혈승이 흡족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손짓을 보내자 마궁의 승려들이 수십 장 밖으로 물러났다.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리라…….
“어찌 너는 사람들을 물리지 않는 것이냐?”
“어차피 막지 못하면 다 죽을 사람들이야. 그럴 바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는 것이 좋지. 내가 죽는 순간을 노려 당신을 공격할 수 있을 테니까.”
소청의 말에 혈승이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역시나 너는 참 재미있는 아이로다. 그 입만큼이나 실력도 나를 감탄시켰으면 좋겠구나.”
혈승은 천천히 자신의 가사를 풀어내었다.
‘응? 저건?’
혈잠의 보포?
같은 물건이다. 폭마에게서 얻어 자신의 무기가 된 흑색 피풍의와 동일한 물건이었다.
“어찌 놀라느냐? 설마하니 혈잠의 보포가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더냐?”
“하긴…….”
“애초에 혈잠은 우리 마궁의 것이었느니…….”
“그렇군. 쳇!”
입맛이 썼다.
단 하나의 기물이라 생각했는데 희소가치가 떨어져 버렸다.
이곳에서 살아나면 소강 녀석에게 줘 버려야지…….
소청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장난스러운 생각을 하며 천천히 물러났다.
“일합을 겨루어야 하니 너의 무공을 알려 주겠느냐?”
“청염(靑炎)의 천뢰충파.”
“호오? 독특한 이름이구나. 하늘의 벼락으로 부순다라……. 처음 들어 보는 무공이로구나.”
“내가 지었으니까.”
“무공을 창안했다? 홀홀홀, 기대되는구나. 청염이 들어갔으니 열화공이렷다.”
“그건, 직접 경험해 보면 알겠지.”
“옳다, 옳아. 홀홀홀. 노납이 쓸 초식은 파라혈수인(爬羅血手印)이라 한다.”
“…….”
이름만 들어도 알 것만 같았다.
그물(라: 羅)이라는 뜻이 들어가 있으니 혈수가 세상을 짓누를 것이다.
“자, 그럼 받아 보거라.”
후우우욱!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붉은 가사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고오오오…….
하늘이 붉게 물든다는 것은 착각이었을까?
그 착각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이 짓눌러 온다.
부처의 손바닥에 갇힌 제천대성처럼 그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수 없으리만큼 거대한 기운이었다.
‘크윽…… 다 늙은 노인네가 뭐 이리…….’
소청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하지만 그게 뭐든 간에…….
그 일격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찢어 내지 못하면 모두가 죽는다.
우우우웅!
단중의 화기가 맹렬하게 단전을 향해 달렸다.
굽혀진 허벅지와 종아리가 당겨져 근육이 배 이상 부풀어 올랐다.
기다려야 한다.
다가올 때까지…….
소청의 전신이 푸른 불꽃으로 변했다.
‘아직 부족하다. 이 정도로는 안 돼…….’
소청은 전신 세맥에 퍼져 있는 기운들까지 모조리 끌어모았다.
우우웅!
거대한 울림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터져 나가지 못한 힘이 소청의 단전을 진동시켰다.
아직…….
목구멍으로 넘어온 핏물이 다물어진 입술 사이로 스며 나왔다.
그리고 붉은 하늘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순간 소청의 눈동자가 푸른 화염을 토해 내었다.
꾸우우우!
짓밟듯이 누른 발에 대지가 비명을 지르고.
슈가가각!
휘둘러진 창대와 함께 푸른 불꽃이 길게 뻗어 나왔다.
쩌어어어엉!
부딪혔다.
푸른 기운이 붉은 하늘을 갈랐다.
그 사이로 가려져 있던 태양과 청명한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고요함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지축이 뒤흔들리고 폭풍이 몰아쳐서 보이는 모든 곳을 집어삼켰다.
휘이이이…….
가까스로 폭풍의 여파에서 버텨 낸 신승이 두 사람의 신형을 찾기 위해 안력을 집중했다.
“커억!”
혈승은 처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고 소청은 일 장 가까이나 밀려나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고통스럽게 기침하며 검은 핏물을 쉬지 않고 게워 내었다.
진 것인가?
신승은 서둘러 자신이 가진 모든 기운을 끌어 올렸다.
공격해야 했다.
모두가 힘을 합해 혈승을 공격해야만 했다.
모두가 죽더라도 혈승 하나만큼은 죽여야 했다.
그런데 별안간 혈승이 소청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홀홀홀, 과연…… 기대 이상이로고……. 잘하였다. 하나 마종께 비하면 멀었구나, 아이야. 하나 명심하여라. 정벌이 멀지 않았음이다. 그때도 지금과 같다면 중원은 피로 물들 것이다.”
그는 잠시 소청을 바라보다 미련을 두지 않고 몸을 돌렸다.
가는 것인가?
어째서? 누가 보아도 그가 이겼음인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신승이 다급히 소청을 향해 몸을 날렸다.
소청의 상태가 심각했다.
파리한 안색은 물론이거니와 눈동자에 초점이 흐려지고 있었다.
신승은 재빨리 모았던 기운을 소청의 명문혈을 통해 주입했다.
울혈이 쌓였으리라. 기맥을 열어 주지 않으면 주화입마에 빠져들 것이 틀림없었다.
“우웨엑!”
한참 만에 소청이 검은 피를 토해 내었다.
“후욱, 후욱, 후욱…….”
소청이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마천의 승려들과 함께 멀어지는 혈승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궁주님. 어찌 물러나셨습니까?”
“…….”
수제자인 아달타의 물음에 혈승이 빙긋이 웃었다.
“이겼다 생각하느냐?”
“제가 보기에는…….”
“홀홀홀.”
혈승이 손에 든 붉은 가사를 내밀었다.
“모든 공력을 담았느니라.”
“예?”
아탈타가 놀란 표정으로 가사를 바라보았다.
찢어졌다.
그리고 가사를 잡은 혈승의 손이 화상으로 징그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놀라운 아이로고……. 파라혈수인을 뚫은 것도 모라라서 혈잠의 보포까지 찢어 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늘.”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이 너무도 평화로워 보였다.
“하면 차라리 지금 죽이는 것이…….”
“아탈타여. 내가 약속하지 않았느냐?”
“…….”
“재미있지 않겠느냐? 노납은 기대되도다. 마종과 그의 싸움이. 홀홀홀홀.”
탑리극의 웃음소리가 사방을 가득히 울렸다.
그들은 그렇게 구자겸을 구해 토번으로 향했다.
* * *
소청은 정신을 잃어버렸다.
심각한 내상을 입었지만 주화입마는 피했으니 천운이라 할 만했다.
정말로 싸움이 끝났다.
신승은 가만히 바닥에 누운 소청을 온화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끝은 아니리라.
마천은 다시 공격해 올 것이다.
몸서리치도록 강한 혈승을 비롯해 혈마궁이 버젓이 남아 있었고 그를 수하로 둔 마종이 버티고 있었다.
단지 한 번의 침공을 막아 낸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중원을 구한 것은 틀림이 없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슬퍼해야 마땅함이었지만 사천은 지켜진 것이다.
그는 누가 뭐라 해도 정천 최강의 무인이 되었다.
“고맙네. 정말로 고맙네. 내 태존과 검존에게 자랑거리가 생겼음이야. 자네의 모습을 직접 보았으니. 헛헛헛.”
소청을 조심스럽게 안아 든 신승의 웃음소리에 바라보던 모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뒤따랐다.